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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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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은 빠른 것, 편리한 것 그러면서도 더 재미 있는 것을 추구해 가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기다리는 것, 참는 것, 느린 것, 천천히 하는 것, 수고하는 것을 점점 더 싫어하고, 실제로 기다리고 참을 수 있는 '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도 부인키 어렵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나 역시 꽤나 성격이 급한 사람이다. 그래서 진득히 앉아 있는 것을 늘 힘들어했다. 성격은 조용한 편이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운동(태권도)을 하게 되었고, 가장 좋아 하는 취미도 '여행'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을 때도 몸을 이리저리 비튼다든지, 손으로 뭔가를 글적거린다든지, 그도 아니면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사실 내가 얼마나 성질 급한 사람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된 때는 내 나이 28세쯤 되어서다. 대구에서 1년 반 정도 선교회 간사 생활을 하고, 안동에 내려와 대학교 동아리 룸에 쳐 박혀 책을 읽는데,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 때 알게 되었다. 책을 오랫동안 붙들고 앉아 있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책에 집중하는 힘이 부족해서 툭 하면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나의 '산만함(충동성)' 때문에 힘들었다.

그래도 딱히 할 일이 별로 없어서 1년 반동안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거의 매일 여러권의 책을 계속해서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고 있는 상황, 즉 독서삼매경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턴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참 즐겁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특수교육을 하고 나보다 더 산만하고, 충동성 많은 아이들,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행동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연구하고, 치료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가끔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분들, 혹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만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대부분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특수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나는 충동적인 사람입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를 단순히 '성격'의 문제로만 보려한다. 그러나 이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뇌'와 관련된 문제요, 어떤 면에서는 '장애'적인 면과 많은 관련이 있다. 뇌가 안정되어 있고 건강한 사람은 어떤가!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하고, 행동하는 것도 좋아한다. 다시 말해,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공부하는 것만 좋아한다든지, 노는 것만 좋아한다면 이는 자폐적 성향이 강하든지,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행동 장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날 발달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자폐나, 과잉행동 장애를 단순히 뇌의 장애만으로 보지는 않는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는 신체적 문제가 아니라 실은 영적인 문제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의 신체적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게 되는 영적인 문제(하나님 앞에서의 죄문제)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장애의 문제(특히 태어나면서 장애가 된 이들)가 본인의 '죄문제' 때문인가!하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아니다'고 분명하게 답할 수는 없다. 어느 선까지 부모의 책임이고, 어느 선까지 본인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바가 있다. 성경은 인간의 장애의 문제가 근본 죄의 문제임을 지적하기는 하지만, 죄문제를 지적하는 이유가 책임을 추궁하고 정죄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깊이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문제가 나의 문제임과 동시에 모든 인류의 문제, 즉 몸이 건강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요, 또한 몸과 마음이 병들어버린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장애적 요소들을 가지고 자신을 정죄하지는 않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적 요소들이 '죄'와 동일선상에 있는 문제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러한 문제를 온전히 치유할 수는 없지만 개선해 가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지금도 나의 '산만함', '충동성'의 문제를 '연약함'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근본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순종의 마음,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을 해 가고 있다. 자신의 치유와 변화를 위한 신학적 접근 방법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치유되고 변화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내게 은혜 베푸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하기 위한 노력들을 힘을 다해 감당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만히 앉아서 독서하기, 기도하기, 때로는 게으름을 극복하고 몸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지금처럼 앉아서 사색을 하면서 글을 쓰는 일도 한편으로는 '죄를 다스리면서' 자신의 신체적문제를 치료해 가는 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점점 더 조급해지고, 참을성이 없어지고, 즉층적이 되고, 점점 더 감정적이 되어 가는 현상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한 현상이 짙어진다함은 사람들의 마음이 실은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마음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굳어짐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점 점 더 '정과 사랑'이 없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충동성이 점점 더 심해지게 되는 환경과 조건을 살펴보면 쉽게 알게 된다.

태어난 아이들의 충동성 문제는 대부분 후천적 문제이다. 뇌에 결함이 있어서 충동성이 나타날 때조차 후천적 노력을 통해서 치료가 가능하다. 이는 자신이 충동성 있는 정신 지체 아동, 정서장애 아동(자폐아)을 치료하면서 내리게 된 결론이다. 정신지체 아동의 인지능력을 정상아 수준까지 높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지 능력과 무관하게 차분하고, 심성이 착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키우는 것은 가능하다. 때론 일반 아이들보다 더 높은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충동성이나 주의력 결립의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부모와 자녀간의 '애착'과 관련된 문제이다. 부모와 자녀간에 깊은 사랑과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그것이 지속될 때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충동성 혹은 주의력 결핍의 문제를 가진 이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바로 '애증결핍'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충동성이 강한 아이들을 보게 되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랑이 매우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리어 그와는 반대로 폭력성을 띄는 경우가 많다.

