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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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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목사는 한국이 낳은 대표적인 경건한 설교자이며 성경 주경학자이다. 신구약성경을 모두 주석하여 1979년도에 완간 기념예배를 드렸다. 평양신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생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그의 일생은 기도일관, 진실노력, 침묵정진의 삶으로 요약된다. ‘목사에게는 강단이 생명이다’고 강조하듯이 성경연구와 목회전선을 접목시킨 경건 인물이었다.

 

 

박윤선은 1905년 12월 11일(음력)에 평북 철산군 백량면 장평동에서 가난하고 부지런한 농부인 박근수와 김진신(金眞信) 사이에 태어난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형=박윤석, 누님 두 명, 여동생 한 명). 철저한 유교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30대가 넘기 전에 노름을 완전히 끊었으며, 불신자 때에도 술을 마시지 않고 깨끗이 사는 청년이었다. 후에 주님을 영접하여 독실한 신자로서 평생 교회를 신실히 봉사하였다. 윤선은 아홉 살 때(1913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사서오경을 다 마쳤고, 예기와 주역 외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암송할 정도로 통달하였으며, 논어와 맹자는 그 주해(註解)까지 다 외웠다고 한다. 17세까지 서당에서 동양 고전을 섭렵하였다.


 

서당에 다니는 동안 여름에는 집에서 소를 먹이어야 했다. 서당에서 1등으로 공부했는데 한문시 작문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17세에 약 6km(15리) 떨어진 동문동에 있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일마다 걸어서 다녔는데 사춘기 때에 가지는 인생의 공허감을 매꾸어 보려고 열심히 다녔다. 당시 설교자는 한 달에 한번 순회 목사님들이었고 나머지 주일은 그 교회의 장로가 담당했다. 설교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 교회에 출석하였다. 그 당시는 남녀 좌석 가운데 휘장이 쳐져 있었다.


 

18세 때인 1923년 봄에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32km(80리)를 걸어서 선천군 군산면 장공동에 있는 선천 대동소학교를 찾아가 6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였다. 당시 선천은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여 많은 주민들이 교회에 다녔다. 대동소학교도 그 동리의 부자요 기독교 신자였던 김도순씨가 세웠다. 그의 아들도 이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가 박윤선의 고향으로 장가들게 되어, 그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권유로 이 학교에 오게 된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아침마다 경건회가 있었고, 주일에는 교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설교를 열심히 듣긴 해도 큰 깨달음이 없었다. 3?1 독립만세 운동이 있은 후 몇 해가 지났지만 일본 경찰들이 종종 학교에 와서 검사를 하였다. 겨울방학 때 부모님이 정해 준 아내와 결혼을 했는데 얼굴도 보지 못하고 순종했다. 당시 신랑 박윤선군은 18세였고, 신부 김애련양의 나이는 15세였는데 학력은 없었고 한글은 읽을 수 있었고 농촌 여성으로 매우 수줍어하였다. 소학교 졸업시 최우등으로 졸업했는데 1년 동안 수학과 일본어도 자습하여 통달했다.


 

대동소학교를 마치고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거기서 한 학기를 공부했는데 학기말쯤에 이구하 교장을 배척하는 데모로 인해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하는 수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선천 신성중학교에서 실시하는 3학년 보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해서 이 학교를 고학(소 먹임, 우유배달, 밭에 김매는 일, 변소 거름 치우는 일, YMCA 아동 교육사업 교사)하면서 다니게 되었다(1923~1927). 고학생으로 공부하자니 시간도 부족하여 식사시간을 절약하는데 식당에서 5분 동안에 식사를 마치곤 하여 “5분”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신성중학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고 있어서 날마다 경건회가 있었다. 길선주 목사께서 오셔서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몇 일 동안 사경회를 인도하는 모임에서 열심히 말씀을 들으면서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도 가졌다. 계시록에는 무엇인가 깊고 좋은 내용이 있을 터인데 강사목사님께서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주일마다 선천 북교회(1000여명 참석)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양전백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해가 갈수록 차츰 신앙이 생겨 신앙운동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이때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된다. 22세 어느 날 학교 가까이 수청고개 밑에 있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그의 심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하고 자문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즉시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같이 들리는데,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니라’하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이때부터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그 후로 성경을 견고히 붙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생활이 시작되었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기간은 아내와 떨어져 있게 되고 방학 때만 고향에서 함께 지냈다. 첫아기가 첫돌이 못되어 병원 한번 가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박윤선 학생은 이로 인해 죄책감으로 괴로웠다. 신성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내로 하여금 교육을 받도록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아내를 선천으로 데리고 와서 선천읍 보성여학교에 입학시켰다. 이 때 아내 이름을 영선(英善)으로 개명해 주었다.


