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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6:69-27:2
강설날짜 2018-02-25

베드로를 연단하시는 예수님(마26:69-27:2절)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어떻게 하면 꼬트리를 잡아서 죽이고자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 했을 때도 모략을 꾸미고자 했지만 백성의 폭동이 두려워서 기회를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기회가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가능해졌습니다. 겟세마네 기도에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시면서 “칼과 몽치”를 가지고 온 유다와 종교지도자들의 경비대원에서 붙잡히셨습니다. 예수님를 체포한 그들이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 뜰에 도착했을 때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이기도 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기회였지만, 늦은 밤에 체포를 하고 심문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법적으로도 올바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이루어지는 심문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침이 오면 백성의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속전속결로 마무리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이라면 더욱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지만 자신들의 부귀영화가 더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것입니다. 그들만을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도 보아야 합니다.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의 제자 한 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였습니다. 끝까지 충성을 다하겠다는 체면을 유지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증거를 찾고자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증언을 해도 서로 다른 말을 하기 때문에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두 사람”이 온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과연 그런가? 하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대제사장 가야바는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증인은 거짓을 말한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요2:19절을 잘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너희’라고 하셨지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을 무너뜨리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찾고자 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그 때에 두 사람이 와서 증언을 했지만 위증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질문에도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가야바는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침묵해 오시던 예수님께서는 “네가 말하였노라”고 하셨을 때 해답을 찾았다는 듯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라고 하면서 더 증인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면서 “너희가 지금 신성모독”하는 말을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회원에게도 의견을 묻자 한결같이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법정은 늘 진실을 가려야 하지만 예수님의 진실한 말씀은 오히려 정죄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지키고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무릎을 꿇고 죄를 고백해야 하지만 ‘신성모독’으로 몰고 가서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인들까지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과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한 대가는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고 하면서 조롱을 한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오늘 말씀은 “베드로를 연단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강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사랑을 아시는 귀한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69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바깥 뜰’에서 계속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말을 보고자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있던 하인은 아마도 기억을 떠 올리면서 갈릴리 사람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아니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작은 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형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자신도 함께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당하자 충성을 맹세했던 마음은 사라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70절을 보시면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우회적으로 말한 것이지만 베드로 자신도 제9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마10:33절에서 하신 말씀이 떠올라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태는 ‘모든 사람 앞에서’라고 강조함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했지만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과의 자신의 연관성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한 것을 생각하면 구원은 오직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정은 아마도 매우 귀중한 연단의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갈릴리로 먼저 가서 기다리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곳에서 만난 후에는 삼위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고 오직 복음의 증인자로서 생활했습니다. 이처럼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겸손해질 수 있도록 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보여 주신 예수님의 기도와 공생애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됨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복음을 위해서 신앙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인의 말을 들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가운데 71절을 보시면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는 것입니다. 다른 여종은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시인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사형을 당할 수도 있지만, 요9:22절에 의하면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베드로는 가야바의 뜰에서 완전히 벗어나고자 앞문까지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하인의 소리를 들었을 때 아마도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72절에서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완전하게 부정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결말을 알고자 했지만 자신에게 있어서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한 베드로는 확신을 주기 위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강하게 부정한 것입니다. 이 또한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마5:3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충성을 맹세했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할 때 경비대원인 ‘말고’의 귀를 배었던 베드로와는 대조적입니다.

 

73절을 보시면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방 사투리가 있듯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는 것에 놀란 것입니다. 곁에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베드로와 예수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두 세사람의 증인보다 더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도 ‘그 당’이라고 함으로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연대성을 잘 표현하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하여 유대 땅과 갈릴리 땅이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말투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고 생각함으로 약간의 언어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보다 마지막 질문은 더 확실한 증거였을 것입니다. 점점 더 거세지는 위기감을 느낀 베드로는 74절에서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고 하면서 저주 하는 것입니다. 다급해진 베드로는 저주하여 맹세하는 것은 계속해서 “언약의 열 가지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이 관련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 그들이 인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저주하며 맹세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서 부정하면 할수록 강도가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0절에서는 처음에는 한 여종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고, 72절에서는 맹세하면서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74절에서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아님을 그들이 알 수 있도록 부정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선택한 저주 맹세였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시기 위해서 당신님의 목숨을 내어 놓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행복 그 자체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돈과 명예와 권력이 행복인 것처럼 기도하는 것은 참된 제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신 그 사랑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성도가 아니길 소망합니다.

 

저주하며 맹세하고 있는 때에 마26:34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처럼 실제로 닭이 울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75절을 보시면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베드로에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보다는 깊은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뜰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전에 회개해야 할 기회를 놓치고 나서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누가 보고 있습니까? 병행본문인 눅22:61-62절을 보시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예수님께서 몸을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시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그 시선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도록 바라보시는 시선인지, 아니면 배신자로 바라보시는 시선인지. 아니면 연약하고 나약한 베드로에 대한 애처로운 사랑의 시선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 베드로는 ‘심히 통곡’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심히 통곡’한 것에 대해서 병행본문에서는 계속해서 통곡한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슬픔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연약한 마음을 아시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 ‘닭 울음소리’를 사용하십니다. 특별한 신비적인 체험보다 일상적인 것을 통해서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심으로 깨닫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자유함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따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동안 예수님을 향한 충성심이 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 또한 베드로를 나약한 존재로 몰아가기보다는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 뜰까지 왔었습니다. 예수님의 결말을 보고자 했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음을 슬퍼하며 ‘심히 통곡’하였던 것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수양을 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던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는 가운데 마27:1-2절을 보시면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아침이 되자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의논에 대한 결론으로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 사형에 대해서는 로마의 법정에서 해결해야 했던 것이고, 또한 유대인의 폭동을 막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에 대한 마무리를 하고자 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두움에 속한 세력으로 처음부터 예수님의 오심을 부인하였고 늘 어떻게 하면 죽일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가 말하였도다’라고 하심으로 결국 신성 모독죄로 말미암아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하지만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함께 의논’하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로마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끝까지 순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신앙의 생활을 하는 지팡이교회 성도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뜰에서 마지막 결말을 보고자 했습니다. 하인들이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끊임없이 거짓말을 했지만, 결국에는 저주하며 맹세를 하면서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나’했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심으로 심히 통곡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인 베드로는 예수님만 의지하면서 그 길을 벗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시험이 예수님께서 마6:31절에서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베드로를 연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베드로와 같은 상황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성경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하면서 정금과 같이 나올 수 있도록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복하듯이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자신의 재주와 권력 등을 의지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을 사모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비극적인 생황조차도 당신님의 주권적인 계획의 성취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무거운 짐이나 주변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목회자인 저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배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충성스러운 목회자요 성도로서 의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의지했지만 예수님의 한없는 사랑을 안 후에는 성경의 계시된 말씀을 위해서 충실한 사역을 감당한 사도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가신 길을 기억하면서 그 길을 벗어나지 말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백성의 신분인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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