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와 주요한 특징들

by 전은덕 posted Oct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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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파이스 교수와의 대담 (I)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대담자(김헌수)는 2001년과 2002년 연구 휴가 동안에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에서 교회사와 교의학을 가르친 캄파이스(J. Kamphuis) 교수를 찾아가서 몇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연세가 80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정정하신 그분은 한국 교회에 대해서도 비교적 잘 알고 계셨고1) 성경과 신학 전반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말씀을 하셨다. 2003년 연구 휴가 중에는 『성약출판소식』의 기획으로 그분과의 대담을 추진하여 (1)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 (2) 개혁 신앙의 주요 특징, (3) 직분론, (4) 핍박 등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2)

 

1. 화란개혁교회의 역사

 

캄파이스: 또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헌수: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역사를 간략히 이야기해 주십시오.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언약’과 ‘예정’이 거의 동일시되고 있는데, 특히 언약 사상과 관련하여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를 말씀해 주십시오.

 

캄파이스: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로마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 대해서 종교적인 자유와 정치적인 자유를 위해서 투쟁을 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정치적인 독립인 동시에 종교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독립과 동시에 네덜란드 개혁교회(NHK: Nederlandse Hervormde Kerken)는 민족교회(volkskerk)가 되었습니다.3)

 

분리(1834년)와 애통(1886년)

 

그런데 19세기에 민족교회가 자유주의화했고 그래서 두 차례의 분리가 발생했습니다. 1834년에 헨드릭 드 콕(Hendrik de Cock) 목사를 중심으로 분열된 것을 ‘분리’(Afscheiding, 압스헤이딩)라 부르고 1886년에 카이퍼(Abraham Kuyper) 목사를 중심으로 나온 것을 ‘애통’(Doleantie, 돌레안시)라고 부릅니다.

 

 

 

 

 

 

민족교회에 속한 형제들은 해방파(GKV: Gereformeerde Kerken-vrijgemaakt)와 기독교개혁파(CGK: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와 총회파(GKS: Gereformeerde Kerken-synodaal)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분리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19세기, 그러니까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애통’ 때에 민족교회로부터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당시 민족교회 소속의 유명한 신학자 후더마커르(Hoedemaker)는 “애통은 분리와 한통속이다. 애통이 민족교회 안에서 개혁하려고 했지만, 애통은 본질적으로는 제2의 분리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 옳습니다. 왜냐하면,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애통은 ‘분리와 한통속’이 아니라 ‘분리와 같은 노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GKV) 자신을 정의한다면 우리는 분리의 사람들입니다.

 

분리 ‘혹은’ 복귀?

 

그렇지만 후더마커르의 진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분리의 특징을 정의한다면, 분리는 본질적으로 ‘복귀’(Wederkeer)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제가 쓴 『분리 - 복귀?』(Afscheiding - wederkeer?)라는 책에서 심도 있게 다루었습니다. 그 책에서 드 콕이 발간했던 소위 『분리의 선언』(Akte van Afscheiding)을 분석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분리의 선언』이라고 불리지만, 이 책의 제목은 원래 『분리 혹은 복귀의 선언』(Akte van Afscheiding of Wederkeering)입니다. 여기서 ‘혹은’이라는 말은 단순히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분리’와 ‘복귀’를 서로 동등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분리는 복귀를 위한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드 콕은 “우리는 복귀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선언이 통상 ‘분리 선언’으로 불리지만, 본질적으로는 ‘복귀 선언’입니다. 드 콕과 분리자들의 생애는 전체 성경과 개혁 신앙으로 온전히 복귀하는 것으로 특징지워집니다. 그래서 ‘복귀’는 ‘분리’로 불리는 사건의 핵심적 특징이었습니다.

 

 

 

 

복귀: 분리(1834년)와 애통(1886년)와 해방(1944년)의 핵심

 

그렇다면 왜 이들이 ‘분리자들’이라고 불리고 왜 ‘분리’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성경 전체로의 복귀가 당시 민족교회에서 차단되었기 때문입니다. 복귀는 ‘교회적인 차원’에서 주님과 그분의 말씀, 그리고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복귀가 민족교회의 권위에 의해 차단되었습니다. 드 콕은 목사직에서 정직 및 면직을 당하는 처벌을 받았으며 동조자들 역시 모두 면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1834년의 형제자매들은 복귀를 계속하기 위하여 분리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과 그 말씀에 대한 복귀를 민족교회에서는 면직 등으로 처벌했고 그래서 ‘교회 차원의 복귀’가 분리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분리의 핵심적 특징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 그리고 신앙고백으로의 복귀입니다. 이 점에서 1834년은 참으로 두드러진 해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그분을 섬기는 일, 그분의 말씀, 그리고 신앙고백으로의 복귀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귀의 정신은 애통(1886년)에서도 본질적으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민족교회는 계속해서 개혁 신앙의 노선에서 벗어나 자유주의적인 길을 걷고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합니다. 1886년에 주님과 그분의 말씀과 신앙고백에 복귀하자는 호소가 있었지만 민족교회가 그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또 한 차례의 분리가 발생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분리가 복귀에 종속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신앙고백으로 복귀하자는 호소에 대해서 민족교회가 거부하고 오히려 당사자들을 처벌하면서 소위 분열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분리는 참된 복귀에 종속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19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간단한 역사인데 1944년에 또 한 차례의 분리를 겪으면서 세워진 우리 교회(해방)도 역시 이 노선에 서 있습니다. 분리와 애통과 해방(Vrijmaking)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노선에 머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리고 그의 말씀에 신실한 신앙고백으로 복귀할 필요성 때문에 우리 교회가 성립되었습니다.