 

김선두 교장선생님은 그의 은인이 되었는데 그는 윤선으로 하여금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도록 밀어주었다. 평양숭실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하여(1927~1931) 계속 고학으로 공부를 하였다. 관영 철도호텔 종업원들에게 4년간 영어를 가르치며 적지 않는 월급을 받아 생활을 하였다. 숭전 영문과에서 공부하는 4년 동안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서문밖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 몇몇 동지들(이유택, 송영길, 김철훈, 박기환, 김진홍, 방지일)과 함께 새벽 3~4시에 기상하여 약 1시간 정도 걸어가서 모란봉 뒤 숲 속에서 기도하곤 했다.


 

“조기부대(早起部隊)”라는 별명도 얻었는데 회원 모두 후에 목사가 되었고, 이유택목사, 송영길목사, 김철훈목사는 공산 치하에서 순교하였다. 방학마다 전도대를 조직하여 지방 순회 전도 강연을 다녔다. 이때 윤선은 설교를 많이 하게 되었다. 만주 봉천에까지 가서 전도를 하였다. 이러던 중 그는 4학년 때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기도했다. 숭전(교장: 마포삼열 선교사)에 재학하던 4년 동안 모란봉 뒷동리에 있는 가현교회를 맡아서 주일마다 설교를 했으며 교우들 심방을 하였는데 물론 보수는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가끔 서문밖교회에 가서 임종순목사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는데 임목사는 복음주의 설교가로서 보수주의를 지켰다.


 

해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도자들 가운데 더러 사회복음주의 노선에서 설교한 것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면과 사상면에 있어서는 깨끗한 인격으로 감화를 끼친 정재윤(鄭在允) 교수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훗날 방지일 목사는 그에 대해 회고하기를 ‘박 형님은 숭전 재학 시절 언제나 성경에 열중하여 있었으니, 계속 성경을 외우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또 읽었다. 마침 새김질하는 소나 양같이 그는 성경을 계속 반복하여 읽는 것이었다’고 한다.


 

숭전을 졸업하고 1931년 4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신학교에는 100여명이 재학하고 있었으며, 사명감이 없는 사람은 입학시키지 아니했다. 거의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그 분위기는 매우 친밀했으며, 학생들도 학교의 규칙을 잘 지켰다. 결석할 경우 반드시 교장의 허락을 받았다. 또한 새벽기도회에 힘썼고, 기회가 닿는 대로 목회도 힘썼다. 이러다 보면 졸업을 4년 후 심지어 7년만에 졸업하는 이들도 있었다. 박윤선은 신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숭실중학교의 사감으로 일하였다. 특히 문제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상담하고 도와주었다. 주일에는 숭실중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해 실시하는 성경반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교안을 작성할 때는 신학교 도서실에서 영문 성경주석을 빌려다 철저하게 준비하였다. 방학 때는 교수들의 성경주석(영문)을 빌려 가지고 고향 장평동에 가서 열심히 읽은 후 돌려주기도 했다.


 

신학교 1학년 때 부친께서 별세하셨다. 장례는 기독교식으로 하였다. 신학교 재학생 몇 명(김진홍, 방지일)고 함께 <겨자씨>라는 신앙지를 출판하였다. 방지일목사가 주동이 되어서 열심히 출간하였다. 선배 중 한 분인 김린서 장로(후에 목사가 됨)는 부흥사였는데 단독으로 <신앙생활>이란 신앙지를 출판하면서 진리를 파수하며,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기 위해 투쟁했다
 

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을 더 연구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추진하였다. 모친은 아들의 유학을 반대하였는데, 부친의 제사를 반대해 왔으므로 유학으로 인해 그의 신앙이 더 견고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모친께서 엄지발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몹시 고통을 당하자 평양 기독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했는데 당시까지 어머니는 이름이 없었고 “김씨”라고만 불리어졌는데 윤선은 어머니께서 참으로 믿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金眞信으로 지어주고 입원시켰다(후일에 모친도 회갑을 맞이할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고 한글을 배워 신구약성경을 일독하였다. 어머니는 붓글씨로 요한복음 3:16말씀을 써서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아들에게 보낸 것을 박목사는 귀중하게 보관했다). 마침내 그는 Westminster 신학교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1934년 8월 중순경에 미국으로 유학올 때 왕길지 선교사가 모자라는 여비를 빌려주었다. 후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다 갚았다. 일본 고베에서 배를 타고 상항에 17일 간 오면서 요한계시록을 18장까지 암송하고, 상항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그레이하운드로 일주일간 오면서 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을 암송하였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으로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구약학자 윌슨(Robert D. Wilson)과 신약학자며 학장인 메이천(Gresham Machen,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 1929년 프린스톤신학교가 자유주의로 나갈 때 떨어져 나와 웨스트민스터를 세웠다)으로부터 칼빈주의(혹 개혁주의) 신앙과 성경의 권위성, 주경신학, 성경해석을 배웠다. 오직 성경만이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인 줄 확신하고 성경을 바로 알고 그대로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살았다.

