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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3:42-52
강설날짜 2019-05-05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dpfzOs8wOfk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를(3).....(행13:42-52)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길을 동행할 수 있도록 부르심에 감사하면서 강설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복되게 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부르심에 대한 약속과 믿음을 믿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예배당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기에 목회자는 구원의 확신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나의 말이 아닌 성경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로 알기에 계시 의존 사색을 하면서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께 배우지 않았지만,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변증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 계시 의존 사색이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그 방법에 근거하여 세워지는 까닭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연약하지만, 지팡이 교회를 섬기면서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구원입니다. 저만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도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강설은 마치 구조선과 같은 것입니다. 구조선은 생명을 구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는 구조선과 같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영혼의 일용할 양식을 주실 줄 믿습니다. 복음의 강설이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는 것이지, 의인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심으로 구원하여 주시고 성령님이 함께 하시도록 함으로 의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더라고 누가 인도하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십니까? 우리는 그것을 알기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풍성한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시기를 소망하면서 강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같은 제목으로 세 번의 강설을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같은 주제라도 당신님의 언약 안에 있는 성도에게 은혜와 믿음을 강건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말씀을 통해 본향으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생활하는 사람과 관리들 즉 종교지도자들은 선지자의 말을 전하였지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정죄했습니다. 정죄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아시겠지만 죽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면 그 당시와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면서도 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죄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자신들의 권력과 욕망을 위해 이방인의 손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 또한 성경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무덤에 그대로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여러 날” 부활하신 당신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된 제자들과 신자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회당 안에서 구체적으로 강설하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썩지 아니할 모습으로 부활하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으로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바울은 죄 사함의 은혜만 전했습니까? 그것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도록 초청과 경고 즉 권면한 것입니다.

 

회당 안에서 사도 바울의 긴 강설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말씀은 바울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들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습니까? 용납하겠습니까? 거부하겠습니까? 바울이 전한 강설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용납 아니면 거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전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먼저 본문 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그들이 누구인지 아실 것입니다. 바로 바울과 바나바입니다. 강설을 들은 사람들은 그동안 듣지 못했던 메시지라 다음 주에도 돌아와 계속해달라는 초청을 한 것입니다. 그들 중에 아마도 회당장들 일부가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반대 견해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을 다시 초청했다는 것은 사역이 지속될 것 같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 슬픔이기도 합니다.

 

초청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회당을 나가면서(?) 43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의 강설을 듣고 반응이 좋았던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하면서 권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르치고 권고한 결론은 이렇게 배워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잠시도 떠나지 말고 늘 하나님 사랑 가운데 있으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팡이 교회도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42절에서 언급된 바울의 강설을 다시 듣기를 간청한 것과 맞물려 이방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기독교의 새로운 공동체가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바울은 더욱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기쁨도 있고 슬픔도 있지만,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안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의 증인 자가 되어야 합니다.

 