이를 근거해서 볼 때, 만일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조급해지고, 충성적이되고, 감정적이 되어 간다면 이 역시 사랑의 식어짐, 정서의 메마름, 폭력성의 증가와 관련 있다는 진단이 충분히 가능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조급해지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좀 더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시대적 흐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병징이요, 근본적으로는 '죄의 문제'임을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생활을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충동성을 강화 시키는 요소들(대표적으로 TV, 비디오 등)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는 일에서부터 근본적으로 게으르고 충동적인 인간의 죄성의 문제를 생활 속에서 적절히 다루어 가고 있는지까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의 문제도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이 때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것은 자녀들의 충동성, 게으름, 산만함, 무기력함이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부모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부모의 성숙함만큼 자녀들이 자랄 수 있음을 생각할 때, 부모들은 자녀의 문제를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냉정함과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노력이 있어야 할까! 충동성, 산만함, 게으름, 무기력, 즉층적인 것과 반대의 것을 생각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것들은 꾸준히 하는 것, 열심히 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 땀을 흘리는 것, 때론 하기 싫은 것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마음과 관련이 많다.

이를 근거해서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드리는 '예배'가 사람들의 취향에 맞춘다하여 점점 더 즉흥적 요소, 감정적 요소,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추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어 그러한 요소들을 점점 제거해 가는데도 예배 드리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되도록 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경공부나 기도도 그러하다. 재미나 감정위주가 아니라 성경을 충분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구하는 기도가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아이들의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 공부 시키는 모습을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많다. 학습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녀와 부모간의 대화이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 즉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대화할 시간에 '공부하라'고 독촉한다. 대화의 연장이 독서(듣기)와 글쓰기(자기 표현하기)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을 하지 않으면서 높은 학습 효과를 기대한다.

이 모두가 부모들의 '충동성' '조급증' 때문이다. 아이들이 제대로된 교육을 받도록 돕고자 한다면 부모나 교사가 자신의 충동성, 조급증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의 충동성이 사라져서 가만히 앉아서 오래동안 독서 하는 것이 즐겁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즐겁고, 그러면서도 열심히 놀 줄 아는 아이들이 되도록 도와가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실은 그동안 그렇게 양육하지 못한 '죄'에 대한 '회개'에 관한 문제다. 그러므로 반드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목회자로서 나 역시 이러한 '회개'를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자 한다. 앞으로 자라나게 될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에서 가장 힘이 드는 것은 '지식교육'이 아니라 '순종교육'이 될 것이다. 과거의 세대들, 교육은 많이 못받아도 부모나 혹은 리더의 말에 순종하는 힘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대들, 머리는 꽉 찼지만 순종하는 힘이 부족하다.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이 말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들의 정신적 '병'을 치료하는 일에 도전해서 건강함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성숙하고 건강한 목회자의 자질이 요청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역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배우는 일(1:1 성경공부 혹은 그룹공부),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훈련하는 일(특히 새벽기도), 신령한 예배자로서 훈련하는 일이 있다고 판단한다. 가정에서는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일, 아이들을 많이 안아주고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는 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훈련을 통해서 가장 적절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학교와 같은 공동체 속에서는 서로간의 질서를 지키는 일, 서로를 배려하도록 돕는 아이들이 되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주로는 해야 할 것들이라면 충동성을 부추기고,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요소들을 제거해 가는 일 역시 비중있게 다루어가야 할 것이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은 빠른 것, 편리한 것 그러면서도 더 재미 있는 것을 추구해 가는 듯 하다. 그래서인지 기다리는 것, 참는 것, 느린 것, 천천히 하는 것, 수고하는 것을 점점 더 싫어하고, 실제로 기다리고 참을 수 있는 '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도 부인키 어렵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나 역시 꽤나 성격이 급한 사람이다. 그래서 진득히 앉아 있는 것을 늘 힘들어했다. 성격은 조용한 편이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을 좋아해서 오랫동안 운동(태권도)을 하게 되었고, 가장 좋아 하는 취미도 '여행'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같을 때도 몸을 이리저리 비튼다든지, 손으로 뭔가를 글적거린다든지, 그도 아니면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사실 내가 얼마나 성질 급한 사람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된 때는 내 나이 28세쯤 되어서다. 대구에서 1년 반 정도 선교회 간사 생활을 하고, 안동에 내려와 대학교 동아리 룸에 쳐 박혀 책을 읽는데,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 때 알게 되었다. 책을 오랫동안 붙들고 앉아 있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책에 집중하는 힘이 부족해서 툭 하면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버리는 나의 '산만함(충동성)' 때문에 힘들었다.

