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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4:13-22
강설날짜 2018-07-22

공회의 심문과 사도들의 증거와 고난2(행4:1-12)

 

지난 주일에는 공회의 심문과 사도들의 증거와 고난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같은 주제로 연결하여 은혜의 말씀을 전함으로 믿음이 든든히 세워져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잠시 지난 주 말씀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가던 중 앉은뱅이를 고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성전 미문에 모였습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강설을 하면서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죽인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베드로의 강설을 들었던 사람들은 회개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종교지도자들이 두 사도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걷게 한 일을 통하여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과 권능이 나타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 중에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라고 기록하고 하는 것을 보면 좋은 감정으로 온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전 맡은 자는 사도들을 체포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고,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참고로 지난 주 강설을 보시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백성을 잘 지도해야 하고 섬겨야 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현실주의와 권력에 눈이 멀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아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종교는 현실주의와 권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회개하고 돌이키게 함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한 증거가 강설(설교)에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현실에서 부자와 성공할 수 있도록 설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설교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을 듣는 것입니다. 두 사도처럼 참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간다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앉은뱅이를 고침에도 불구하고 오직 복음만을 증거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종교지도자들이 찾아 온 것입니다. 누가는 분명하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현실주의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온 것입니다. 아마도 각본에 의해서 온 것이고 종교재판을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두 사도를 체포하여 왔지만 날이 저물어 짐으로 다음 날 심문을 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 앞에는 무릎은 꿇지만 백성을 섬겨야 하는 신분임에도 오히려 부귀영화만 탐하고자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권세를 위해서 결국 예수님도 죽여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만을 위한 신앙생활은 결국 종교지도자들처럼 자신을 영원히 죽이는 것입니다. 인생은 긴 것 같지만 나이가 지극하신 분들은 짧다고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도 회개하라고 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두 사도를 체포한 자들은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었지만 심문을 할 때는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종교재판을 위해서 중요한 자들은 모두 모였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을 싫어한 자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법정은 공과 사를 넘어서 진실을 살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심으로 두 사도를 심문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제자들이 전하는 내용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이라고 하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하면 유대인이 죽인 예수님과 공범이기 때문에 쉽게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공회는 자신들이 정말 알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 아니라 기막힌 함정을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한 두 사도는 심문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라고 하면서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권력을 위해서는 열심이지만 앉은뱅이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를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왜 섬겨야 하는지 모르고 오히려 높은 지위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더욱 자신감으로 두 사도는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고 함으로 그들이 질문한 ‘무슨 권위’와 ‘누구의 이름’에 대한 답변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죄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문과 고난을 당함에도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 교회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성취자로서 모든 사람들이 버려지만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심으로 우편에 있도록 하시고,권능과 영광을 홀로 차지하게 하셨으며 만민을 구원하는 기초로 삼았으니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종교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심문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지난 주 말씀에 이어서 아시겠지만 “공회의 심문과 사도들의 증거와 고난”의 강설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의 답변을 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기도 합니다. 먼저 13절을 보시면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심문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함이 있었습니다. 겁쟁이요 배신자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만 제자들에게는 죽음은 영광이요, 하나님 나라에서 평안과 위로를 받으면서 행복을 누릴 것을 알기에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담대함에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이 경악을 한 것 같습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하느냐고 질문한 자들이었지만 담대함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놀랬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할 때는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에서 배움이 없는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함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서 놀랬던 것입니다. 랍비 교육을 받지 아니한 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자신 있게 담대함으로 말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구약 율법 준수에 관해 랍비들의 학교에서 전문적으로 교육 받은 사람과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예수와 함께 있던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을 볼 때 학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신앙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와 선택을 허용하시며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과 대조하면 종교지도자들은 어떠한 자들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 심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두 사도가 예수님과 동행했던 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또 한 가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14절을 보시면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두 제자를 죽이려고 했지만 공회에 앉은뱅이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병을 나은 사람이 바로 거기 서 있었기 때문에 그 기적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리려고 공회를 열었지만 이적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할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에서 제자들에게 눅21:15절에서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지상대명령”과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것을 생각하면 알아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담대함으로 부활과 복음을 증거 하는 두 사도들에 대해서 종교지도자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의논하는 것이 15절입니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그들은 분명한 사실 앞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에 랍비교육을 받은 자 즉 학문이 높다할지라도 성령이 충만한 두 사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회는 재판과 심문이 진행되었던 법정이었지만 나가라고 하면서 서로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무죄를 주장하는 두 사도에 대해서 공회는 오랫동안 의논하였지만 16절에서는 자신들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이 두 사도로부터 나타난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이 곤경에 처할 수 있었던 것이고, 자신들이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에 대한 해답을 주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은 이처럼 ’유명한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처벌을 하면 시민들의 폭동을 두려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타락한 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공회는 의논을 한 후 두 제자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하자고 하는 것이 17절입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두 사도들이 계속하여 가르치면 모든 사람들이 저들의 가르침을 믿을 것임을 두려워하여 위협을 가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종교지도자들은 18절에서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얼마나 중심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종교나 철학 그리고 불교나 이슬람교 등은 즉 유명한 종교라 할지라도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증인에 의해서 예수님을 죽인 죄가 자신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권력과 탐욕을 고수하고자 위협하고 예수님을 증거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두 사도는 감사한 마음이 들어서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겁쟁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베드로와 요한은 더욱 담대함으로 19절을 보시면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사도들은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공회에서 자신들을 심문하고 감옥에 투옥될 수도 있고 결국 죽음을 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권력과 권세보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을 듣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고, 역질문을 함으로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을 덧입은 자로서 든든한 복음의 증인자로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도 비록 오늘날 성도들은 사도의 직분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우선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보다 예배시간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진리를 거스르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잘 전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공회에서 사도들의 선언이요 명령과 같은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믿고 확신하며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용기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까? 두 사도들은 공회원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죽인 죄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른 판단을 내리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20절을 보시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공생애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배운 것을 전부 증인으로 전해야 하는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도 부탁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제자인 사도만이 아니라 신앙 고백하는 성도의 임무입니다. 주님 앞에 메시야로 인정을 했으면 헌신자입니다. 헌신한 사람은 다른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신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을 볼 때 충신입니까? 어떠한 자입니까? 사도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보고 들은 것이 진리임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알았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겁쟁이요 배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헌신자가 되었습니다. 헌신한 사람은 어느 장소가 되었든 복음을 두려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도처럼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세상의 법정에서도 처벌할 것이 없으면 놓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놓아 주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21절에서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회는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위해서 위협을 하면서 놓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공회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했지만 자신들의 탐욕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배를 위해서 복음을 증거 하는 두 사도의 말을 거부하고 협박하는 것은 진실한 종교지도자가 아닌 것입니다.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보다 더 두려운 것은 폭동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전전긍긍하면서도 놓아 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2절에서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두 사도의 권세있는 사역으로 40년 동안 앉은뱅이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이 사람이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이스라엘 조상 세대를 생각나게 하는 예표적 인물로 시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지 말고 새로운 세계인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는 다시 한 번 19절을 보았으면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 말씀은 이방인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던 유대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믿음이 있다 하는 분들에게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말을 행4:1절에서는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과 5절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한 자들과 15절을 보시면 “ 공회에서 나가라”는 자들이고, 21절에서는 “관리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권력자였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지도자요, 보호자요, 책임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성도를 불러 주심으로 성경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과거처럼 지도자를 보내 달라 왕을 세워 달라, 종교지도자들을 세워 달라가 아니라 성도를 통하여 복음을 증거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삶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을 잘 들어보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판단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의 삶에서 오직 예수님만 영광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상대가 누가 되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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