 

총체적인 복귀

 

1944년의 해방과 관련하여 이야기하면서 ‘언약’을 언급했는데 어떤 하나의 주제, 예를 들어 언약과 같은 주제가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를 식별하고 규정지을 수 있는 바로 ‘그 주제’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개혁교회가 언약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나 개혁교회를 특징짓는 ‘유일한 주제’는 결코 아닙니다. 1834년의 분리와 1886년의 애통과 1944년의 해방은 주님께로, 그의 말씀과 신앙고백으로의 복귀였지 한 주제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19세기 초 민족교회가 ‘선택’이라는 주제를 부인했을 때 분리는 ‘선택’에 대한 고백을 강조했고, 1944년에 당시 개혁교회의 목사들이 ‘택자(擇者)와의 언약’만을 주장했을 때 언약의 바른 의미에 대해 깊이 토론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834년의 분리는 ‘선택’이라는 주제 때문에, 1944년의 해방은 ‘언약’이라는 주제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넓은 의미에서 주님과 성경 전체와 신앙고백으로 복귀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고백에서 한 주제만을 선택하여 개혁하지는 않았습니다. 복귀하되 ‘총체적인 복귀’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신앙고백서에서 자기에게 맞는 한 가지 주제만을 골라낼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선택 교회’ 혹은 ‘언약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귀는 믿음 안에서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은혜로 주님께 복귀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주제만을 선별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님께로의 복귀는 멋있는 주제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을 향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로 주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1944년을 보면, 당시 개혁교회 목사들이 ‘언약’을 이야기하되 사실상은 ‘택자와의 언약’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 ‘해방’은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들 역시 언약에 속한다는 사실과 유아세례를 바르게 강조했고 이어서 언약에서 유아의 위치, 언약의 본질, 언약과 선택과의 동일성 등을 해명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 생활을 통해 질문으로 제기되고 또 신학적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한 가지 주제는 언제나 주님과 그의 말씀,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의 복귀라는 큰 차원에서 다루어졌던 것입니다. 한 가지 주제만을 골라내서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1944년의 해방에서는 아브라함 카이퍼라는 인물이 떠오릅니다. 그는 1886년의 애통의 지도자요 위대한 신학자였으나 그에게 큰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선택과 영원한 작정을 강조하면서 언약을 해설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언약은 오직 택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설교하도록 목사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때 우리는 “아니오”라고 말했고, 이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언약의 본질, 언약과 선택의 동등성 여부가 주의를 끌었습니다. 그리하여 택자와의 언약이 아니라 믿는 자와 그의 자녀들과 언약을 맺은 사실이 정당하게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서 중요한 주제입니다만, 나는 교의학이 언제나 무선별적(無選別的)으로 믿음의 교리를 다룰 때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의학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계시한 믿음의 교리와 주님을 다룹니다. 언약이나 선택과 같은 성경의 한 주제만을 밝혀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계시가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 모든 계시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선호하는 주제를 가져서는 안되며, 교회 설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설교해야 합니다(행 20:27). 하나님의 모든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으로 모든 성경 곧 구약과 신약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롬 4:25). 하나님의 모든 뜻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고 믿음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 교회 안에서 그리고 밖으로 전파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선택만을 골라내서 강조할 수는 없습니다.

 

선택과 언약

 

드 콕은 1834년의 복귀에서 실제로 선택을 강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자유주의자들이 하나님의 값없는 선택의 주권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드 콕이 언약의 가치를 크게 인정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선택이라는 교리를 선별하여 뽑아내기 위해 언약을 그 배경으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분리 당시 혹은 그 직후에 드 콕의 아들이 돌 혹은 그 전에 죽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가 유기(遺棄)된 채 죽었을 것이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드 콕은 그 당시 발간되던 정기 간행물의 부고(訃告)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하나님께서 유아기에 이생에서 데려 가시는 자녀의 선택과 구원에 관해서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 말은 도르트 신조 1장 17절에 나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의 자녀가 거룩하되 본성에 의해 거룩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참여하는 은혜 언약에 의해 거룩하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드 콕 자신도 자기의 믿음의 교리에서 이 점에 큰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의 열매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프랑스 신앙고백, 그리고 네덜란드 신앙고백 등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값없는 선택을 바르게 강조했습니다. 오직 은혜(sola gratia)입니다.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동시에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오직 믿음은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믿고, 그 약속으로부터 그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우리 선택의 거울’이라고 말했습니다.4)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의 약속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붙잡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효력을 나타냅니다. 이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됩니다.

