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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17-02-12

제14항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2)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에서 흙을 취하여 사람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즉 선과 의와 거룩에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조성하셨음을 믿습니다. 사람의 뜻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런 높은 위치에 있을 때, 그런 위치를 바르게 인식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탁월함을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사람은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였고, 그 결과로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신이 받은 생명의 계명을 위반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해 자신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이탈하여, 자신의 본성 전체를 부패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사람은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사람은 악하고 비뚤어졌으며, 모든 면에서 부패되어, 그가 하나님께 받았던 그의 모든 탁월한 선물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변명할 수 없도록 약간의 흔적만 남겼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빛이 모두 어둠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1:15)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인류를 ‘어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반대되는 사람의 자유 의지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종’(요8:34)이고,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요3:27)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네게 올 수 없다”(요6:44)고 말씀하시는데도, 누가 감히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8:7)는 사실을 아는데, 누가 자기 의지를 자랑할 것인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아니하는”(고전2:14)데도 누가 자기 지식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는 말씀을 이해할 때, 누가 감히 무엇인가를 주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하신 말씀은 당연히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심 없이는 하나님의 뜻과 지식을 깨닫지도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얻고자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대리 통치자의 큰 선물을 주신 것을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 받았던 그의 모든 탁월한 선물을 잃었습니다.” 그로인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은 사람이 변명할 수 없도록 약간의 흔적만 남겼습니다” 이것을 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사탄처럼 악해지지 아니하도록 긍휼을 주시고 있습니다. 이미 사람은 악해질 수 있을 만큼 악해졌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겠는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인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등의 명령을 어기면 온누리에 사람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악을 억제하시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죄인된 사람이라도 마음의 양심의 활동을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이 악인을 선하게 만들지 아니하지만 하나님은 일반 은총을 주심으로 어느 정도는 깨달음이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롬2:14-15절은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라도 그 마음의 양심으로 생각으로 서로 혹은 고발하여 변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공평한 이유는 하나님의 법이 사람의 마음에 있음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변명하고자 하는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국가의 정부를 세우심으로 통치자를 허락하셨습니다. 롬13:1-5절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2.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5.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로마서 8장은 천지창조의 모든 세계의 구속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 곧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장이기도 합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마침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히2:15절에서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음이 아닌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것처럼 그리고 부활하신 모습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생활한 사람은 죽음의 양식에서 죽기를 무서워하는 공포를 주신 것입니다.

 

위와 같은 것을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증거하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특히 4세기에 들어서 펠라기우스가 원죄를 부인하면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남으로 문제가 발생을 했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억지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특히 16세기에서 에라스무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함으로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국에는 오렌지 교회회의에서 정죄를 당합니다. 그러면서 17세기에는 아르미니우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치면서 과연 그런가? 하면서 1618-1619년 사이에 네덜란드에서 칼뱅주의에 입각하여 도르트총회로 모여 회의를 합니다. 도르트총회는 약 6개월 동안 154회의 공식 회의를 통해서, 그리고 각 나라에서 파송된 105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확인하고 아르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배척 합니다.

 

저는 저번 주에 “에덴 동산에서 사람은 참으로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순종할 수도 있고, 거스를 수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근거는 창2:16-17절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순종하면 영원한 삶이었습니다. 사람은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을 때에, 그런 위치를 바르게 인식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탁월함을 가치 있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였고 결과적로 사망과 저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이 받은 생명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류의 최초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타락한 것입니다. 자발적이고 의도적으로 불순종의 길을 택했다고 하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를 방해할 수 없었을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자유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타락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유의지로 선택을 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자유의지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으로 논쟁을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자유의지라고 하지 않고 노예의지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1525년 12월, “의지의 노예에 대하여”에서 에라스무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사람이 선택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회복된 사람에게만 자유의지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은 비복음적인 것들에 저항할 수 있는 자유의지로 복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람의 타락은 전적으로 사람 자신의 의지적 자유의지 행위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았을 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타락을 한 후 사람은 자유의지가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서 벨기에 신앙고백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타락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신앙고백서에서는 분명하게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반대되는 사람의 자유 의지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거절합니다.” 그런 후에 무엇이라고하십니까? “왜냐하면, 사람은 ‘죄의 종’(요8:34)이고,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기”(요3:27) 때문이다라는 가르치십니다. 계속해서 그 다음을 보시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네게 올 수 없다”(요6:44)고 말씀하시는데도, 누가 감히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자랑하겠습니까?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8:7)는 사실을 아는데, 누가 자기 의지를 자랑할 것인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지 아니하는”(고전2:14)데도 누가 자기 지식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는 말씀을 이해할 때, 누가 감히 무엇인가를 주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라고 하신 말씀은 당연히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지켜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심 없이는 하나님의 뜻과 지식을 깨닫지도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를 잃은 사람에 대한 성경 구절로 반박을 하면서 잘못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있는 증거를 전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도르트신조에서도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잉태되어 진노의 자녀로서 태어난다. 그들은 자기를 구원할 어떤 선도 없고 악에 기울어져 죄 가운데 죽어 있는 죄의 종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중생하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께 돌아오거나 그들의 타락한 본성을 개혁하거나 타락한 본성을 스스로 개혁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할 수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타락은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거룩과 의롭다고 하심으로 어떤 것도, 성령님을 통하여 거듭나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창8:21절은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롬3:12절에서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참 좋은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노예의지)로 사탄에 속하여 양심을 속이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유대종교지도자들입니다. 겉으로는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높은 지위와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죄인은 자신의 힘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아르미니우스의 지지자들은 사람이 스스로 선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노예의지)로 선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기 보다는 인간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프로그램과, 상상의 은혜를 받은 것처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고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제14항에서는 ‘사람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참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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