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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4:8-18
강설날짜 2019-05-19

루스드라에서 전도(선교)하는 사도 바울과 바나바(행14:8-18)

 

지팡이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 주신 성경을 믿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주신 당신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통해 구원으로 하나님의 백성 즉 당신님의 성도를 부르시고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십니다. 구원에 초대를 받은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이 청결할 수 있도록 성경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으로 초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처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외적 경건에 머물러 있는 것은 성경의 참된 말씀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성도로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3: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예배당이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성도가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으로 초대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서 마음이 청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외모로 경건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구원도 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을 알기 위해 나의 지식과 지혜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설로 듣고자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복 있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교회로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마음이 청결할 수 있도록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소망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도덕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리고 의로움을 얻기 위하여 도덕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은혜에 감사함으로 자발적으로 도덕법을 지키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의 인생 여정을 보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안 후 늘 선교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한 것처럼 바울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봉사자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바울교’가 아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말씀의 사역자였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으부터 이고니온에 도착한 바울은 역시나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복음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는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도록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훼방을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했던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오랫동안 있으면서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럴 때 두 사람이 전하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악감”을 가지고 바울과 바나바를 공격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하여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서로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하면서 전하였습니다. 그런 후 바울과 바나바는 “루가오니아”지역으로 이동하여 한결같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계속해서 “루가오니아”에서 일어난 것을 계속해서 강설로 듣겠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전처럼 복음을 전하였지만, 선교 여행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건이 있었겠지만, 사도행전의 누가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그 사건은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 즉 앉은뱅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입니다. 루가오니아에 속해 있는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이일로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오해하고 섬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럴수록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증인 자다운 자세입니다.

 

태어나면서 선척적으로 발을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질병은 사람의 힘으로 고치기 힘들다는 것을 각인하여 준 것입니다. 발이 있으나 무기력하여 의학과 세상의 신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것입니다. 치유할 수 없는 것이지만, 오직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로 보입니다. 이 사건은 마치 행3장에서 베드로가 행한 기적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했던 기적을 이제는 바울이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각함으로 바울도 베드로처럼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걸을 수 없던 앉은뱅이는 바울을 어떻게 바라보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그에게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9절을 보시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앉은뱅이가 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강설을 듣지만, 그냥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앉은뱅이와 같은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듣는 것이고,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듣는 것입니다. 열심히 계속해서 바울의 말에 ‘진실로 그렇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간략하게 ‘듣거늘’이라고 했지만 원어적인 의미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의 진심을 본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본 것입니다. 참으로 독특한 표현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령께서 바울에게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성령은 바울이 앉은뱅이의 행동과 마음을 눈여겨보도록 하심으로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발견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이방인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에게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믿음’을 본 후 10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마치 예수님처럼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9장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일어나 침상을 가지고 가라”는 말씀처럼 바울도 명령한 것입니다. 어떻게 바울이 말했습니까? ‘네 발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앉은뱅이였던 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이처럼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이방인 전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소유한 앉은뱅이는 ‘뛰어 걷는’ 것입니다. 걷는 것은 당연하고 뛰기도 했다는 이 표현은 구원 곧 치유가 바울의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정상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무조건 기적을 바라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행하신 것입니다. 또한, 유심히 구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이 사건은 말씀과 능력이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 없이는 기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행3장에서 나오는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드로가 기적을 행했습니다. 같은 기적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을 보았지만, 성전미문에서의 기적은 믿음을 본 것이 없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통해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데 성전미문에서 일어난 기적은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단지 한 것은 구걸이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떠한 대가를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음으로 구원을 얻은 성도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이처럼 위대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인도하여 주실 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본 무리를 보십시오. 11절을 보시면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라고 합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눈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이방인들은 목소리를 높여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자국어 즉 방언(루가오니아)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설이 여기서 또 한 번 실현되는 영광을 우리가 보게 되었구나’로 생각한 것입니다.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자신의 지역에 내려왔다는 신화에 근거한 것입니다.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 신이 인간의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믿음은 보편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자신들의 방언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으로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친절하게 누가는 12절에서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한 사람은 풍체가 당당하니까 저 사람은 “제우스”로 생각한 것이고, 또 한 사람은 말을 잘하니까 “헤르메스”로 생각하면서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한 것입니다. 제우스는 헬라 신화에서 모든 신의 우두머리로 묘사되어 있으며,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요 대변자로서 언어를 지배하는 신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였지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반응을 본 것입니다. 13절을 보시면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입니다. 성문 밖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은 급히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와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 앞에서 제사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도시는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루스드라는 신전이 성 밖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신전과 제사장이 있었다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이 연약한 사람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황소와 꽃다발을 이용하여 제사를 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이 전파되지만, 자신의 것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이교들이 하는 것과 같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바울과 바나바는 어떠한 행동을 합니까? 14절을 보시면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이야기할 때는 잘 모르다가 제사를 하고자 하는 행동을 보면서 그들이 잘 보이는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서 옷을 찢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들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제사를 중지시키고자 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옷을 찢고 들어간 바울과 바나바가 소리 질러 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5-17절입니다. 먼저 15절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가장 먼저 한 말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하면서 우리도 당신들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들과 같은 존재요, 본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말 속에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등의 이방교의 신에 대한 개념으로 구성한 것은 참된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돌이킴으로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도록 연설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하는 제사의 행위는 ‘헛된 것’이지만,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은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잘못된 신관을 가진 그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합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잘못된 신관이면서도 어떤 자들에게는 물질 욕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타락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16절에서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라고 함으로 행17:30절과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입니다. ‘방임하다’라는 동사와 ‘간과하다’라는 동사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방임하고 간과한다는 것은 각 종족이 자기 뜻대로 우상을 섬겨도 죄 없는 것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역시 자연 계시 즉 일반적인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변명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연을 통해 신은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그분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알지 못하는 시대’는 1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지나간 세대’로 이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는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고 간과’를 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책임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의 가치관, 세게관, 종교적인 마음 등을 그냥 두셨지만, 이방인이라도 이제는 심판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 너희들의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러한 것이 바로 강설로 증거돼야 합니다.

