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

by 전은덕 posted Apr 1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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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
강설날짜 2022-04-10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

 

지난주일 지팡이 교회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문과 4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3문의 질문은 “당신은 어떻게 죄와 비참함을 압니까”였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과학적인 지식으로 자연과 우주로부터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알 수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으로 인해 구원받은 성도는 죄와 비참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성도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비추는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과 같은 율법을 통해 우리는 다윗처럼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라고 기도하며 “어찌 나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신음을 내며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벌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며 울부짖습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상상할 수 없는 사랑의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알기에 벌레와 같은 자신의 처지를 압니다. 이처럼 원죄는 무섭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죄를 지어도 자신을 벌레에 비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가 어떻게 죄라고 하며 하나님을 비웃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에 최고의 학문을 배운 사람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분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과거가 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예수님을 믿도록 하셨습니다. 어찌 하나님의 은혜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율법을 통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우리보다 선민이라고 하는 유대인은 더 잘 알아야 하지만 오히려 율법을 “하라”와 “하지 말라”로 구분했습니다. 율법을 613개의 항목으로 “하라”는 248개로 “하지 말라”는 365개로 만들었습니다. 이런다고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율법을 많이 만들면 만들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도록 함으로 오직 하나님만 믿으며 신앙생활 하라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듯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복음을 들고 세상에서 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이웃을 사랑하고자 합니다. 이웃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삶 속에서 믿음의 생활을 합니다.

 

오늘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한번 질문해 보겠습니다. 성도가 되었으면 이웃을 온전하게 섬길 수 있으며 하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고 했지만, 감옥에 있으면서 의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들으니 과연 저분이 오실 메시야로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여자가 낳은 사람 중에 큰 자라고 하는데도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야곱도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베드로 등도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5문은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답으로 “아닙니다.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원죄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한 결과입니다. 사람의 가장 큰 비참함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는 비참함은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위대한 선지라 할지라도 우리와 같은 비참함을 가지고 있기에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비참함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으로 인해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을 받습니다. 교회인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대로 신앙생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인해 찔림으로 자신을 돌아보며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을 생각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참된 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뜻과 행실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며 기도합니다. 이웃을 사랑해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성인군자도 불가능입니다. 오직 유일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독생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분 외에 그 누구도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자신의 무능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늘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악 된 현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계시의 말씀을 통해 사람은 비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시의존 사색”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의존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먹어야 합니다. 세상의 법은 유전무죄 또는 무전유죄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의 법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미흡하므로 늘 수정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온전합니다. 세상의 법처럼 수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보다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를 세상의 법은 죄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지은 죄도 죄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마음으로 지은 죄도 환히 비추어 자신의 비참함을 알도록 합니다. 비참함에 놓인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알게 함으로 보혈의 사랑을 누리도록 합니다. 보혈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로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성도는 행복합니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이웃도 온전하게 섬길 수 없습니다. 나의 양심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리고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이웃과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하고 있는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가?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는 성도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처럼 “아닙니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성도는 행복합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으며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며 의지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 삶을 생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을 알도록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사랑을 알게 되며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생활하고자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등불과 같이 인도하십니다. 어둠 속에서 등불이 환히 비추는 것처럼 말씀이 등불이 되어 온전한 길로 안내합니다.

 

사탄은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을 이용하고자 합니다. 마음으로 죄를 짓도록 유도합니다. 마음으로 죄를 짓도록 한 후에는 또다시 죄를 범하도록 유혹합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신의 들보는 보지 않고 이웃의 들보를 보며 정죄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방어하며 이웃을 공격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마9:12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아시기 때문에 의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죄를 지적하심으로 당신님을 통해 치료받으라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세상의 의사는 약으로 외적인 것을 치료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죄를 치료하십니다. 말씀은 거울이 되어 주심으로 나를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외적인 것만 아니라 내면까지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참으로 신비롭지 않습니까?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죄를 알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마귀는 성도라 할지라도 유혹합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도 못 하도록 함께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있습니다. “날마다 죽노라”입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생활할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주님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도 바울은 마지막 때를 알기에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사도 바울은 나는 나의 죽음을 통해 날마다 주님께로 간다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 있습니까?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은 성도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마귀의 권세가 높다 할지라도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님들께서 주님만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같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부패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품어주시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순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이기도록 하십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도록 하십니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비참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의 죄의 심각성을 말씀하십니다. 죄를 알 때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위로를 통해 기쁨을 누리며 비참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까?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성적으로 무능하고 무력하며 마귀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외부로부터의 구원자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독특한 방법으로 비참한 현실에 있는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습니다.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함만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받은 것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신앙생활 하면 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생활하면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로 인하여 생긴 것을 예수님께서 중보의 사역을 하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되었다 할지라도 사람은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기보다는 하나님을 배반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섬기기보다는 이웃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여 주셨는데 왜 죄를 또 짓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고통을 단번에 없애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요13:34-35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성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연단의 과정의 길입니다. 지금은 순도 99%라면 마지막 날에는 정금이 됩니다. 그날에 사람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그때를 바라보며 주님만 의지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죄를 포장하면 안 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겸손히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어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나의 의지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전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음식도 중요하지만, 나의 영육을 구원할 수 있는 복음을 들을 때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은 구누나 변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변명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자신은 노력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심판에서는 소용없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변명과 합리화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 인정하라고 합니다. 율법을 통해 거울을 보라고 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신이 더 중요합니다. 언제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이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은 세상 사람들은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삼위 하나님을 믿는 교회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비참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5문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로 고백합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습니다.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합니다. 자신이 부패하고 죄악 된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만 믿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부패하고 죄악 된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부패성을 밝히 볼 수 있도록 율법이라는 거울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 때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은 성도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만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시며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때를 소망하며 믿음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주님께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날마다 자신의 처지를 알며 주님만 바라보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