그래도 딱히 할 일이 별로 없어서 1년 반동안 그냥 '죽었다!' 생각하고 거의 매일 여러권의 책을 계속해서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고 있는 상황, 즉 독서삼매경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턴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 참 즐겁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이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특수교육을 하고 나보다 더 산만하고, 충동성 많은 아이들,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행동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연구하고, 치료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가끔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행동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분들, 혹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만난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대부분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특수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나는 충동적인 사람입니다'하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를 단순히 '성격'의 문제로만 보려한다. 그러나 이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뇌'와 관련된 문제요, 어떤 면에서는 '장애'적인 면과 많은 관련이 있다. 뇌가 안정되어 있고 건강한 사람은 어떤가!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하고, 행동하는 것도 좋아한다. 다시 말해, 공부하는 것도 좋아하고, 노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공부하는 것만 좋아한다든지, 노는 것만 좋아한다면 이는 자폐적 성향이 강하든지,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행동 장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날 발달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자폐나, 과잉행동 장애를 단순히 뇌의 장애만으로 보지는 않는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는 신체적 문제가 아니라 실은 영적인 문제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의 신체적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게 되는 영적인 문제(하나님 앞에서의 죄문제)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장애의 문제(특히 태어나면서 장애가 된 이들)가 본인의 '죄문제' 때문인가!하고 반문한다. 이에 대해서 그것은 '아니다'고 분명하게 답할 수는 없다. 어느 선까지 부모의 책임이고, 어느 선까지 본인의 책임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바가 있다. 성경은 인간의 장애의 문제가 근본 죄의 문제임을 지적하기는 하지만, 죄문제를 지적하는 이유가 책임을 추궁하고 정죄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깊이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죄문제가 나의 문제임과 동시에 모든 인류의 문제, 즉 몸이 건강하다고 하는 사람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요, 또한 몸과 마음이 병들어버린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장애적 요소들을 가지고 자신을 정죄하지는 않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적 요소들이 '죄'와 동일선상에 있는 문제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고, 그러한 문제를 온전히 치유할 수는 없지만 개선해 가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지금도 나의 '산만함', '충동성'의 문제를 '연약함'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근본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불순종의 마음,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겨,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을 해 가고 있다. 자신의 치유와 변화를 위한 신학적 접근 방법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치유되고 변화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내게 은혜 베푸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하기 위한 노력들을 힘을 다해 감당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만히 앉아서 독서하기, 기도하기, 때로는 게으름을 극복하고 몸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며 운동하는 일까지 포함된다. 지금처럼 앉아서 사색을 하면서 글을 쓰는 일도 한편으로는 '죄를 다스리면서' 자신의 신체적문제를 치료해 가는 한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가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오늘날 점점 더 조급해지고, 참을성이 없어지고, 즉층적이 되고, 점점 더 감정적이 되어 가는 현상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러한 현상이 짙어진다함은 사람들의 마음이 실은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한다. 마음이 점점 더 거칠어지고, 굳어짐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점 점 더 '정과 사랑'이 없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충동성이 점점 더 심해지게 되는 환경과 조건을 살펴보면 쉽게 알게 된다.

태어난 아이들의 충동성 문제는 대부분 후천적 문제이다. 뇌에 결함이 있어서 충동성이 나타날 때조차 후천적 노력을 통해서 치료가 가능하다. 이는 자신이 충동성 있는 정신 지체 아동, 정서장애 아동(자폐아)을 치료하면서 내리게 된 결론이다. 정신지체 아동의 인지능력을 정상아 수준까지 높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지 능력과 무관하게 차분하고, 심성이 착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키우는 것은 가능하다. 때론 일반 아이들보다 더 높은 정서적 안정감을 갖게 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충동성이나 주의력 결립의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부모와 자녀간의 '애착'과 관련된 문제이다. 부모와 자녀간에 깊은 사랑과 신뢰 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때, 그것이 지속될 때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무엇을 말하는가! 충동성 혹은 주의력 결핍의 문제를 가진 이들의 공통적인 문제가 바로 '애증결핍'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충동성이 강한 아이들을 보게 되면 타인에 대한 배려나 사랑이 매우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리어 그와는 반대로 폭력성을 띄는 경우가 많다.

