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55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8:26-40
강설날짜 2018-12-02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행8:26-40)

 

오늘날 목회 현장을 보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럴수록 지팡이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교회요, 섬김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는 목회자의 화려한 언변이나 외모보다 성령을 의지함으로 순종해 가야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글을 올린 것을 보면 한 해에 천 개의 예배당이 개척을 한다고 합니다. 그 중에 3개의 예배당이 유지를 한다고 합니다. 그 보다 더한 것은 천 개의 예배당이 개척을 하면 사천 개의 예배당이 없어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지팡이교회는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는 생존에 집중하는 교회가 되기보다 참된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애쓰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가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됨을 상실하면 오늘날과 같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으로 교회가 바르게 존재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순수한 마음과 성령을 의지하면서 눈물의 씨를 뿌리며 순교를 각오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시대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온 누리에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은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가 듣게 됨으로 베드로와 요한 사도를 보내기로 합니다. 두 사도는 사마리아에 도착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사마리아인이든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인보다 더 원수로 생각하는 사마리아인들도 같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협력하여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여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가라지가 있습니다. 시몬이라는 마술사는 사도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이 안수 받는 것을 봅니다. 시몬은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으로 안수하는 방법을 사고자 한 것입니다. 시몬이 사도에게 한 말을 보십시오.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날에도 일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성령은 주님을 믿기로 한 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우리는 성령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기도의 몰입이나 신비적인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그리고 다스림과 지배 안으로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몬이 생각하는 것처럼 늘 체험과 기적이 일어나야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몬과 같이 생각하는 오늘날 시대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서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는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한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돌이키는 자에게는 용서의 마음이지만 그렇지 아니하는 자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이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큰 기쁨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번 주에는 베드로와 요한 즉 두 사도가 중심이었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빌립입니다. 빌립은 특별히 자신이 전도를 해야 할 것으로 누구에게 임명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은 성령의 주권적 지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성령이 임하면”이라는 말씀처럼 복음은 온 누리에 증거 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할 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순교로 복음이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마리아 그리고 온 누리에 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전도는 유대교회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기원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빌립 그리고 사도들 외에 그리스도인이 순종함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빌립이 전한 복음은 사마리아를 넘어 이제는 아프리카 지역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복음을 듣고 고국에 돌아가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전했을 것입니다. 26절을 보시면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가사라는 지역은 아스글론의 옆이었습니다. 아스글론은 과거 이스라엘과 불레셋의 국경으로 삼손의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가사를 지나면 구스, 즉 에디오피아입니다. 가사는 지중해와 가깝고 애굽과 연결되는 마지막 휴게소와 같은 장소입니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물과 음식을 준비해서 먼 길을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사 지역 중에 빌립과 내시가 만난 지역은 광야로 아마도 사람이 생활하지 않는 장소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의 사자가’가 나타난 것입니다. 새로운 선교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초자연적 능력이 가시적으로 개입하시고 있습니다. 주의 사자가 개입하는 것을누가는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26절의 주의 사자, 29절의 성령, 39절의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를 생각하면 누가 한 것입니까?를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증거 됨에 있어서 나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는 광야인 가사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시면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빌립은 순종함으로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만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 시대의 내시가 아니라 그는 에디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은 공직자였습니다. 내시는 대체적으로 오늘날의 재무장관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거세된 자일 수도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왕은 태양의 아들로 숭배되었으며 너무나 신성시하였기 때문에 세상사는 다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상적인 일들은 그의 어머니인 여왕이 하였다고 합니다. 여왕을 뜻하는 것이 간다게입니다. 간다게의 내시에게 주의 사자는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내시는 아마도 유대교를 믿는 자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유대교의 3대절기 중에 예배하러 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회심하지 아니한 자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주의 사자가 명령한 대로 빌립은 바로 그곳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발견합니다. 28절을 보시면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도착해 보니 내시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은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보통일이 아니구나!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더 놀라운 것은 사56:3-5절에서 무엇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고자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라고 약속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성령은 빌립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9절을 보시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6절에서는 ‘주의 사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성령’이 말하십니다. 빌립에 대한 성령 하나님의 지시가 매우 구체적입니다. 누가는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 그리고 온 누리에 전하도록 하시는 이방인의 전도에 대한 당위성 및 필연성을 강조하려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명령을 받은 빌립을 보십시오. 30절을 보시면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한 것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학문이 높았지만 이사야의 글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글을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의 말씀이 강설되지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구원 받기로 예정된 성도만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세상적인 지혜가 있든, 학문적인 지식이 있든, 경험이 많은 자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식적으로는 알 수 있으나 마음에 참된 고백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가치관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의 세계관 그리고 가치관이라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깨달지 못하고 있던 내시에게 빌립은 ‘깨닫느냐’고 한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내시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크게 소리 내어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내시는 31절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고 합니다. ‘지도하는’이란 단어는 미래형으로 언젠가 성경을 깨닫는 것에 매우 관심이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시의 마음을 통해 우리는 이런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내시가 자신의 높은 지위와 학문의 체면에 관계없이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겸손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자하는 열망이 높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강설을 들을 때 이런 태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엡1: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본문을 누가는 구체적으로 32-33절에서 기록합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53장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 메시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가 당하는 고난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신은 고난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내시가 읽고 있는 말씀에서 양이 얼마나 순한지 죽을 장소에 가더라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순종하신 것입니다. 털을 깎는 사람 앞에서 양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비유로 왜 말한 것인지 아십니까? 유대인들은 유목민이었고 나중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양을 비유로 들어서 이야기하면 다른 비유보다 더 빨리 이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헤드린 공회와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눅23:9절을 보시면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라는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들을 통해 빌립은 들었을 것이고, 그것을 쉽게 내시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은 공정하지 못했으며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전한 것입니다. 칼빈은 이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서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으로 말합니다.