 

그러나 17세기의 이른바 제2의 종교개혁(de Nadere Reformatie)5) 에서는 항의파(Remonstrants)6) 사상에 대항하여 아주 강하게 ‘영원’의 관점에서 선택을 생각했습니다. 영원한 작정이라는 관점에서 안전을 추구한 것입니다. 코므리(A. Comrie, 1706-1774), 스코틀랜드의 제2의 종교개혁, 나아가 네덜란드의 일부 개혁교회들(Gereformeerde Gemeente, Oude Gereformeerde Gemeente 등)이 여기에 속하는데, 여기에서는 선택과 언약이 사실상 일치합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선택을 설명한 이들은 언약이란 영원한 선택이 역사 안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선택과 언약은 사실상 동일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언약과 선택의 이러한 일치는 칼빈에게 없는 것이며, 16세기 개혁 신앙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일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대한 ‘무선별의 입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중심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아드님이라는 총체적 맥락에서 고백되었습니다. 17세기 초에 이것이 부인되었을 때 도르트 신조가 작성되었습니다. 도르트 신조에서는 넓은 범위에서 영원한 선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1장에 선택과 유기가 나오는데 먼저 아담 안에서 타락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한 사람을 찾으신다는 복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선택 주제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이것이 인간 중심적인 일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인가?’ 여기서 개혁 신앙의 선택 교리가 나옵니다. 이 선택 교리는 사변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추적하기 위한 문(門)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 나온 것입니다.

 

내 견해로는 제2의 종교개혁에는 복된 점이 있습니다. 계몽주의에 대해 투쟁한 것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손해도 끼쳤습니다. 한 주제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 전체를 억지로 장악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믿음 생활에 손해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선택을 일치시키는 것은 믿음의 확실성을 메마르게 하고 질식시킵니다. ‘내가 택자의 수에 포함되는가?’라는 한 가지 커다란 질문만 남고, 여기에 대해서 곧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대답해야만 됩니다. 이 질문이 네덜란드의 개혁교회(GG)의 믿음 생활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 감리교 등의 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한국 장로교회의 믿음 생활에서는 실제로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언약과 예정을 일치시키면 믿음의 확실성 대신에 의심과 불확실성이 찾아옵니다. 그들에게는 ‘내가 택자의 수에 들어가는가?’라는 한 가지 질문만 남는 것입니다.

 

물론 선택과 언약의 교리를 동전의 양면처럼 동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언약과 선택을 대등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개인에게 적용하기보다는 폭넓게 민족의 선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가령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은 언약적 선택입니다. 큰 배교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입니다. 언약을 깨뜨렸지만 남은 자에게서 하나님의 선택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언약과 선택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나 언약과 선택을 분리할 때는 또 다른 위험에 빠집니다. 언약이 인간의 손에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언약론적인 사고 방식”이 등장하는데, 그 예가 레이든 대학의 헨드리쿠스 베르코프(Hendrikus Berkhof)입니다. 그는 자기의 책 『기독교 신앙』에서 언약이라는 말을 많이 언급하지만 언약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분리했습니다. 비록 언약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언약이 우리 손에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반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언약 안에서 주님께 대해 “예”라고 대답할 때 이는 우리편에서 언약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지만 그 동의는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와 그의 성신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언약과 선택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게 설교해야 합니다. 언약이 신자를 불확신으로 몰아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언약 안에 있는 큰 확실성, 곧 언약의 하나님은 선택의 하나님이라는 확실성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한국에서의 교회 일치와 분리

 

김헌수: 분리(Afscheiding)는 본질적으로 복귀(Wederkeer)라고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과 연관하여 한국에서의 교회 연합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 가운데 남한 교회와 북한 교회 사이의 연합을 주장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실 북한 교회와의 연합을 말할 때 대상이 되는 것은 공산당 정부와 관련된 ‘공식적인 교회’입니다. 말씀과 신앙고백에 대한 확인이 없이 통일을 추구하면서 거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분리주의자라고 비난합니다.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현실이 있습니다.

 

캄파이스: 한국에서는 교회의 통일에 대해서 그러한 원칙을 주장하고 관망적인 자세를 취하면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겠습니다. 헨드릭 드 콕은 분리를 자유주의적인 교회로부터 복귀하는 것으로 이해했지만 19세기의 분리 당시에는 분리주의자라는 말이 욕설이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자기 주장만 고집하는, 거만하고 초연히 떨어져 있는 분리주의자로 간주합니다. 이러한 반박을 드 콕도 받았습니다. 그는 분리를 복귀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했지만, 그 당대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들을 분리주의로 비난하고 교만하게 관망하는 자로 매도했던 것입니다.