 

재학 중 화란어, 독일어도 틈틈이 공부하여 칼빈주의 신학자인 카이퍼와 바빙크의 저서들을 읽을 정도였다. 1936년 5월에 졸업을 하고 신학석사(Master of Theology)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해 8월에 귀국하여 고향에 계시는 모친을 문안한 후 가족과 함께 평양에 거주하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성경 원어를 강의했으며 총회 표준 성경주석 편집부에서 근무하였다(1936. 8~1938. 7). 이때 편집부장은 박형룡박사였고, 사무실은 신학교 하층에 있었다. 당시 평양의 유일한 여자 성경학교였던 고등성경학교에 강사로 나가 성경을 가르쳤다.

 

1938년 8월에 다시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년간 머물면서 밴틸(C. Van Til)교수의 지도로 변증학 및 성경 원어를 더 연구하였다(1938. 9~1939. 11). 밴틸교수의 변증학은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아는 길은 성경뿐이다. 자연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불신자는 자연계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불신자도 오직 성경으로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2차대전이 시작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공부를 마치고 1939년 10월 동경와 와서 표준 성경주석부의 일을 계속하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골로새서를 주석하다가 1940년 3월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자 얼마 후 바로 만주 봉천(현 瀋陽)에 있는 우지황교회에서 청빙이 있어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가서 목회하였다(1940. 4~1941. 3). 그 다음해에 봉천 북능(北凌)지역에서 개교한 만주신학교(교장:정상인 목사)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1941. 4~1943. 7). 성경원어(히브리어, 헬라어), 신약학을 가르쳤다. 일본으로부터 오신 박형룡박사도 함께 가르쳤다. 신사참배 문제로 교계가 어려울 때 그는 계속 주석서를 저술했다. 그도 한번 신사참배를 한 적이 있어 이를 회개하는 심령으로 저술에 집념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가족과 함께 6개월 고향에 거주하였다. 북이 공산화 되어가기에 월남할 뜻을 정하고 1946년 2월에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하여 3월 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의 소원은 신학교육과 주석 집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태원에서 두어 달 지내고 5월에 한상동 목사의 초청으로 신학교 설립을 위해 부산을 경유하여 진해로 내려갔다. 경화동 교회에서 설교를 몇 달 하였다.


 

1946년 9월 20일부터 개교한 부산 고려신학교(설립자: 주남선목사, 한상동목사)에 교장서리에 취임하였다. 본래는 박형룡박사가 초대교장으로 내정되었는데 귀국이 늦어짐에 따라 서리로 취임한 것이다(박 박사는 10월 14일부터 교장으로 근무했다). 학교의 신학 노선은 칼빈주의였다. 주경신학, 조직신학, 성경신학, 성경 원어를 가르쳤다. 한부선(韓富善, B. F. Hunt)선교사, 마두원(馬斗元, D.R. Malsbary)선교사, 최의손(崔義遜, W. H. Chisholm)선교사, 함일돈(咸日頓, F.F. Hamilton)선교사가 신사참배문제로 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모두 돌아와서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신학교가 처음에는 부산진에 있는 금성중학교 교실 하나에서 시작했다가 둘째 학기부터 초량교회 부속건물에서 수업하다가, 광복동에 있는 큰 건물을 구입하여 1956년까지 교사로 사용하다가 암남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옮겼다. 서울 조선신학교 학생들 일부가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학교를 자퇴했는데 이들 34명이 박형룡박사와 함께 부산에 내려와 고신에 편입하기도 했다.


 

그 다음헤 봄 학기에 박 박사는 서울에 신학교를 설립할 뜻을 두고 고신을 사임하고 상경하여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그와 함께 내려온 34명의 학생들 전원이 박 박사와 함께 서울로 떠나갔다. 고신은 그 설립목적을 위해 계속 부산에서 기반을 닦았다.