이를 근거해서 볼 때, 만일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조급해지고, 충성적이되고, 감정적이 되어 간다면 이 역시 사랑의 식어짐, 정서의 메마름, 폭력성의 증가와 관련 있다는 진단이 충분히 가능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조급해지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 좀 더 근원적인 문제의식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단순히 시대적 흐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병징이요, 근본적으로는 '죄의 문제'임을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의식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생활을 면밀히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혹 충동성을 강화 시키는 요소들(대표적으로 TV, 비디오 등)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지는 않은지 살펴 보는 일에서부터 근본적으로 게으르고 충동적인 인간의 죄성의 문제를 생활 속에서 적절히 다루어 가고 있는지까지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의 문제도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당연하다. 이 때 우리가 늘 생각해야 할 것은 자녀들의 충동성, 게으름, 산만함, 무기력함이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부모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부모의 성숙함만큼 자녀들이 자랄 수 있음을 생각할 때, 부모들은 자녀의 문제를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냉정함과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떠한 노력이 있어야 할까! 충동성, 산만함, 게으름, 무기력, 즉층적인 것과 반대의 것을 생각하면 쉽게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를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하는 것들은 꾸준히 하는 것, 열심히 하는 것, 최선을 다하는 것, 땀을 흘리는 것, 때론 하기 싫은 것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마음과 관련이 많다.

이를 근거해서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들이 매주 드리는 '예배'가 사람들의 취향에 맞춘다하여 점점 더 즉흥적 요소, 감정적 요소,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추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어 그러한 요소들을 점점 제거해 가는데도 예배 드리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운 것이 되도록 하는데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성경공부나 기도도 그러하다. 재미나 감정위주가 아니라 성경을 충분히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구하는 기도가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아이들의 학교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의 공부하는 모습, 공부 시키는 모습을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경우가 많다. 학습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자녀와 부모간의 대화이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배우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 즉 공부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대화할 시간에 '공부하라'고 독촉한다. 대화의 연장이 독서(듣기)와 글쓰기(자기 표현하기)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을 하지 않으면서 높은 학습 효과를 기대한다.

이 모두가 부모들의 '충동성' '조급증' 때문이다. 아이들이 제대로된 교육을 받도록 돕고자 한다면 부모나 교사가 자신의 충동성, 조급증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의 충동성이 사라져서 가만히 앉아서 오래동안 독서 하는 것이 즐겁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즐겁고, 그러면서도 열심히 놀 줄 아는 아이들이 되도록 도와가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개인의 '취향이나 선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실은 그동안 그렇게 양육하지 못한 '죄'에 대한 '회개'에 관한 문제다. 그러므로 반드시 순종하고 실천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목회자로서 나 역시 이러한 '회개'를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자 한다. 앞으로 자라나게 될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역에서 가장 힘이 드는 것은 '지식교육'이 아니라 '순종교육'이 될 것이다. 과거의 세대들, 교육은 많이 못받아도 부모나 혹은 리더의 말에 순종하는 힘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대들, 머리는 꽉 찼지만 순종하는 힘이 부족하다.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다. 이 말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세대들의 정신적 '병'을 치료하는 일에 도전해서 건강함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성숙하고 건강한 목회자의 자질이 요청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역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배우는 일(1:1 성경공부 혹은 그룹공부), 그리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하도록 훈련하는 일(특히 새벽기도), 신령한 예배자로서 훈련하는 일이 있다고 판단한다. 가정에서는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일, 아이들을 많이 안아주고 충분히 사랑을 표현하는 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훈련을 통해서 가장 적절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학교와 같은 공동체 속에서는 서로간의 질서를 지키는 일, 서로를 배려하도록 돕는 아이들이 되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 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주로는 해야 할 것들이라면 충동성을 부추기고,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것을 계속해서 자극하는 요소들을 제거해 가는 일 역시 비중있게 다루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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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개혁해야 할 예배 전은덕 2016.08.19 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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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휴가를 보내면서도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의 글........... 전은덕 2016.08.19 456
55 목회서신으로 본 목회자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전은덕 2016.08.22 436
54 개혁신학 포럼을 마무리 하면서................. 전은덕 2016.08.22 330
53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 - 언약교회 박주동 목사 전은덕 2016.08.22 853
52 故 최일환 목사의 별세를 애도하며 전은덕 2016.08.23 576
51 고 이동섬 목사님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생각하는 글.......................... 전은덕 2016.08.27 2330
50 [회개에 대한 교리설교, 이렇게 한다] 전은덕 2016.08.28 1299
49 진실성! 전은덕 2016.08.29 374
48 많이 부족하기에 많이 울고 있는.................. 전은덕 2016.09.01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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