 

김진흥: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교회 절기에 대운동장 같은 곳에서 연합 예배를 드리기를 좋아합니다. 거기에 반대하면 역시 분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듣기 십상입니다.

 

캄파이스: 당연히 그런 경우에도 분리주의자라는 비난이 제기됩니다. 제가 교통사고로 레이유바르든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병원의 간호사들은 매우 친절했습니다. 한번은 그들이 “교수님은 교회 연합 운동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는 당신들을 위합니다. 교회 연합 운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고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지 않기 때문에 반대합니다. 따라서 교회 연합 운동을 반대하는 나는 사실은 당신들 편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김진흥: 한국에서는 찬송가를 교회 연합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찬송가를 보면 개혁 교회의 신앙고백에 적합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캄파이스: 찬송의 문제는 별도의 토론이 필요한 큰 주제라서 오늘 다 다룰 수 없겠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는 ꡔ시편ꡕ을 예배 중에 부르는데 최근에는 시편 이외의 찬송을 도입하려고 오랫동안 토론하고 있습니다. 이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네덜란드에서도 ꡔ찬송ꡕ(Gezang)은 상당한 정도로 경건주의적, 감리교적 요소들이 많이 들어 있어서 개혁 신앙을 연약하게 만들 위험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천사들의 합창, “하나님께 영광”(Ere zij God)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이 찬송을 못 부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 이 찬송을 도입한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사람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찬송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폐쇄적인 태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오는 성경 구절을 찬송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가령 빌립보서 2:6-8의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에 곡을 붙여 찬송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신약 본문을 가지고 찬송을 만드는 것은 신약 교회의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각 주

 

1) 캄파이스 교수는 두 번 한국을 방문하였는데 1975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강연한 내용은 같은 해에 화란어로 출판되었고 『종말론과 정경』 (영문, 1992)으로 번역되었다. 이하의 각주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대담자가 붙인 것이다.

2) 대담은 5월 21일 오후 3-5시에 한국의 족자와 밥상이 놓여 있는 그분의 서재에서 이루어졌다. 고려파의 유학생인 성희찬 목사와 김진흥 강도사가 동석하였고, 화란어 대담은 성희찬 목사가 서취(書取)했으며, 김진흥 강도사의 퇴고와 고려신학대학원의 유해무 교수의 감수를 거쳐 원고를 완성했다. 이 자리를 빌어 대담자는 특히 서취자와 감수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3) 민족교회(volkskerk)는 ‘국가교회’와 구분이 된다. 국가교회에서는 태어나면서 모든 국민이 교회의 회원이 되지만 참다운 성도의 교제를 구현하려고 노력한 네덜란드 개혁교회에서는 국가교회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민족교회로서 예배와 신앙의 공적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4) 원문을 인용하면, “그리스도는 우리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선택을 비취어 볼 수 있고 비취어 보아야 하는 거울이다. 성부께서는 영원 전부터 그의 소유로 정하신 자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셨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로 인정하는 모든 자들을 그의 아들들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충분히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가 된다.” 『기독교강요』, 3권 24장 5절.

5) 제2의 종교개혁으로 번역한 de Nadere Reformatie라는 말은 ‘지속적인 종교개혁’이라는 뜻이다. 영국 청교도와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이 교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까지 계속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전개된 운동이다.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개인주의적인 신앙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며 개혁 신앙으로 네덜란드 전체에 개혁을 가져오려고 노력도 하였다. 푸치우스(G. Voetius, 1589-1676)가 대표자로 꼽힌다.

6) 항의파는 아르미니우스(Arminius)와 그의 추종자들이 개혁 신앙을 이탈하는 주장을 전개하면서 왕에게 항의서를 보낸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이들은 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 부분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은혜에서 떨어질 가능성 등을 주장하였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1617-18년에 27개의 외국 교회들의 대표와 함께 도르트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항의파의 다섯 가지 주장을 반박하는 신조를 작성하였다. 즉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전적 타락,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 등 5개 조항인데 첫 글자를 따서 튤립(TULIP)으로 부르기도 한다.

 

 

캄파이스 교수와의 대담 (II)

 

김헌수 교수(IRC신학교 교장)

 

 

2. 개혁 신앙의 주요 특징들

 

김헌수: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가서, 개혁 신앙의 주요 특징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특히 하나님의 도(道)를 온전히 전하는 것과 관련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모든 뜻

 

캄파이스: 개혁 신앙의 특징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 것과 관련하여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행 20:27).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정한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지만 너희가 그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유대인들에게 설교했습니다(행 2:23).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모든 뜻이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나타났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는 데에서 ‘주님이 이런 분이시다. 주님의 뜻이 이러하다’는 것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작정의 능력을 따라 용납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자기들의 불신앙 때문에 유기되고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견고하게 나타났습니다.

