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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18-06-03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6-27문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중에 마지막인 “왕”의 직분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구약 시대의 왕이 누군인지 아십니까? 아마도 강설로 다윗, 솔로몬, 히스리야 등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불레셋, 암몬, 바벨론, 메데, 바사, 애굽 등으로부터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행할 때 나라가 공격을 당하기도 하고, 패망하기도 하면서 백성이 포로로 끌러가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킬 진정한 왕이신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들의 사상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소요리문답 제26문을 통해 진정한 왕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를 소망합니다.

 

먼저 질문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는 어떻게 왕의 직분을 행하십니까?”라고 합니다. ‘나’라면 어떻게 고백하고 싶습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님에게 복종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키심으로써, 그리고 당신님과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정복하심으로써 왕의 직분을 행하십니다.”라고 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오늘 행2:14-36절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의 오순절 강설”을 들었습니다. 그 말씀 중에서 36절은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마가의 다락방 주위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한 것이지만, 온누리의 사람들에게 전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의 강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까지 이르러 모든 민족에게 전하여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백성인 우리를 당신님께 복종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엡1:20-22절은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비참한 현실에 오셨을 때 당신님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반응과 기대는 달랐습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왕이시되, 세상의 왕에게 제한되지 않고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택함을 받은 백성의 모임인 교회입니다. 고난과 죽음을 넘어서 부활하심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주와 그리스도’로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힘이 정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가진 자의 뜻이 실현된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좋은 말씀과 올바른 말씀을 선포해도 그 말씀대로 실현되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고난과 죽음 당하시고 부활하지 아니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실현될 수 있도록 왕의 권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왕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십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 정치는 항상 불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올바른 정치를 소망하며, 부패하고 부도덕한 정부가 들어서면 온 국민이 저항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통치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지팡이교회는 모든 날이 주의 날로서 주님의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이 주일이라도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했을 때 하나님의 보존과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세상의 통치와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법을 초월하여 하나님 즉 왕의 통치를 받고 지키면서 생활하는 복음의 증인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에서 왕의 직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한 백성을 세상으로부터 당신님에게 불러내시고 저희에게 교직자들과 율법과 권징을 두시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을 유형적으로 다스리심으로 왕의 직분을 행하십니다. 택하신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순종하면 상 주시고 범죄하면 징계하십니다. 모든 시험과 고난 중에서 그들을 보존하시고 지켜주실 뿐 아니라 그들의 모든 적을 물리쳐 정복하심으로 모든 것은 당신님의 영광과 그들의 선을 위하여 권세로 치리하시고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나머지 사람에게 원수를 갚으십니다.” 우리를 다스리시고 지키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왕의 직분을 감당하십니다.

 

여기서 잠깐 조직폭력배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성실성”이라고 참으로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알 수 있는 “친구”라는 영화를 아실 것입니다. 그 당시 조폭 역을 맡은 유오성이 친구에게 한 말에서 “성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직을 튼튼히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해서 성실이라는 엄한 규율을 요구합니다. 결정적인 문제는 이 규율을 따르면 반사회적인 인물로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조직폭력배와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님의 사랑의 마음을 죽기까지 주십니다. 똑같은 성실이라도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영화롭게 될 수 있도록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이런 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면서 늘 함께 하십니다. 낮의 해가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고 밤의 달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지켜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키며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는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요18:36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고, 눅17:20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적이고 불가시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에 더 완전한 상태에 이르게 되지만,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두 발로 땅을 밟고 생활하지만 믿음으로 통치를 받는 백성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실제적입니다. 왕이 바르게 통치를 못하면 나라가 힘들어지고 다른 나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왕이시고, 잘 다스리십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의 비하로 즉 낮아지심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토록 고통 받으신 것을 생각하면 어떠한 마음이 드십니까? 그래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27문을 통해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무엇입니까?”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그분의 태어나심과 그것도 낮은 여건으로 태어나신 것과, 율법 아래 사신 것과 이생의 여러 비참과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의 저주된 죽음을 겪으신 것과 묻히신 것과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거하신 것입니다.”라고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님을 철저하게 낮추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성육신만으로 오셨다고 낮아지신 것은 아닙니다. 성육신으로 오심은 율법에 복종하는 것이고, 고난을 견디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감당하심으로 결국 죽음으로 극치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처럼 낮아지심은 그 대상이 하나님의 아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당신님이라는 점에서, 어떤 개념이나 표상으로도 그릴 수 없는 우리의 상상과 생각을 훨씬 초월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 비참함과 절망은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참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4항을 보시면 “주 예수께서는 이 직분을 아주 기꺼이 맡으셨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율법 아래 처하셨으며 그것을 완전히 이루셨고 그의 영혼으로 직접 지극히 슬픈 고통들과 그의 몸으로 지극히 아픈 고난들을 견디셨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 죽으셨고 묻히셨으며 죽음의 권세 아래 머무셨으나 썩지는 않으셨다. 그는 제 삼일에 고난 받으신 그 동일한 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또한 그 몸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그의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중보의 일을 하시고 세상 끝날에 사람들과 천사들을 심판하기 위해 돌아오실 것이다.” 이런 예수님은 눅2:7절에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관도 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겨우 갈 수 있었던 장소는 짐승이 있는 마구간이었습니다.

 

고후8:9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태어나시기 전에 아주 부유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심으로 낮아지셨지만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부요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53:3절을 보아도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하면서 싫다 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셨을 때 신이심을 중단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하의 상태에서 성부와 성령과의 “본질의 동일성”과 “권능과 영광의 동등성”을 중단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곡된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비하는 신적 속성을 비우셨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비하는 당신님의 신성이나 혹은 신적 속성이 축소된 것이 아니라, 참된 인성이 당신님에게 덧붙여진 것에서 구성된다는 것이 정통적인 입장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변화를 겪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절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을 생각하면 성육신의 신비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절되어야 합니다. 정통파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비하는 신성의 축소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 동안 신성을 감추신 것과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요리문답 제27문의 가르침처럼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그분의 태어나심과 그것도 낮은 여건으로 태어나신 것과, 율법 아래 사신 것과 이생의 여러 비참과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의 저주된 죽음을 겪으신 것과 묻히신 것과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거하신 것입니다.”라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지셔서 마침내는 죽음의 세력에 굴복을 하셨는데, 그러나 이것은 어떤 큰 세력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강하고 높으신 분이데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낮아지셨는지는 예수님의 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도무지 보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종하신 것이고 또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셔서 스스로 낮아지신 것입니다.

 

마12:31-3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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