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를 알고자 하십니까? 삼박자 축복 아니다.

by 전은덕 posted May 2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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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요한삼서
강설날짜 2023-05-28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kGhbNZW2UbQ

요한삼서를 알고자 하십니까? 삼박자 축복 아니다.

 

과거나 오늘날 교회는 한결같이 자신의 교회가 성경 중심이며 말씀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교회가 가장 좋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는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과연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교회입니까? 교회가 성경 중심의 교회라면 믿음의 선배님들께서 유산으로 남기어 주신 교리는 ‘왜 가르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리를 전하다 보면 성경 중심적 교회라고 하지만 설교와 교리가 충돌됩니다. 성장을 위한 설교를 하므로 교리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지만, 성경과 교리를 전하고자 하는 목회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유능해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교리를 전함으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경을 전했지만, 사이비와 이단 그리고 가짜 복음을 전하는 자들 때문에 믿음의 선배님들은 성경을 교리로 체계화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성경을 바르게 알도록 요약된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믿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단과 사이비 등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교회 때문에 좋은 교회까지 세상 사람들은 이상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시대에 교회는 유산으로 남기어 주신 교리를 바르게 전함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를 드러내야 합니다. 교리를 등한히 여기면서 좋은 교회라고 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교회를 지키려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교리를 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리는 성경에서 나왔고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교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요한삼서를 알았으면 합니다. 요한삼서는 신약 성경에서 가장 짧은 글입니다. 특히 219개의 단어를 사용하여 쓰인 책입니다. 요한삼서는 사도 요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인칭 단수를 사용하면서 가이오라는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면서 요한삼서에 등장하는 가이오 외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장로, 데메드리오, 디오드레베” 등이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사도 요한은 이방인으로 구성된 교회에 편지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라는 편지를 써야 했던 것입니까? 디오드레베라는 사람 때문입니다. 디오드레베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9절에서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으뜸이 대고자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시면 디오드레베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복음을 전하는 형제들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사도 요한의 권위를 무시하며 자신을 드러내며 잘난척하는 자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형제들을 내쫓는 자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가이오에게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 사람은 데메드리오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를 착한 사람이라고 12절에서 소개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속히 방문할 것을 이야기하며 마무리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방인 교회에서 생활하는 특정한 이름 즉 가이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가이오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렵습니다. 가이오는 누구인가는 알기 어렵습니다. 가이오라는 이름이 신약 성경에 나오지만 흔한 로마식 이름이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여튼,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합니다. 장로라고 소개하고 있는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편지하노라”가 없습니다. 요한삼서가 편지의 형식이기 때문에 좋은 성경 번역본은 괄호를 사용했습니다. 하여튼 장로인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오늘날 교회가 좋아하는 말을 합니다. 2절을 보시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간구한다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단순한 바램이나 소원이 아닌 기도를 의미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선 가이오에서 “사랑하는 자여”라고 하면서 “범사에 잘 되기를 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삼박자 축복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한글 번역으로만 보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원문의 의미는 “순조로운 여행을 하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평안만을 위한 사도 요한의 인사가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관심사는 나그네와 같은 생활에서 몸과 영혼이 조화롭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소망하는 인사입니다. 초대 교회는 영지주의 자들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몸은 타락했기 때문에 고생해도 좋다는 것입니다. 몸은 타락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영혼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활 장으로 알려진 고전15장을 읽어 보십시오. 무슨 내용인지 차분하게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사도신경을 알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몸의 부활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부활은 무엇이었습니까? 몸이 있는 부활 아닙니까? 어떠한 모습으로 몸이 부활할지 연약한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극치에 이르는 주의 심판 날에는 몸의 부활이 어떤 모습인지 알게 됩니다. 그때를 소망하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하늘에 소망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어떠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거지 나사로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사로와 같이 거지처럼 생활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상과 하나님의 선한 선물을 받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분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공해야 만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공이란 세상 사람처럼 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부유하고 성공해야만 복음이 증거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나사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없다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성공을 유한 유사 복음을 전하는 자 그리고 마음의 평안을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사로를 비참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사로와 늘 동행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순조로운 여행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쉽게 말하면 주의 길을 잘 가라는 것입니다. 좁은 길이지만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그네와 같은 여행에서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길을 잘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가이오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가이오가 이 편지를 읽으며 웃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이오의 뜻은 “기뻐하다” 입니다. 사도 요한은 3절 끝에서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라고 합니다. 가이오의 뜻이 기뻐한다는 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말놀이하면서 나는 가이오를 생각할 때 늘 기뻐한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을 기뻐하는 표현을 하면서 가이오가 주의 길을 잘 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가이오가 주의 길을 잘 가고 있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더 기뻐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주 안에서 즉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며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삶으로 모범이 된 모습으로 생활해야 하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의 힘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는 삶을 따라가야 합니다.

 

성경을 오해하면 범사에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2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입니다. 사람은 잘 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점도 보는 것이고 나무에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처럼 생활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축복만을 받기 위해 부귀영화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범사에 감사하노라”라는 의미는 “순조로운 여행을 해라”입니다. 세상은 우는 사자처럼 그리고 이리처럼 교회를 공격합니다. 과거나 오늘날에도 여행자는 여행할 때 도적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는 마귀로부터 더 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알기에 가이오에게 범사에 순조로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뻐하는 삶을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해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 안에서 주의 길을 가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육신의 번영은 영적인 건강의 척도가 아닙니다. 오늘날은 유사 복음을 사용하는 번영신학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유사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는 성경의 말씀을 전함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전해야 합니다. 나사로처럼 번영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악한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물끄러미 보시며 동행하시며 순조로운 나그네와 같은 여행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하십니다. 사실 인생에서 빈곤이나 실패가 신앙생활 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떨 때는 그런 장애물로 인해 하나님을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생활합니다. 그것만이 정신적으로 생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좁은 길입니까? 넓은 길입니까?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교회는 좁은 길이라 할지라도 힘들지만 범사에 감사하며 순조로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주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힘든 길이라는 것을 아는 성령께서 교회와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며 보호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생활은 순조롭지 않으므로 나와 같이 기쁨의 길을 가자는 것입니다. 가이오를 사랑하는 사도 요한의 관심사는 주 안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잘 가기를 소망합니다. 가이오는 늘 진리 안에서 행하는 일꾼이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사도 요한은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요한은 가이오를 통해 큰 기쁨을 얻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특히 디오드레베 같은 자들에 의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가이오는 교회를 위한 마음으로 생활하는 일꾼이었습니다. 교회 안에 디오드레베와 같은 자들이 있으면 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더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11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처럼 교회는 악을 멀리하며 선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요한은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은 선한 것의 모델이 되는 데메드리오를 이야기합니다. 12절을 보시면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 말씀에 따라 살았으며 그 결과 그 진리의 척도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디오드레베와 다른 길을 생활하는 선한 성도였습니다. 성경의 진리를 아는 교회는 가이오처럼 그리고 데메드리오와 같은 순조로운 여행을 하는 성도입니다.

 

편지를 마무리하는 사도 요한은 특히 15절 끝에서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사도 요한이 요10:3절의 말씀으로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입니다. 선한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며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양육하는 것이지 사육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양과 같은 존재를 양육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양과 같은 교회를 양육하시지, 사육하지 않습니다. 사육은 짐승을 잡아먹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팔아서 이익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와 반대로 양육은 서로가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주 안에서 양육을 받는 존재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주 안에서 순조로운 여행을 하는 성도로서 성경을 통해 양육을 받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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