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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진모 교수

  Trinity Christian College
  역사학과(B.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M.Div.,Th.M.,Ph.D.)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역사신학
 

‘합신’으로 알려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1980년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합동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였지만, 1984년에 대학령에 준하여 ‘합동신학교’로 인가를 얻었으며 1996년에 단설 신학대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로 개칭되었다. 현재 수원에 자리 잡고 있는 본교는 역사적 전통 개혁주의 신학과 구학파 장로교회의 보수적 전통을 계승하려는 목적을 위해 시작되었다. 비록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다른 신학교의 설립이념과 유사하거나 동일하지만, 초창기부터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란 모토를 내 걸고 지금까지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다. 이는 본교의 출발에 영향을 주었던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연관이 있다.

 


 

* 바르게 하는 사명

‘바른 것’을 추구하려는 합신의 정신은 ‘정암(正岩)’ 박윤선(1905-1988)에 의해 그 기초가 놓여졌다. 그는 1934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유학하였다. 그곳에서 현대주의 논쟁을 통하여 나타난 자유주의 신학의 강력한 도전에 대해 경각심을 갖게 되었으며, 나아가서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중시하는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회의 고백적 신앙 전통을 계승하고 변증할 것을 다짐하였다.

  

정암이 한국교회에 끼친 보수주의 신학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고신과 총신, 그리고 합신에서의 교수사역을 통하여 한국의 보수신학의 저변확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정암은 1946년 한상동 목사로부터 초청을 받아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신학교인 고려신학교 설립에 참여하였다. 교장서리를 맡았던 그는 박형룡에게 초대교장직을 양보하였으며, 1948에는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14년간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조직신학, 성경신학, 그리고 성경원어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동 신학교의 신학지인 ‘파수군’의 발행인, 편집인, 그리고 주필을 맡으며 고신 교단의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고신을 떠난 정암은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총신의 교수직을 맡았다. 교수요원이 턱없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그는 조직신학자인 박형룡 교수와 함께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은퇴 후 미국에 살던 정암은 총신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1979년 2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학교가 부탁한 대로 Th.M과 MA 과정의 대학원 원장직을 맡았다.

  

합신이 총신으로부터 분립된 것은 1980년 10월의 일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총신에서 가르치고 있던 신복윤(조직신학), 윤영탁(구약), 김명혁(교회사), 그리고 박형룡(신약) 등 4명의 교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총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정암에게 새로운 신학교를 출범하는 일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정암은 어느 정도의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결단을 내리고 교장직을 맡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총신의 주요 교수들이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였는가? 또 하나의 신학교가 반드시 세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합동신학대학원 20년사』에서는 합동신학대학원이 설립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교권주의자들의 횡포를 개혁함, 2) 지역주의가 빚은 총회 분열, 3) 교단을 방관하는 잘못된 교회관, 4) 교리와 생활이 분리된 형식주의, 5) 교육자의 양심을 지키는 길을 선택함.

  

그 당시 위에 언급된 4인의 총신 교수들은 총신에서는 더 이상 올바른 신학 수업이 불가능하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 이유는 수년 전부터 합동교단의 정치적 권력을 장악한 이00목사의 지나친 교권주의의 남발로 인하여 후학을 양성해야 할 신학교의 기본적 사명조차 다할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정암도 1980년 4월에 총신의 학장 서리를 맡았지만, 이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 특정 인물이 학교에 간섭하는 상황에서 도저히 학원의 정상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사임한 상태였다. 그 당시 학교 내의 문제는 외부로 널리 알려진 한국 기독교계의 커다란 뉴스거리였다. 특히 1979년 9월 총회에서는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이 있었기 때문에 온 교계의 시선이 총신의 사태를 집중되어 있었다.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1979년에 총회가 분열되자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에서 집회를 열었다. 사태해결을 위해 주선된 만남에 임했던 학생 대표들은 도리어 교권주의에 크게 실망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 비주류가 대거 빠져나간 상황에서 이사회는 학생의 수를 경쟁적으로 늘리기 위하여 자격이 없는 학생도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교수들은 올바른 방법으로 학생을 모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사회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뜻을 무시하였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학교의 학사업무와 일반 운영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였다.  

  

1980년 봄 학기에 이사회는 학원정상화를 위한 방안은 모색하지 않고 학생들을 처벌하고 교단신문에 광고를 게재하였다. 학생들은 계속하여 수업을 거부하고 교권주의자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등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 4월에 흥미로운 것은 사건이 생겼다. 56명의 이사 전원이 사퇴하기를 결정하였으나, 이사장과 부이사장 그리고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하던 이00 목사는 사퇴에서 제외되었다. 1980년 5월 계엄령으로 인하여 모든 대학이 문을 닫았다. 9월이 되어 실행이사회가 열렸는데, 이사들은 이 자리에서 학교 내의 모든 혼란의 책임을 교수들에게 돌렸다. 설상가상으로 1980년 가을노회에서 이00 목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총회에서 총신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지만, 해결은커녕 학교의 상황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특별위원회는 교수들과 사전에 협의도 없이 개강 예배를 인도하였다. 징계할 교수와 학생들을 색출하기 위하여 일대일 심문을 하기도 하였다. 결국 5명의 학생을 제명당하였고, 10월에는 임의로 휴교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4인의 총신 교수들은 10월 23일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들의 동기는 단순했다. 교권의 횡포가 없는 상황에서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근거한 학문과 경건을 갖춘 지도자들을 양성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정암은 결코 합동 교단으로부터 분립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합동 교단이 다시 연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새롭게 시작하는 학교의 이름을 ‘합동신학교’로 정하길 원했다.