 

바울은 17절에서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에(자신) 대한 증거를 열방 나라에 남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아! 인생의 본성의 빛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현상에 의해서 너희도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핑계를 대지 말고 ‘돌이키라’입니다. 바울은 롬1:20절에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가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장로교가 신앙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장 1절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연계에서 오는 지식과 창조, 섭리의 역사가 하나님에게 대하여 보여 주는 바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善)과 지혜(智慧)와 능력(能力)에 대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인류는 도피할 수 없다”입니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자연을 통해 결실과 추수를 하게 함으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유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사람이라도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도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강한 연설은(강설) 자신들이 신이 아니라는 증거를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선천적으로 앉은뱅이를 기적으로 고친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하면서 제사를 하고자 하는 루스드라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시킨 것입니다. 그것도 ‘겨우’라는 표현을 하는 것을 보면 대단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것처럼 하는 행동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처럼 모세의 율법을 주지 아니했습니다. 율법을 주지 않았지만, 자유롭다가 아닙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는 본성이나 자신의 양심이 율법이 되어서 그 마음의 생각들이 서로 송사하거나 서로 변호해 가는 것이 바로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을 통해 하나님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조상들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제우스와 헤르메스에 대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전설에 따르면, 한번은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인간의 세계에 내려온 것입니다. 그들은 숙소를 구하는 사람들로 변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천 여 가구를 두드렸지만, 아무도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짚과 갈대로 지어진 초라한 오두막에서 한 노부부 빌레몬과 바우시스가 흔괘히 그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양식을 다해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감사로, 그 신들은 그 오두막을 금 지붕과 대리석 기둥들이 있는 신전으로 변형시켰습니다. 그들은 빌레몬과 바우시스를 그 신전의 사제와 여사제로 임명했으며, 그들은 죽지 않고 참나무와 보리수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냉대했던 사람들에 대해, 그 신들은 그들의 집들을 부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알기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오해하여 제사하고자 한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것을 보고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형상으로 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바울과 바나바는 적극적으로 연설을 하면서 자신에게 제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처럼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성정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방해물은 모두 허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물질이든, 욕심이든 그 외의 것이라도 허물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오늘 본문을 통해 선천적으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바울이 치유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앉은뱅이 사건은 무지한 사람들의 눈을 밝혀서 참되신 신이 누구신가를 알도록 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 누구시며, 참된 신이 누군가를 알도록 한 것입니다. 이전까지 전했던 방식과 달리 특별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바울은 앉은뱅이 치유 사건에 대한 루스드라 사람들의 오해를 기회로 더욱 확실히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섭리가 그 시대처럼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상한 방법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연습하기도 하고, 병을 고치는 연습도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모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길 때 실제로 하는 행동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은사들의 독특한 특성과 특별한 능력으로 인해서 교회 즉 신자들을 많이 모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은사 등을 받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것을 받은 사람들을 남다르게 보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자신을 높이는데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봉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기 때문에 분명히 선하며 인간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익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은사를 받은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바나바처럼 참된 믿음을 소유한 성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자신의 능력과 은사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을 주신 분,그 은사를 주신 분,바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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