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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18-07-29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2-33문

 

우리는 제31문을 통해 “효력 있는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효력 있는 부르심에 대한 ‘효과적 부르심에 따르는 유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기록을 하면 칭의, 양자됨, 성화와 거기에 따르는 유익입니다. 죄의 삭듲 사망이었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소요리문답 32문을 보시면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금생에서 어떤 유익들에 참여합니까?”라고 하고 있습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칭의, 양자됨, 성화 그리고 금생에서 이것들에 동반되거나 이것들로부터 나오는 여러 유익에 참여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칭의에 대해서 배우고 나중에 양자됨과 성화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고백을 보면 아주 간략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67문을 보면 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유효한 부르심이란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과 은혜의 역사인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거저 주시는 특별한 사랑이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감동시켜 그것을 행하게 한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당신님을 받으실 만한 때에 그 말씀과 영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오게 하셔서 그것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결심하게 하심으로 그들로 비록 그들 자신은 죄 가운데 죽었으나 기꺼이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여 그 가운데 제공되어 전해진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서게 됩니다. 모세는 신25:1절에서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칭의’할 때 당신님의 백성을 향해 의롭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칭의는 아주 간략하게 말하면 선언입니다.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것이고, 검사와 변호사도 할 수없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죽음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칭의로 죄인을 의인으로 구원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칭의를 위해서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회개하고 믿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싶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는 것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는 회개하고 이제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효력 있는 부르심에 대한 것을 돌아보기 위해서 예배 중에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은 성도라면 자신을 살필 줄 아는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 먼저 칭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칭의는 의롭다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법적인 용어로 죄가 있든 없든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칭의하여 줌으로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시켜 준 것도 감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조그마한 행실을 보고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누가 ‘하나님 면전 앞에서 죄인이 아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위대한 십자가 사건으로 완전한 의가 없는 죄인인 우리에게 자유로운 의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5:21절에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되었고, 따라서 우리가 당신님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넘겨졌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치 어떤 죄도 짓지 않은 자처럼 대우하십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모두 완전하게 지킨 자처럼 대우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어떤 선행과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처럼 그렇게 선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만이 우리의 “칭의”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왜 칭의가 중요한지를 아는 것이고 신앙의 근본입니다.

 

롬8:30절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남은 자를 부르실 때는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다양한 방법으로는 사업이나 진학의 실패로, 건강의 문제 등으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되게 회심하는 데에는 그 어떤 자질이나 능력과 은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의 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회개하여 신자라고 불리게 된 이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선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즉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동을 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지 구별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점차 악한 행동을 싫어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위해 구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세상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칭의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제33문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칭의란 무엇입니까?”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칭의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혜의 행위로, 하나님은 칭의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들이시는데, 오직 우리에게 전가되고,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2:16절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는 것은 의 때문입니다. 내가 행위와 그 어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가인 루터는 칭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가 서고 넘어짐을 결정하는 중요한 교리”라고 강조합니다. 그가 말할 수밖에 있었던 이유는 사제들의 부패도 중요했지만 교리의 부패도 큰 문제였습니다. 면죄부를 사기 위해서 그리고 연옥을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사제들은 사람의 노력이나 성찬으로 의로워진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부패한 것입니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 교리가 무너지면 교회도 무너진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칭의가 무너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도 무너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지 않아도 사람의 행위와 선행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다른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있는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칭의는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소요리문답 제33문에서는 하나님이 오직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칭의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죄인의 책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아니하고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칭의에 대하여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에 참된 믿음을 일으켜 주셨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공로와 함께 받아들이고, 그분을 우리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그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음의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지 중간은 없습니다. 즉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없음을 믿든지, 또는 만일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음을 믿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분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반쪽짜리 구주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8)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동시에 엄격히 말하자면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해 주는 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님의 모든 공로로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많은 거룩한 사역들을 우리에게 전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시고, 믿음은 우리가 당신님의 모든 혜택들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는 도구입니다. 이 혜택들이 우리의 것이 될 때에, 그것들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면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만이 아니라 벨기에 지역의 사람이든 독일인이든, 영국인이든 그리고 한국인이든 “칭의”가 중요했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삼아주시고, 값없는 은혜의 선물을 주심으로 악한 자들이 누릴 수 없는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죗값을 모두 치른 전과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단순히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활주일이 되면 과거에 죽으셨던 고난만을 생각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제 예수님은 영광의 자리에서 통치하고 다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의 체험과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진실로 회개하고 신앙생활하게 되면 선행을 하려고 한다고 가르칩니다. 선행을 통한 칭의가 아니라 칭의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선행을 하려고 한다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제들이 가르치는 것과 분명히 배치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행함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행함을 통하여 선물을 받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 칭의로 인하여 자유함을 얻은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한다고 세상 사람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믿음에는 바로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에 대한 믿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성경의 있는 말씀을 전적으로 동의하고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신경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 나의 양심의 선언이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모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고 또 우리를 온전히 의롭게 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칭의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는 예수님을 밖에 두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품고 생활에서 믿음의 행실을 선으로 즉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도구로 삼아 이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여 당신님께서 일하실 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죄를 묻지 아니하시고 사하여 주심으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법정 선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은 의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눅18:9,14절을 보시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세리를 들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로서 나를 사랑하여 주시고 구원하실 것을 바라보면서 회개를 하는 세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외식 적으로 겉으로 거룩하게 회개하는 바리새인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신뢰의 관계 속에서 잘 표현되는 은혜의 방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있습니까? 주님을 야먕과 욕망으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바리새인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십니까? 하나님의 칭의를 믿으십니까? 그러면 고전13:4-7절을 묵상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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