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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요17:11-21
강설날짜 2017-07-16

제26항 그리스도의 중보2

 

우리는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며 대언자이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도 나아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신성과 인성을 함께 가지셨으므로,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엄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부께서 당신님 자신과 우리 사이에 세워 놓으신 이 중보자께서는 당신님의 위대하심으로 우리를 위협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우리의 선택에 따라 또 다른 중보자를 찾을 수야 있겠습니까? 하늘과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어떤 피조물도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이셨을지라도, 자기를 비워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형체와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모든 면에서 형제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찾는다면,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당신님의 원수였을 동안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님의 생명을 내어주신 그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분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권세와 능력을 가진 분을 찾는다면,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고, 하늘과 땅에서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 외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들을 영예롭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불명예스럽게 하는 모든 습관들을 소개하여 그들이 결코 행하지도 않았고 요구하지도 않은 것을 하는 것은 순전히 신뢰의 결핍입니다. 이와 반대로 성인들은 그들의 저서들에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의 직무에 따른 영예를 끊임없이 거부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가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당신님의 의가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가치에 근거하여 우리의 기도를 드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이유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런 어리석은 두려움, 더 정확히 말하면 불신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2:17-18)고 말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더욱 더 격려하시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4-15)고 말합니다. 동일한 서신에서 “19.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25)고 말합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히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당신님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한 분만 구하지 않고 다른 대언자 때문에 그분을 떠나거나 다른 대언자를 찾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 우리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배운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확신합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을 만들었던 시대는 카톨릭교회로부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신앙고백의 저자인 귀도 드 브레는 고난을 넘어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만 당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탄압과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보가 왜 중요한가를 제26항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기도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의 육신적인 어머니인 마리아를 중보자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예수님을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방법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참고로 마리아를 통해서 기도의 응답을 받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결국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마리아에 대해서 “마리아 무염시태”라는 교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죄없이 태어나시기 위한 과정을 설명하는 교리로 “성모 무염시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죄 없이 태어나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도 원죄가 없어야 한다는 이해를 돕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성모 무염시태에 대한 교리를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는 최종적으로 카톨릭의 교리로 확정을 합니다. 그 이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도 “우리는 영광이 가득한 동정녀이며 예수님을 낳으신 분인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의 그 유일한 은혜가 사전에 오심과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빠지지 않으셨고, 언제나 그 원초적인 허물과 실제적인 허물과 관련이 없으시고, 거룩하며 무흠하시다는 가르침은, 경건하다고 모든 공교회인들로부터 인정받고 교회의 관습과 공교회의 신앙과 바른 이성과 성경으로 일치해서 비준되어야 한다는 것과..... 이와 반대로 강설(설교)하거나 가르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음을 결정합니다.” 이 교리의 문제점은 예수님과 마리아를 같은 동일한 신격의 자리에 둘 뿐 아니라 같은 중보자로 보는 것은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중재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님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갈4:4-6절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유일한 길은 마리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그러므로 중보를 떠나서 하나님이 옛날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일이 없고 은혜를 받으리라는 소망을 주신 일도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보라는 말을 협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말은 틀린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님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일하신 예수님만이 중보자가 되어 주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되었던 것을 다시 회복시킨 것입니다.

 

유일하신 중보자에 대해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히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왜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당신님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 우리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제49문답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심은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당신님의 아버지 앞에 계신 우리의 대언자이시다“는 점에서 나에게 유익이 됩니다.

 

1552년 제네바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많은 목회자들의 서명을 받은 신조라고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죽음 앞에 예정론을 잘 설명할 책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중보를 배우는데 있어서 제38문을 보면, “제사장직은 어떤 것입니까?”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으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희생제사를 드리심으로써 은혜를 얻고 진노를 거두시게 하는 직무와 특권입니다”라고 정확하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유일하신 중보자에 대한 역할은 그리스도 직분에 부여된 고유한 직무와 특권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아들을 보내심으로 “희생제사”를 통하여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당신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감당하시도록 함으로 하신 것입니다. 성도라고 불리는 교회는 누구나 그리스도를 중보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카톨릭은 중보자를 예수님이라고 하지만 입술로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게 기도를 함으로 그들이 우리의 기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 전달하여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던 이유는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님을 두려운 중보자로 생각함으로 다른 방법을 찾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가 카톨릭에 있을 때의 생각을 잘 볼 수 있는 글이 있습니다. “내가 성인들의 숭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심히 어려웠다. 나는 거기에 젖었고 그 물에 빠졌기 때문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 잘못된 가르침은 위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루터도 마리아와 성인들을 통해서만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예수님의 중보자를 왜곡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중보자되심에 대해서 요17:11-12절에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17:20-21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강설(설교)를 통해서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순절 사건에서 즉 행2:41-47절에서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42.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의 효력인 것입니다. 이것을 보아도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은 당신님의 백성을 위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중보자를 감당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시험을 감당하시고 고난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든 것을 감당하여 주심으로 나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예수 그리스도가 마리아로부터 육신을 취했기 때문에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은혜의 어머니’로 가르쳤습니다. 그로인하여 예수님은 마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억지 주장입니다. 마리아를 “하늘의 여왕”, “하나님 은혜의 중재자”, 모든 신자의 어머니“라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여 주신 성경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왜 다른 대언자를 찾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당신님의 아들을 우리의 대언자로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한 분만 구하지 않고 다른 대언자 때문에 그분을 떠나거나 다른 대언자를 찾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주셨을 때, 그분께서 우리가 죄인임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는 참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는 힘이 됩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른 대언자 다른 중보자를 찾는 것은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지 아니하는 죄입니다. 유일하신 중보자를 종교개혁자와 신앙고백서는 분명하게 성경의 가르침대로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인들이 신자의 기도를 들어준다고 가르쳤습니다. 각종 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성인, 각종 직업에 도움을 줄수 있는 성인 요셉, 사냥꾼들은 성인 후버트를, 의사는 성인 누가를 정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국 카톨릭의 첫 신부요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를 1949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언하는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입니다.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사람들을 바른 예배의 길을 벗어나게 하기 위한 사단의 책략”이라고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제26항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벨기에 신앙고백서도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 아버지를 불러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배운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구하는 모든 것을 얻는다고 확신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더욱 믿음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교제가 될 수 있도록 예수님은 나와 늘 함께 하심으로 중보자이십니다. 삶이 예배인 것처럼 기도도 삶의 예배인 것입니다. 늘 기도 하도록 하는 것은, 나의 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단어를 사용하여 기도하지 못해도 나의 진심을 담아서 기도하는 것은 진실한 예수님의 중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카톨릭은 성인과 마리아를 중보자로 생각하는 것은 죄입니다. 카톨릭이 주장하는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10:26절에서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함으로 백부장인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사도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도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자신을 교황이라고 하지 않고 또한 성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가 주의 기도에서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한 모든 것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드르크 116문답에서 “기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감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우리의 중보자로 계시므로, 우리는 당신님에게 항상 기도로 감사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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