 

강설(講說)의 비밀: 그리스도를 전파함

 

강설의 비밀은 하나님의 아들을 멸망해 가는 죄악 된 세상에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인 회중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는 것이 강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촉구하고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고 경고합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 믿지 않는 자에게 영원한 죽음이 있다는 내용의 강설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 것입니다(요일 5:11-12).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생명이 있고 그분 밖에 있으면 죽음이 있다는 것을 강설한다면, 거기에는 동시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은혜로운 선택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에서 행하신 일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냄 받은 성자(聖子)를 강설할 때 핵심적인 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이끌려졌다는 것, 곧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에 의해 이끌려졌다는 것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선택을 강설하는 것은 확신을 심어 줍니다. 교회 안에 있거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영생에 대해 매력과 호의를 갖도록 전파하고 그리스도에게 이끌리고 획득되도록 강설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파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강설의 비밀입니다. 사랑하는 아드님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시는 은혜가 계시되었습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원하는 사람을 자신에게 이끄십니다(요 12:32). 여기에 하나님의 선택의 비밀이 더해져 있는 것입니다.

 

 

 

 

개혁 신앙과 기독교적 세계관

 

김헌수: 한국 교회는 개혁 신앙과 신학을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정치 및 사회 분야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독교적 활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개혁 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강설에서 개혁 신앙의 특징을 찾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체계를 갖추고 활동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캄파이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논리적인 사고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혼잡한 말이나 혼란한 사고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약 기독교 신앙이 체계(system)라고 생각한다면, 예를 들어 정치적인 의미에서 실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마르크스주의나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체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칼빈주의, 심지어 기독교도 체계일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나 자유주의보다 더 좋은 체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선택한다면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사고(思考)의 체계이고 자유주의는 계몽 사조의 체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체계를 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강설하도록 부름 받았으나 체계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곧 중생의 능력에 대해 증언합니다. 이 중생에서 경건한 생활이 나옵니다. 우리가 경건한 생활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삶은 체계의 능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경건한 삶이 칼빈주의와 같은 체계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매우 통탄스런 오해입니다. 체계라는 용어를 기독교적인 믿음의 일과 관련하여 생각하는 것을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모든 신학은 실천적이다

 

교의학(dogmatics)에 대해 조직 신학(systematische theologi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는 여기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조직 신학’이라는 용어로 의도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작업한 석의(釋義) 재료를 취합하고 체계화시켜 하나의 신앙의 교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의도를 이해는 합니다만 이것은 개혁 교의학이 결코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ꡔ신학 입문ꡕ(Orientatie in de theologie)에서 교의학이라는 용어에도 단점이 있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christelijke doctrina)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용어는 칼빈이 사용한 것입니다. 독트리나(doctrina), 이것은 66권 성경에 나타난 교리이며, 또한 전(全) 구원 역사의 전개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과 다양성, 그러나 하나의 독트리나입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하나의 독트리나가 서술되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조직 신학이라는 형식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캄펀 신학교에 제안되어 논의되고 있는 신학 분과의 구분에 대해 주저하고 있습니다. 특히 조직 신학, 실천 신학이라는 말은 앵글로색슨 세계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으로서 아주 불명확한 용어입니다. 네덜란드에서도 각 신학부에서 실천 신학이라는 용어가 도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천 신학이라는 말은 아주 이상한 용어입니다. ‘봉사학’(diakoniologie)이 아름다운 용어가 아닙니까? 여기서 디아코니아라는 말은 ‘섬김’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복음을 섬기는 것, 이것은 직분자에게 주어졌습니다. 봉사학이라는 말은 캄펀 신학교의 전임(前任) 교수인 다우마(J. Douma)와 트림프(C. Trimp)가 지지하는 것으로서 아주 가치 있는 용어입니다. 개혁 신학의 관점에서는 ‘모든 신학이 실천적’입니다. 그래서 체계를 향한 욕구에 반대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이 점에서 모든 신학은 성경을 각 권별로 석의(釋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역사를, 그리고 독트리나와 직분론을 다룹니다. 모든 신학이 근본적으로 실천적입니다. 따라서 실천 신학이라는 용어가 소위 요리문답학이나 설교학 등의 과목에 제한된다면, 저는 캄펀 신학교의 젊은 동료 교수들과 입장을 달리합니다. 나는 이를 스스로 빈곤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강설의 본질

 

여러분이 교회를 염두에 두고 성경을 석의하는 일에 몰두할 때, 이 석의 작업은 논리적 능력을 따라 수행되며 학문적 의미에서 논리적이 됩니다. 그러나 석의가 본질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입니다. 나는 항상 학생들에게 “성경에서, 예를 들면 레위기나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하나님은 회중을 향하시며 실제적으로 자기 백성과 관계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식으로 주일 강설을 준비할 때, 그것이 몇 구절을 다루는 강설이든 연속 본문 강설이든 간에, 즉시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하나님의 백성, 회중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보낸 전령(傳令)이라는 사실에 영광스런 긴장이 있습니다. 이 긴장 가운데 여러분은 전령이며,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신 대로 이것은 위대한 파송입니다.

