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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17-04-16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

 

우리는 흔히 말하는 부활주일에 성찬식을 했습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로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도 생활하는 것처럼 시공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부활의 의미는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롬4:25절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인간의 범죄 때문에 죽으셨고, 나를 의롭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여 주심으로 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새 생명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강조함도 필요하지만 칭의도 중요한 것입니다. ‘칭의’가 먼저 있어야 부활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로운 새 생명으로 부활의 의미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롬6: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칭의’의 근거가 부활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벧전1:3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한 것으로 신학적으로 중생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영혼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고, 중생으로 말미암아 몸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롬8:11절에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우리의 몸도 살리시는 것으로 나중에 일어날 일입니다.

 

부활하신 다음에 주님은 대략 10여 차례 나타나셨습니다. 여자에게 먼저 나타나셨고, 증인으로 효력이 없음에도 먼저 나타나셨음이 의미가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궁극적으로 “안 믿는 자들에게는 안 나타나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부활을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후 나타나셨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이미 말을 했어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진짜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지만 믿지 못할 때 눅24: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영혼은 살과 뼈가 없지만 몸은 살과 뼈과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으로 당신님이 진짜로 부활하신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승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열 번 정도 나타나셨고 완전히 승천하신 후에는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첫 번째는 승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셨을 때(사도로 부르실 때) 바울은 영광스러운 광채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행9:3-4절을 보시면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이것으로 근거하여 바울에게 육체적인 가시는 승천하신 예수님의 본 후 눈이 멀어진 것으로 해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근거는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는 밧모 섬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계1:9-19절을 보시면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5.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16.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요한은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한 사람으로 주의 날에 감동된 사람으로 16절을 생각하면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진짜로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보았을 때 죽은 자 같이 되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이 다 기록된 후 이 세상에서 주님을 보았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딱 두 번 나타나신 것이고 우리는 재림 후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승귀를 완성하는 것이다. 1세기에 예수님을 못 본 사람이 거의 다 이지만 주를 위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사명을 감당하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그리고 승천 후 어디에 계시는 것입니까? 낙원에 계셨습니다. 아마도 F.F.Bruce는 몸을 가지고 낙원에 계셨을 것이라고 하여 우리는 이것을 방문설이라고 합니다. 지팡이교회도 나중에 낙원 즉 하늘 - 예수님의 몸이 계시는 곳으로 가야할 것을 믿고 믿음의 생활을 잘 합시다.

 

낙원을 생각하면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행1:9절을 보시면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그런데 성화나 그림을 보면 구름을 타고 올라가신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구름이 예수님을 가리워 보이지 않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처럼 낙원에 있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죽지 않고 구원을 받은 ‘에녹과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승천한 것이 아니라 불병거가 엘리야와 엘리사를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우편에 있던 강도에게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눅23:4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개혁교회 - 승천은 예수의 제사를 온전히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 구원자로 믿는 성도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미와 아직의 관계로 지금 여기서 하늘에 속한 생활을 즉 맛보기를 하는 것입니다. 엡2:5-6절을 보시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은혜로 살아난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하늘에 앉아 있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이면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임을 드러낸 것임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주님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이지 세상에 속한 것들을 찾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부활은 그 수단이 된다.

 

부활의 몸에 대해서 이승구 교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몸에 상처가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를 성형시켜 주실 것이고, 우리를 아름답게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상처가 그대로 있었다고 하면서 도마에게 나타나신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으로 첫째는 부활했을 때는 상처가 있었는데 승천했을 때는 없으실 것입니다. 둘째는 영원히 그 상처를 가지고 계실 가능성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2000년 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육체의 몸 상태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7문이 좋은 해결을 제시합니다. 질문을 보시면 “그렇다면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과 달리 그리스도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답은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시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인성을 따라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분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에 따라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낙원에 있지만 신성은 무소부재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합니다. 행1:11절에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단지 하늘에만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은 비록 낙원에 계시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당신님의 신성으로 교회와 함께 하시고 나를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다스리고 통치하심으로 더 좋은 것으로 채우려는 것입니다. 요16:7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히10:1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이심으로 좌우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편이라는 뜻은 다스림과 통치의 개념으로 오른쪽은 누군가를 우대할 때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계1:7절에서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여기서 구름은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고,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가시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 이외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24:36절에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시면서 43-44절에서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중생하는 때부터 종말이 시작되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 안에서 사는 것이고, 재림 때에 종말의 극치이며 영광의 면류관을 다시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대를 사는 성도는 극치에 이르는 재림의 날을 기억하면서 복음의 증인자의 선교를 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왜 죽어야 합니까? ·왜 신자는 죽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도 죽지만 우리의 죽음에서는 저주와 형벌의 요소가 사라졌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덩어리고 끔찍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여 주심으로 성도는 이미 새 생명과 빛 아래 있으면서 죽음의 형벌인 저주가 더 이상 없는 것입니다. 다만 자연스러운 인간의 죽음은 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세상의 죽음의 의미와 다릅니다. 첫 번째는 불신자 의 죽음은 저주와 형벌의 대가입니다. 두 번째로 신자의 죽음은 영혼을 온전케 하는 징계의 최후의 수단이고 징계의 극치라고 할 수 있고, 죽음은 유익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이고 영혼의 성화를 완성 시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은 성도를 온전하게 함으로 낙원에서 주님과 영원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까? 공포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을 향한 여행으로 생각하면서 죽는 것을 바라보아야 영원한 낙원에서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116:15절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죽음을 생각해 보시면서 성화의 완성임을 생각합시다. 세상 사람의 죽음의 의미와 다른 의미를 생각함으로 십자가의 영광이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의 특강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7문과 58문을 읽으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성도는 분명한 기쁨과 즐거움과 영생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 상대에 있다고 합니다. 57문은 “몸의 부활”은 당신에게 무슨 위로를 줍니까? “금생이 끝난 후 나의 영혼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로 올려 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이 육신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으킴을 받아 나의 영혼과 다시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58문은 “영생”이라는 조항은 당신에게 무슨 위로를 줍니까? “내가 지금 이 땅에서 영원한 기쁨을 내 마음 속에 경험했기 때문에 금생이 끝난 후에는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구원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자신의 생전에 그리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영생에 참여하지 못하는 불신자에게는 그 어떤 영생도 없는 영원한 형벌을 당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그 어떤 제2의 구원의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신앙의 생활을 잘 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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