 

빌립의 말을 듣고 있는 내시는 34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고 하면서 질문한 것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선지자인 이사야가 당하는 고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내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사야의 글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빌립의 말을 들은 내시는 혼돈이 왔기 때문에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빌립은 35절에서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입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바로 그 구절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면서 메시야가 당하는 고난이라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은 내시에게 메시야의 고난임을 설명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고난 및 부활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했던 것처럼 했을 것입니다.

 

빌립으로부터 복음을 들은 내시는 무엇을 하기 시작합니까? 36절을 보시면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고 한 것입니다. 자기가 마음 한 가운데 간곡하게 예수님을 믿게 된 까닭에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설명을 하던 중 세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시는 예수님을 참된 메시야로 믿는다는 고백을 하는 대신 세례 받는 데 거리낌이 전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반문 형식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성령의 인도는 내시가 세례를 요청한 바로 그 때 빌립과 내시가 광야에서 보기 드문 물이 있는 곳에 도착하면서 또다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38절을 보시면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입니다. 내시와 빌립은 모두 물에 들어가 침례로 세례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 행하는 약식 세례와는 달리 침례를 행했으므로 물이 넉넉히 있는 장소에서 했을 것입니다. 누가가 세례의 장소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에디오피아 내시가 세례를 받을 때 그가 예수님께 순종할 것을 선포한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교회이든, 사마리아 교회이든, 어는 지역의 교회이든 하나의 교회로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계속해서 39절을 보시면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과 내시가 물에서 올라올 때 주의 영이 무엇을 하였는지 아십니까?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 것’입니다. 그래서 내시는 그 이후로 빌립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아마도 빌립의 사역을 마무리 하도록 하심으로 성령께서는 오로지 복음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빌립의 전도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방인의 전도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복음 전도의 시작과 끝의 진행과정을 알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복음의 사역을 다한 빌립은 광야가 아닌 어디에 있습니까? 40절을 보시면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은 그 어떤 대가도 없이 내시에게 복음 증거를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소도’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도 빌립은 복음을 위해 전심전력합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증인들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도록 성령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아소도는 블레셋의 5대 도시 중 하나로 지중해 해변과 인접해 있었습니다. 아스도에서 복음을 전한 빌립은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그곳은 유대지방 안에 로마 정부가 있던 장소였고, 분봉왕인 헤롯은 신전을 짓기도 했던 곳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빌립은 20여년 이상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행21:8-9)

 

지팡이교회는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을 보면서 내가 열심히 전도하면 더 많이 구원을 하고, 내가 열심을 다하지 아니하면 덜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열심이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열심이 절대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열심을 내면 구원받을 사람이 5명에서 100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신앙 생활하는 신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부르시든 우리는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 하면 됩니다. 성령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됩니다. 이상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립의 언변술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내시의 이해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신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입니다. 빌립을 통해 내시를 구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피부색이 달라도 지역과 역사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여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빌립처럼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사용하시어 구원 사역에 동참 하도록 하십니다. 나를 자랑하는 것은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일꾼들을 통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 빌립과 같은 사람으로 지상명령을 감당하도록 하십니다.

 

빌립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위대한 믿음의 선배님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었으며, 특히 에디오피아 내시는 피부색도 달랐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전통적인 유대교적 관념들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오늘날 빌립과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앞장서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124 베드로의 강설 중에 성령을 부어 주심 전은덕 행10;44-48 2019-02-24 465
123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대화를 나누다 전은덕 행10:24-33 2019-02-17 435
122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강설(설교)하다 전은덕 행10:34-43 2019-02-17 493
121 이방인 고넬료가 사도 베드로를 청하다 전은덕 행10:17-23 2019-02-03 421
120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리도록 고넬료를 준비하신 하나님 전은덕 행10:1-16 2019-01-27 481
119 룻다와 욥바에서 기적을 행한 베드로 전은덕 행9:32-42 2019-01-20 1644
118 회심한 바울이 다메섹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은덕 행9:20-25 2019-01-06 695
117 아나니아를 만난 사울의 이야기 전은덕 행9:10-19 2018-12-30 465
116 성찬에 참여하는 지팡이교회를 위해.... 전은덕 고전11:17-34 2018-12-23 326
115 성경이 가르치는 성찬의 의미 전은덕 행2:42 2018-12-16 395
114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울 전은덕 행9:1-9 2018-12-09 765
»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전은덕 목사 전은덕 행8:26-40 2018-12-02 559
112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음? 전은덕 행8:14-25 2018-11-25 307
111 복음이 유대에서 사마리아와 온누리로...... 전은덕 행8:1-13 2018-11-18 322
110 스데반의 순교가 주는 의미 전은덕 행7:54-60 2018-11-11 1033
109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을 마무리하다 전은덕 행7:44-53 2018-11-04 281
108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4 전은덕 행7:35-43 2018-10-28 317
107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3 전은덕 행7:17-34 2018-10-21 258
106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2 전은덕 행7:11-16 2018-10-14 379
105 스데반이 공회에서 강설하다1 전은덕 행7:1-10 2018-10-07 371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