 

1947년 10월에는 교수로 취임했고, 1948년 5월에는 교장으로 취임하여 봉사하였다. 6?25가 터지기 전에 고신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는데 박윤선목사가 경건회 시간에 요한복음 21:15~17을 읽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을 근거로 하여 설교한 후에 학생들 중에서 누구든지 한 사람 일어나 기도하라고 했는데, 어떤 학생이 일어나 통회 자복기도를 하는데 눈물겹고 진실한 내용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곧이어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회개 기도하는데 계속 되니 학교에서 강의를 전폐하고, 기도회는 한 주간 계속 되었다. 이 운동이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도 일어났고 점점 퍼져 고신측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5 때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에 모일 때 회개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특히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관으로 전국 피난교역자 부흥회(강사:박형룡, 김치선, 박윤선, 한부선)가 개최되어 민족과 교계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기도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를 적극한 일에 대한 간증으로 많은 교역자들이 은혜를 받고 일부 신사참배에 참여한 죄를 철저히 회개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칼빈주의에 입각한 성경 주석 서술은 계속 되었다.

 

 

신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1953년 10월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 가서 6개월간 신약학을 연구하던 중 54년 3월에 뜻밖의 비보를 받고 즉시 귀국했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별세한 것이었다. 이때 박윤선목사는 49세였고 아내는 46세였다. 미성년 5자매를 두고 먼저 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주님의 위로로 견디며 6개월을 지내다가 그해 10월 이화주(李和主)와 재혼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항상 마음은 성경에 머물렀고 신구약 주석 집필을 쉬지 않았다. 1954년 9월에 미국 필라델피아 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명예박사(D.D.)를 받았다. 1960년에 성수주일에 대한 의견차이로 말미암아 고려신학교를 사임하였다.


 

고신에서 14년간 재직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25권이었다.2) 잠시 부산에 더 머물면서 사도행전을 탈고하고 서울로 와서 동산교회(서대문)에서 목회를 하였다(1961. 2~1964. 4). 이 기간 중 1963년 3월 10일 서울 총회신학교(사당동, 현 총신대 신대원)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7대 교장(윤번제)으로 취임하였다.


 

동산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15권이었다.3) 또 총신 부산분교에서 교수 생활 및 부산 성산교회(좌천동)에서 목회를 하였다(1965. 3~1967. 2). 이때 시편 주석 증보(增補)작업을 마쳤다. 67년 3월에 다시 서울로 와서 서울 총신대학 신학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1967. 3~1974. 11).4) 이 기간 중 서울 한성교회(노량진)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다(1968. 6~1973). 1974년 11월에 서울 총신대학 신학원 교수를 사임하였다(70세 은퇴). 총신 교수 11년 동안 탈고한 성경주석은 13권이었다.5)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건너가서 4년 동안 있으면서 약해진 건강을 돌보며 성경주석 저술에 전념하였다. 담석 치료를 받아 완치되는 기쁨도 누렸다. 여기서 탈고한 주석은 12권이었다.6) 에스더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66권을 완필하기까지 인생 여정 74년을 붙잡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렸다(1974. 12~1979. 1). 1977년 여름에 일시 귀국하여 총신대 신대원에서 한 학기 교수하고, 다시 로스엔젤레스에서 머물다가 1979년 3월에 서울 총신대학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9월 3일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총신대학 대강당에서 가졌다. 그의 성경주석의 기본은 항상 칼빈주의와 성경의 정확 무오설이었다.

 

1980년 11월에 서울 총신대학 대학원장을 사임하고, 수원 합동신학원 초대 원장(1980. 11~1985. 2), 수원합동신학교 명예 교장(1985. 3~1988. 6)으로 있던 중 1987년 4월 27일 박윤선 목사의 ‘성역 50년’을 기념하여 남서울 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후에 기념 논총인 <敬虔과 學問>을 받으면서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고 진솔한 두어 마디로 답사를 대신하였다. 그는 종종 말하기를 ‘내가 죽었다 깨어나 다시 한세상을 산다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 하겠다’고 했다. 이 말처럼 그는 성경을 사랑하고, 확신하고, 묵상하고, 주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그의 기도생활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경 연구에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기도로 영감을 얻었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에 옮겼다.

1988년 6월 30일에 83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합동신학교장으로 장례예배를 드렸다.

 

출처: 한국컴퓨터선교회 http://kcm.kr/dic_view.php?nid=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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