 

이 파송의 맥락에서 여러분은 신학이나, 석의, 교회 역사, 직분론, 기독교 독트리나를 하나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설교론이나 직분론, 여기에만 실천 신학이 제한되는 것을 걱정합니다.

 

실천 신학을 제한적으로 이해하면 또 다른 위험이 따릅니다. 그것은 실천 신학이 강하게 사회학적으로 규정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현대인들이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관계하는가 등을 중요하게 관찰하고 그래서 설교가 그들에게 “착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강설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 점은 옳습니다. 강설은 현대인에게 “착륙”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가가기를 바라신다는 영광스러운 긴장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원한 뜻을 따라 자신의 말씀으로 자기 백성에게 다가가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위해 아들을 보내셨고 우리를 이 일에 관련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말씀을 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착륙”합니까? 이것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기 자신을 주님의 말씀에 묶는다면 가능합니다. 이것은 메마른 석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서 빌립보서, 에베소서, 레위기 등을 읽는다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의 회중에게 향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종으로서 주의 성신을 통해 말씀이 “착륙”할 수 있도록 그분께 기도해야 합니다. “착륙”한다는 것은 사회학적, 심리학적 일일 뿐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신학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자기 세계에 다가가기를 바라십니다. 이 일에 말씀을 사용하고 또한 그 말씀을 여는 일에 설교자를 개입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성신을 보내시고 성신을 통하여 강력하게 역사(役事)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성신론은 무엇보다 기도의 처소인 목사의 서재에서 시작됩니다. 기도함으로써 성신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주께서 나의 눈을 열어 주님을 보고 주님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강설자로 일하고 있다면 “주님, 주일에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기도할 것은 “주님, 주님의 사역을 이루소서. 주님의 복음을 강설하는 일에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공경의 자세를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성신의 도구로서 성경 전체가 여러분에게서 활동하도록 공경의 자세를 가지십시오. 선호하는 주제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선호하는 주제를 다루지 마십시오. 강단에서 위대한 변론가로서 찬란하게 일하기를 바라지 말고, 삼위 하나님, 성부․성자․성신을 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말씀과 성신으로 개혁되는 개혁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3. 직분론

 

김헌수: 이제 셋째 문제인 직분론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공적(公的)인 직분 개념이 희박하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개인적인 관계나 나이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문화 가운데서 ‘어떻게 직분 개념을 바르게 세워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교회에서 잘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저희의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동양의 유교와 서양의 민주주의

 

캄파이스: 질문에서 유교 사회에서는 개인적 관계나 나이가 중요한 것을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고 했습니다. 한국을 아는 사람이라면 김 목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내 견해로는 연장자를 존경하는 한국 문화의 이 요소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우리 네덜란드 사람이 실제로 배워야 할 점입니다. 아주 좋은 면입니다. 물론 나이 든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젊은이들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특히 성경 전체가 다루고 있고, 특히 잠언서가 그러합니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분들의 말에 경청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전통이 한국 문화에는 있습니다. 내 견해로는 여러분들이 신중하게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서구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좋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민주주의적 서구인은 분명히 민주주의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가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민주주의가 이라크에 도입되고 이라크는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 함께 민주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네덜란드의 예를 들면, 최근에 기독교민주당(CDA)이 국회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기 위해 불과 여섯 석을 확보한 D66 정당과 소위 보라색 연립 내각을 구성했습니다. 그런데 D66은 전형적인 자유 사상가들의 정당이고 기독교 이념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연정(聯政)을 구성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우스꽝스런 체제입니다. 나는 다수가 결정하는 민주주의는 어리석은 체제라고 생각합니다. 다수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투표소에서 투표를 통하여 옳다는 것으로 결정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 점에서 민주주의는 공허하게 보이고, 다수 중심의 사고에는 정당한 권위가 그 안에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그 당의 당원은 아니지만, 국가 개혁주의 정당(SGP)의 정치 이상인 신정 정치(神政政治), 곧 주님께서 시민 생활을 다스리신다는 사상에는 동의합니다. 이것은 아주 가치 있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세계를 민주화시키거나 미국화시키는 것에는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이 점을 이 시간에 더 이야기할 수는 없겠습니다. 내 견해로는 한국이 유교를 버리고 서구의 민주주의를 따라가야 한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이것은 옛날의 가치, 어쨌든 여러분의 문화 가운데 있는 그 전통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돌려받겠습니까?