드디어 강설을 전해 달라고 하는 시간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한 주간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거주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보냈을 것입니다. 그 지역의 사람들과 수많은 질문과 토론을 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메시지에 감동을 한 사람들은 한 주간이 어서 지나가기를 고대했을 것입니다. 44절은 바로 그때가 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입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은 안디옥 지역에 놀라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회당에 사람들이 들어오고자 시민들이 애쓴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온 시민이 거의 다’라고 함으로 바울의 메시지가 놀라웠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45절을 보시면 바울이 전한 메시지와 관계없이 그들의 인기에 대한 질투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입니다. 바울이 전한 것에 대해 반박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방도 합니다. 자신들이 더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을 보고 시기한 것입니다. 바울이 비방을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자들의 행동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 당시와 같은 현실이 아닌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바울의 메시지에 대해 거부를 하는 자들은 아마도 ‘장로들의 유전“을 더 중요시한 것 같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홈페이지에서 마태복음 강설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으로 가득하여 자신들의 유대교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똑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비방과 반박을 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믿는 유대교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마도 회당 안에서 비방과 반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46절을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바울은 어느 장소가 되었든지 먼저 복음을 유대인에게 전합니다. 그들이 배척하면 그 도시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신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원 사역에 먼저 우선권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절을 하면 이방인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도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먼저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 아니겠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비방과 반박을 받더라도 흔들리지 마시고 주의 길을 가시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비방과 반박을 하는 유대인처럼 복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브레이크 없는 길이기도 합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과 회개가 있으면 되는 것을 스스로 거절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비방과 반박을 당해도 사도 바울은 언제나 먼저 유대인에게 전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듬직한 일꾼이었습니다. 이런 일꾼이 되도록 우리도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47절에서 자신들의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위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전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전하는 사명은 신적 권위를 강조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인용한 말씀은 사49:6b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전한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과 관련된 것으로 너희들이 거절하면 이방인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예언하신 내용과 연관지어 볼 때(행9:15) 이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에게 적절히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사49:6절을 인용함으로 예언된 내용을 전파하는 증인으로 자신들이 선택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눅2;32절을 보아야 합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할 때 유대인만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는 메시야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제자들과 사도들 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같은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메시지를 들은 이방인들의 반응을 기록한 것이 48절입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이방인이 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들도 그렇게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면 이방인만 구원을 받는 것인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기로 작정한 자‘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나만 구원받았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내가 노력하여 얻는 상급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은 믿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서 기이한 것임을 사도행전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방과 반박이 있었지만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가 두루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49절을 보시면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증거된 복음은 잠시 반짝한 것이 아니라 주의 말씀이 점점 널리 퍼져가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자들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어떻게 합니까? 50절을 보시면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입니다. 바울의 메시지는 놀라운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비방과 반박을 넘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늘어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생활하는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하고 그 지역으로부터 떠나도록 한 것입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활동한 것입니다.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들과 대항하지 않고 51절을 보시면 어떻게 합니까?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입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추방하는 자들을 항해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립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눅9:5절과 10:11절의 말씀대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따른 것입니다. 이런 행동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읽고 있지만 욕보다 심한 경고입니다. 비방과 반박을 하는 자들은 이러한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로서 이방인들의 지역으로부터 나올 때 행하는 풍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실망하지 마시고 힘을 내십시오. 이후에 그곳을 떠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부터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간 것입니다. 비방과 반박으로 쫓겨난 두 사람은 그럴수록 기쁨과 성령이 넘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입니다.(52절) 고난 중에도 기뻐하는 성도의 진실한 신앙을 보여주는 것으로 세상의 어떤 박해나 핍박에도 성령이 주시는 충만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두 사람만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기로 작정한 신자들도 같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비방과 박해를 하는 그들과 달리 복음을 듣고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와서 그들이 전한 진리의 말씀을 더 듣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끝까지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것이 오늘날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듣고자 하는 자들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아니라 같은 복음을 오늘날 우리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변하지만, 복음은 변하지 않고 구원으로 초대하고 권면하십니다. 우리는 같은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우리와 공통점은 하나님으로 제자 즉 성도요 교회로 부르심을 받아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명령을 통해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과거의 유대교와 같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큰 작용과 큰 경영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의 종교로 타락한 것이 유대교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타락하면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기독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기독교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개독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 만들어 버린 것입니까? 믿는 사람들 즉 가짜 그리스도인 아니겠습니까? 이런 시대에 지팡이 교회는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복음만 증거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메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회 개혁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은 전하지 않고 사회 개혁을 전하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강설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종교적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러한 형식과 의식으로 종교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지를 통해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렸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보다 너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약속된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상속자로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참되게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열심히 기도하면 물질적인 복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생에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가짜입니다.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이는 시대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과거이든 현재이든 미래이든 사도 바울과 동행했던 성령께서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로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함을 받고 있는 지팡이 교회는 비방과 반박을 당해도 새 생명을 주려고 하시는 일에 증인이 되는 길을 가기를 소망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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