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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강설날짜 2017-06-25

제24항 우리의 성화와 선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생기는 이 참된 믿음이 그 사람을 중생하게 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참된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종이 됨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데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롭게 하는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다만 자기 사랑이나 정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떤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헛된 믿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성경이 사랑으로써 역사하시는 믿음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행위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도록 사람을 권유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뿌리로부터 나온 이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우리의 칭의에 이바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가 어떤 선도 행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롭게 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선행은 나무 그 자체가 선하지 않는 한 그 나무의 열매가 선할 수 없는 것보다 더욱더 선한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공로로 삼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로로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에 유의합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을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 당신님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은 당신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행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 더렵혀지지 않고 마땅히 형벌을 받지 않는 단 하나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여줄 수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거절하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의심에 가득차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은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그 시대 카톨릭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선행 즉 행위 구원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시대였습니다. 마치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면서 자신은 율법을 다 지키었다고 하는 거와 같습니다. 부자 청년에 대한 강설은 “인생 최대의 문제, 영생”이라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http://reformch.org/board/5162에서 검색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구원하여 준 은혜의 선물에 감사함만이 있어야 하는데, 카톨릭은 공로적인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로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공로를 내세워서 구원을 얻을 자가 있다면 그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팡이교회는 22-23항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라는 믿음의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말씀은 ‘칭의’에 대한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법적 입장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칭의는 법적 입장의 변화이고, 인간 본성의 변화는 아닙니다. 오늘은 “우리의 성화와 선행”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성화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화는 인간 본성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회복되고 빛과 소금으로 생활하는 기쁨의 인생에서 늘 인간 본성의 변화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여 주셨습니다. 회복된 인간에 대해서 칼빈은 “우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 행동이나 계획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고 추구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가능한 한 잊고 생각하지 말자.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죽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뜻이 우리 모든 행동을 주재하고 다스리게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것이다. 따라서 삶의 모든 부분이 단 하나의 적법한 목적이 하나님만 지향하게끔 하자.”라고 하는 것은 값없이 구원함을 얻은 당신님의 백성은 인간 본성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하는 글입니다.

 

인간 본성의 변화가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성화라는 단어의 뜻에서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성화는 문자적으로 “거룩하게 만들다”라는 의미로 ‘거룩한’이라는 단어와 ‘만들다’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성경에서는 “회심, 중생, 재창조, 거듭남”과 같은 동의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24항 처음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 안에 생기는 이 참된 믿음이 그 사람을 중생하게 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믿습니다. 이 참된 믿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종이 됨에서 자유롭게 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변화가 있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요3:5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죄에서 정결하게 하고 영적 변화와 갱신을 가져오는 영적인 탄생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만 생각해 보아도 카톨릭이 가르치는 공로적인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귀도 드 브레는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공로로 삼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로로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님은 의롭게 된 우리를 죽음의 상태로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본성을 바꾸심으로 늘 성화의 과정에서 중생하고, 거듭나고, 회개하고는 삶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님이 인도하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변화가 있더라도 우리 스스로 거룩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공로적인 힘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하심으로 당신님의 은혜 가운데 완전히 보전하시고 견인의 은혜를 주셔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의 가르침과 비슷한 가르침을 주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말씀 중심적이기 보다는 인간의 공로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만족을 얻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착각을 들 수 있게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 칭의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화에 대한 부분에서는 ‘우리의 일이다’라고 함으로 구원은 하나님과 나와의 선행의 관계 속에서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제24항에서는 분명하게 잘못된 것임을 명확히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공로로 삼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로로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시대를 보면 어떻습니까? 예배당은 편의점보다 많다고 할 정도입니다. 예배당이 많으면 구원을 얻을 사람이 많아야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주여하는 자마다 구원얻을 자가 있겠느냐고 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 시대의 교회의 영적인 상황은 매우 어둡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사명을 상실한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은 하였지만 매우 영적으로 낮은 상태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생명력이 없는 죽어가는 식물과 같은 것입니다. 예배는 형식화되어 가고, 테크닉에 몰두하여 세상과 대화를 하고자 하는 것은 영적으로 매주 부주의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지팡이교회는 은혜의 방도인 보이지 아니하는 말씀을 통해서 참 믿음을 일으키시고, 보이는 방식으로 성례를 통하여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단지 지식적으로 알고 공로적인 행위로 구원을 얻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선배님들은 경건한 삶을 율법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말씀중심 즉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를 전환하도록 노력했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또한 십계명을 읽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라는 고백이 있는 것이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느리더라도 바르게 성장하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특별한 계시를 성경을 통하여 준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중심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중심은 늘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하게 하하도록 성령님꼐서 은혜를 주실 것을 믿으면서 강설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은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칭의와 성화로 증거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강설을 통해서 자신들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깨닫고 신음하며 애통하는 가운데 영적으로 각성될 수 있도록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기도하지 않도록 하는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본문을 읽기 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믿는다는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연약한 교회로 시스템과 조직을 잘 갖추지 못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성령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하는 간구입니다.

 

그럴 때 귀도 드 브레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은 당신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행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 더렵혀지지 않고 마땅히 형벌을 받지 않는 단 하나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여줄 수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거절하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의심에 가득차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은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해야만 합니다. 사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본성의 변화가 있다 하더라도 늘 우리의 마음에는 선행을 의지하고 그것을 자랑하려는 죄악된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청년도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늘 자신의 마음을 살피면서 교만한 마음이 있는지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입니다.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다시 붙잡고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행을 힘쓰지만 겸손히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무익한 종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4항에서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눅17:10)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을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은 당신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행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로 더렵혀지지 않고 마땅히 형벌을 받지 않는 단 하나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여줄 수 있다 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거절하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의심에 가득차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은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참된 가르침입니다.

 

아무런 공로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죄와 비참함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 때는 참 기쁨의 감사만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힘이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하심으로 우리 삶 전체로 하나님의 복에 감사드릴 수 있게 하신 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라면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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