 

그러나 유교에는 직분 개념이 희박하다는 김 목사의 말은 옳습니다. 유교에서는 나이라는 요소를 절대화시켰기 때문에 노인과 청년의 구별은 있으나 직분을 중심으로 공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매우 약합니다. 가족 중심의 사고는 뿌리를 내렸으나 사회에서 직분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유교 자체가 이러한 직분적 사고를 제쳐 놓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와 나이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유교는 분명 근본적인 결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네덜란드 편에서 볼 때, 한국에서는 공적인 직분 개념이 바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특히 한국 교회에서 그리해야 될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직분

 

‘직분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나 집사뿐 아니라 인생의 다른 관계에서부터 예를 들어 봅시다.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직분적인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인 일일뿐 아니라 직분적인 일인 것입니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주님께서 부모를 직분으로 세우셨다는 생각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그들을 다스리기 원하셨습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04문). 따라서 성경은 자녀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가정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은 직분적으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즉 부모와 자식의 직분적 관계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직분을 주셨고, 거기에는 직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부부의 관계도 직분적인 관계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단지 성(性)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담의 위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낙원에서 하나님의 부왕(副王)이라는 직분자로 부름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직분적인 관계로 창조되었습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로서 서로 순종하고 사랑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러한 혼인 관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삶이 번창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범죄함으로 그 직분도 타락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직분적 관계의 타락을 의미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점점 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직분적인 소명에서 분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큰 비극입니다. 아마 한국에서도 그러한 현상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부부 사이의 직분적 책임이 교회에서 분명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그래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직분

 

직분의 타락이라는 현대의 비극은 교회 안의 직분적인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즈음에는 민주적인 분위기에서 신자들이 함께 모여 목사를 ‘그들의 목사’로 선출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주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소명)과 무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위임 대신에 사람의 자질과 은사만을 보고 자기들이 결정하는 것은 ‘경건한 세속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히 5:4). 하나님께서 직분자를 부르시되 교회를 통해서 부르십니다. 교회법의 여러 조항들이 이 문제를 다룹니다. 이 조항들이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를 선출할 때 어떻게 기능합니까?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직분자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개혁교회의 목사 임직 예식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그대를 그의 교회를 통하여 이 거룩한 봉사에 부르셨다는 것을 그대는 마음으로 확신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가정이라는 작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개혁되기 위해서는 직분 개념이 남자와 여자에게 필요합니다. 여성은 아이를 낳는 어머니로서 생물학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물학적인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인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직분적으로 제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하나님께 직분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직분적 책임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는 교회에서 결코 백성의 호의를 좇아서는 안 됩니다. 교중이 최종적인 심판자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했습니다(고전 4:4).

 

주님께서는 선출이라는 방법으로 일하시지만, 교회 역사를 자세히 보면 특별한 일을 위한 특별한 임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은 특별한 소명을 받아 제네바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칼빈이 연구하기 위해 스트라스부르그로 가려고 했을 때, 파렐은 칼빈을 붙잡고, “안 된다. 당신은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 여기에 당신이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그때 칼빈이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거기에서 특별한 일을 위한 특별한 임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통 임직에서도 말씀의 종과 장로와 집사의 위치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 직분은 그들을 선출한 다수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직분자가 교회의 다수에 의존한다면, 그래서 교인의 호의에 의존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교회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직분입니다. 보냄을 받은 직분자를 통해 나타나는 것은 바로 보내신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직분자에게 있어서는 보냄을 받았다는 의식이 필수적인 것입니다.

 

직분자의 태도와 책임

 

여기에서 우리는 직분자의 교인들을 향한 자세에 대해 조금 더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직분자는 심방을 받고 강설을 듣는 사람들에게 친절해야 합니다. 직분자는 높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친절과 온유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물론 권위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입을 크게 벌려 주님께 그래서 주님의 종에게 반역한다면 그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의 권위는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이고 그는 인간의 종이 아니라 높으신 주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분께 직분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4. 핍박에 대한 이해

 

김헌수: 마지막으로 핍박에 대한 것을 질문하겠습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기독교인이 핍박을 받는 일들이 있는데, 핍박의 원인과 핍박에 대한 기독교인의 이해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캄파이스: 네 번째 물음은 지금까지 앞서 다루었던 세 가지 질문과는 별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첨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김헌수: 작년에 찾아뵈었을 때 위그노에 대해 쓰신 책을 선물로 주셨고, 두 주일 전에 아펠도른 신학교에서 수학여행으로 베를린에 있는 위그노 박물관을 방문했었습니다. 위그노에 대한 핍박이 생각나서 포괄적으로 질문한 것입니다.

 

또한 이 질문은 현대 사회에 대한 저의 생각과도 관련됩니다. 고대 교회사를 보면 로마 제국 아래에서 신자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큰 핍박을 받는 것은 핍박을 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세력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대인들은 사회 엘리트의 권력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인은 전기, 통신, 컴퓨터, 전자 제품 등에 의존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유를 말하지만 다른 편으로는 점점 더 사회의 편의 시설에 의존하면서 자유의 여지가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회가 통합되면서 로마 제국보다도 더 강력한 권력이 형성되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은 교회에 대한 박해의 터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이야기하는 박해가 일어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박해의 원인: 그리스도가 주인가?