  

1980년 11월 11일에 남서울교회에서 합신의 개교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졸업생의 진로와 관계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단이 필요하게 되자, 약 1년 뒤인 1981년 9월 22일에 개혁에 뜻을 같이하는 교회들로 구성되어 제66회 총회로 창립되었다. 이와 같이 신학교가 먼저 설립되고 약 1년 뒤에 교단이 설립된 것과 합신 총회와 합동신학교가 직영이 아닌 인준 관계를 맺은 채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교단에 속한 교회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적극적인 재정과 기도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교수들은 이에 깊이 감사하고 학문과 경건을 겸비한 신학생을 배출하는 일에 집중하여 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모토로 삼은 것은 타 신학교 또는 교단을 ‘비판’하거나 ‘비교’하려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코람데오’의 개혁주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것이었다.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하고, 되고, 그리고 살자는 것이었다. 개교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없이 부족하지만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고 있다.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합신의 시작은 미약하였다. 1980년 10월에 첫 모임을 가졌을 때 모든 것이 막막할 뿐이었다. 남서울교회를 빌려 사용하던 불편은 모두가 감수하였다. 그러나 합동신학원의 분립을 반대하는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사역하던 학우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소속한 교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름이 아닌 경제적 압박과 함께 장래에 대한 불확실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이지만, 일부는 다시 총신으로 돌아갔다.

  

어려운 것은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른 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연구실이나 사례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들과 학생들은 마음을 더욱 합쳤다. 정암과 교수들은 분립의 과정을 겪으면서 상처를 받은 학생들의 마음이 거칠어진 것을 의식하여, 화평케 하는 신앙 인격자로 교육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특히 정암은 채플과 강의를 통하여 냉소적이거나 비판적인 자세를 과감히 버리고 그리스도의 넓은 마음을 가질 것을 호소하였다. 적지 않은 교계 지도자들이 합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하여 호응하였다. 그 결과 겨울방학을 포기하고 2학기 수업을 강행한 결과, 1981년 2월 24일에 48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1980년 11월, 정부는 무인가 신학교 정비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당시 220개 신학교 중에 오로지 37개만 교육부 인가를 받은 상태였다. 교단별로 성도수가 20만명 이상인 교단에 한해서 하나의 신학교를 인정하는 방침이었다. 시설도 대학기준의 70% 정도를 갖추어야 했다. 그 후 수많은 신학교가 강압적으로 폐지되거나 고발조치를 당하였다.  

  

하나님께서 합신을 불쌍히 여기셨다. 1982년 11월, 현재 수원의 학교부지인 22,713평을 구입하게 되었고, 1984년 12월에는 학교 본관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하여 정부로부터 40명의 학생을 모집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다. 학교가 세워진지 4년 6개월만인 1985년 4월에 공사가 완성되면서 수원 캠퍼스 시대를 열게 되었다. 1990년 9월에 생활관을 개관하면서 더욱 향상된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4년 3월에 본관 4층을 증축한 후, 2004년 3월에 변화산기념도서관을, 2008년 9월에는 설교센타를 개관하였다. 본교의 재정 형편은 항상 어려웠었다. 빈손으로 일을 시작하였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은혜로 채워주셨다.

 

* 새 시대를 맞아

1988년 6월, 정암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이란 모토에 담겨있는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매년 ‘정암신학강좌’를 개최하였으며, 최근 2011년 11월에는 제23회 정기모임을 가진바 있다. 한편 1993년에는 정암신학연구소와 칼빈사상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물론 정암이라는 인물을 신격화하거나 그의 사상의 범주에만 머무르고자 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가 후배들에게 전해 준 개혁신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할 뿐이다. 세월이 바뀌어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기 위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2010년 11월, 본교의 교수들은 개교 30주년을 맞아『교회를 위한 합신 신학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여러 차례 만나서 오랜 시간 신중하게 토의한 결과였다. 모든 교수들은 개혁주의 신학을 계승하기 원했던 정암의 뜻을 재차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학교의 이념을 발표하였다. 1) 우리는 신학이 철저하게 성경에 기초한다고 믿는다. 2) 우리는 신학의 모든 분과가 개혁주의의 사상 아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된다고 믿는다. 3) 우리는 신학이 교회를 위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에 따라 교수들은 앞으로 계속하여 유도적, 통합적, 실천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신학적 ‘이론과 실천’의 조화 또는 ‘학문과 경건’의 균형을 강조해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수원의 산기슭에 자리하였기에 논과 밭을 지나 찾아와야 했던 합동신학교는 현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명품 신도시를 지향하는 광교에 속하게 되었다. 주위 환경이 급속히 변하여 학교건물 바로 앞에 8차선 길이 만들어졌으며, 전철과 광역버스로 통학이 편리하게 되었다. 물론 오가는 차량으로 인해 소음과 먼지가 많아지고 면학 분위기도 전보다 훼손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 분명하게 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 합신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지난 30년간 계승한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의 사상을 더욱 효과 있게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향해 전달하기를 원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커지는 것’이나 ‘잘 알려지는 것’ 보다 ‘바르게 하는 것’에 하나님의 기대와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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