 

캄파이스: 16세기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큰 박해를 겪었습니다. 19세기 헨드릭 드 콕 역시 감옥에 갇혔었습니다. 여러분이 다음에 이곳 옴먼(Ommen)에 오면 함께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옴먼에서 말씀의 사역자 교육이 시작되었는데 지금까지도 청년 지원자들을 위한 신학 교육 장소로 사용된 집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서 랄테(A. C. van Raalte) 목사의 신학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 근방에는 또한 감옥으로 사용된 집이 있는데, 랄테 목사가 거기에 갇혔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의 거리 이름은 디커르스 가(街. Dikkersstraat)인데, ‘디커르스’는 분리 당시의 시장이었고 분리자들을 혹독하게 핍박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이 거리는 박해와 연관된 곳입니다. 분리에 관한 자료를 보면 종종 디커르스 가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분리 역시 고대 교회나 종교개혁만큼은 아니지만 박해를 겪었습니다.

 

고대 교회가 핍박을 받을 때 가장 큰 문제는 언제나 ‘황제가 주(主)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가’였습니다. 박해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종인가, 아니면 사람의 종인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대 로마 당시에는 ‘황제가 주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가 주인가?’ 한국과 일본에서는 ‘천황이 주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가?’ 등의 문제로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정부는 직분적으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합니다.

 

제가 최근에 개혁교회 목사 랄테(J. van Raalte)에 관한 글을 썼습니다. 랄테 목사는 국가 사회주의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독일의 강제 수용소 다카우(Dachau)에서 오 년을 보냈습니다. 그는 총통 히틀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고백했다가 이런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피나 영토에 대한 이론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돌렸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순교자: 증인

 

여러분, 이러한 노선을 교회 역사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오늘 우리 말씀의 사역자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직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 권력의 종입니까? 이것은 모든 세기를 통하여 끊임없이 교회 역사에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역사를 연구해야 합니다. 16세기 박해 당시 여러 문서를 모아 순교자의 책을 만들었는데 이 순교자(martyr)라는 말은 여러분이 아는 대로 헬라어의 ‘증인’(μαρτυρέω)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증인이고 특히 피로써 증거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라는 진리를 증거했기 때문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시 곁길로 빠져서 이야기합시다. 네덜란드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가 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많은 재세례파 신자들은 자기들의 확신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귀도 드 브레는 ꡔ재세례파의 뿌리와 기원ꡕ이라는 책을 재세례파를 향해서 썼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에게 “너희는 실제로 순교자가 아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신념 때문에 죽는다. 만약 너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 언약의 중보자로 안다면, 그때는 너희가 너희 신념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순교한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멋있는 구별입니다. 당시에 수천 명의 재세례파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귀도 드 브레는 “너희는 엄격한 의미에서 순교자가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신념 때문에 죽는 것이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라고 바르게 지적했습니다. 이슬람교의 확신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자들이 있지만(聖戰, Jihad) 그들은 순교자가 아닙니다. 순교라는 말은 아주 값진 용어입니다. 우리는 이를 유지해야 합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증거하는 것인데 때로는 피까지 흘려 가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모든 성도 특히 직분자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피로써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분이 치러야 할 쓰라린 희생입니다.

 

이 시대를 대항하는 참된 자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권력과 권력자들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로워야 합니다. 이 점에서 김 목사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신자가 교회 안에서 고립적으로 살지만 동시에 현대적으로 사는 일이 있습니다. 신자가 현대적인 삶의 노예가 됨으로써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곳 옴먼의 교회에서 발행하는 어떤 잡지에 18세 정도 된 한 청년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이렇게 바쁜 시대에 강설이 짧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당신은 권력의 노예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컴퓨터 중독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문자 그대로 ‘중독’이 되었습니다. 주일을 지키면서 안식하는 것을 예로 들어봅시다. 요즈음 사람들은 교회에 “짧게 짧게”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차분하게 앉아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발 짧게 해 주세요”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머지는 자기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헌신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이 일에 목사나 교회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이끌어야 합니다. 청교도적인 엄격성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자유에 따라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기쁜 마음으로 경축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시대의 권력에 대항하는 자유가 탄생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신다면 이 자유가 우리를 순교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순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통치를 피로써 증거하는 것인데 오직 이분의 통치만이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줍니다.

 

5. 기도

 

캄파이스: 같이 기도하고 오늘 만남을 마무리합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을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하게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도록 부르시고, 사람의 종이 아니라 구주의 종이 되어 어두움에서 복음의 광채로 사람을 부르게 하시는 일을 받들도록 우리를 부르신 그 소명에 대하여 감사하나이다. 여기 형제들에게 복을 주소서. 성신의 교통을 내려 주시고 모든 일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을 기도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캄파이스 목사님은 독립개신교회의 교인들에게 안부의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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