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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5:13-21
강설날짜 2019-06-16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ovifZoEL...e=youtu.be

예루살렘 공회의 의장인 야고보의 연설과 결정(행15:13-21)

 

길거리를 걷다 보면 000예배당 이름이 눈에 잘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예배당 이름은 좋지만 참된 교회가 아니라 사이비와 이단들일 때 큰 실망을 하기도 합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교회처럼 보이지만 겉과 속이 다른 곳도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신앙생활을 할 때는 이단에 대한 강설과 성경공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에 세상을 분별하는 신앙인이 돼야 합니다. 한글로 사이비라면 잘 모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자어로 似而非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닮을 "사"자에다가 접속사 "이" 그리고 아닐 "비"를 써서 사이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이비라고 하는 것은 닮아있지만, 아닌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치 진짜처럼 보이는 "짝퉁"과 유사한 것입니다. 이단은(異端) 다를 “이”와 끝 “단”자를 사용합니다. 끝이 다르다는 뜻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서 “정통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의(리)나 교파를 적대하여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사이비와 이단은 겉의 모양은 교회이지만,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거짓과 같은 짝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결국 목회자를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가지고 생명의 길, 하나님 나라로 인도한다고 하지만 자신을 위한 교회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교주”라고 합니다.

 

사이비와 교주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순결성을 유지해야 하는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맘몬교회를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은 성경적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맘몬교회를 위해 성경 외의 것으로 성공을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맘몬교회을 위한 목회는 신자들을 불신앙의 길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예배는 쇼가 아닙니다. 연예오락을 이용하여 예배하는 것도 성경적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면서 ‘박수’를 받는 것이 과연 예배입니까? 음악을 통해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 그런 식의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쇼가 아닌 말씀의 강설을 듣고자 합니다. 강설을 듣는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필요한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주 강설을 기억하십니까? “예루살렘 공회의 소집”이었습니다. 공회의가 열릴 수 있도록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었습니다. 보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어떤 유대인들 즉 기독교로 개종을 한 바리새인 중에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은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한 문제는 이방인 복음이 확장되는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공회의가 발의가 되었고 소집도 되었습니다. 공회의장 안에서는 이방인의 구원을 가지고 변론과 토론을 하면서 논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일어나 형제들아’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말에 많은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과 예루살렘 교회도 잘 알고 있는 고넬료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고넬료는 복음을 믿을 때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은 믿음으로 당신님께서(하나님) 차별 없이 깨끗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유대인 즉 개종한 바리새인들이 외적인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베드로가 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라고 함으로 너희들의 주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이방인 구원의 문제로 인하여 변론이 많았지만 베드로의 연설은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를 통해 베드로가 무엇이 하나님의 참뜻인지 알 수 있도록 한 결과였습니다. 바로 그 때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전하였습니다.

 

오늘 지팡이 교회는 “예루살렘 공회의의 의장인 야고보의 연설과 결정”을 듣고자 합니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많은 변론이 있는 가운데 사도 베드로의 연설 그리고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야기를 들은 야고보는 13절에서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의장의 말에 모두 집중했을 것입니다. 요셉푸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유대 율법을 엄격하게 지킨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유대인이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아마도 유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차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공회의에서 일어난 일들을 잘 알고 있는 야고보는 의장으로서 이제 연설을 하면서 결정을 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이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그들을 돌보신 것을 시므온이 말하였으니” 이 말씀은 베드로의 연설에 대한 요약이면서 획기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돌보다’는 동사와 ‘백성’이라는 명사입니다. 두 단어 모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개입할 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돌본 일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주시고 돌보아 주신 것을 기억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바울과 바나바가 행한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야고보는 그러면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이라고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방인에게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15부터-17절까지 성경의 구절을 인용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바나바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자신들이 새롭게 만든 사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선지자들을 시켜 하나님께서 예언한 것임을 알도록 암9:11-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용함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이 문제를 확실하게 결정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어떻게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새신자들이 어떻게 들어왔느냐보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생각하면서 복음의 증인자다운 삶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시므온’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히브리식 옛 이름으로 야고보와 친분이 깊다는 의미와 이방인들도 할례와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에게 베드로는 히브리인이요 사도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도성과 그가 연설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선지자들의 말씀’이라고 함으로 너희들은 들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서 본문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만 이방인들을 편입시킨 일을 변호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후 그들에게 가나안 지역을 주심으로 온누리에 복음을 전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만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죄는 막중함으로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야를 보내어 주심으로 구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모스 선지자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고 예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들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야에 의해 재건된 세계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는 것임을 전한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이라고 함으로 야고보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일컫음을 받는 백성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구약시대에서부터 열려 있었음을 다시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게 되는 목적이 모든 이방인이 주를 찾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여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기독교인 됨이 구약의 예언 성취임을 드러낸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증거로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함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정당성이 구약의 예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례와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형제들이든, 무방하다는 형제들이든 이방인이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된 것이 아님을 18절에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계획하셨으며 역사 속에서 이것을 알려 오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야고보의 말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구절입니까? 창12:3절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누구든지 구원의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구약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 사업을 지속해서 해 오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야고보는 일방적으로 할례와 율법에 대한 준수를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유대인들이 그동안 해 왔던 신앙 관습에 따라 율법을 여전히 지키는 유대인 신자들의 정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라도, 무시하는 것은 문화적인 충격을 줌으로 복음이 확장되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의장다운 지혜로운 모습으로 중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말을 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라고 함으로 이방인들이 개종을 할 때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요하는 주장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베드로와 바울과 바나바가 하는 사역은 하나님의 뜻임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우월감을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에게 20절에서 어떻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까?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방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도록 편지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이방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 관습은 유대교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도록 함으로 서로 이해하도록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이 그것들을 계속하면 제사, 절기, 부정한 음식, 의식적 규정들을 여전히 지키는 유대인이면서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신자들이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요구하는 것들이 이방인에게는 무리한 것입니까? 서로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신자들이면 새로운 법에 따라야 합니다. 서로가 존중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제 자신의 결정을 호소하면서 21절에서 마무리합니다.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앞에서 말한 것을 서로 유의하며 하나님께 영광의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성도님, 야고보의 결론은 회의에 참석한 모든 신자에게 최선의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누구도 더 이상의 변론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회의의 의장을 잘 수행한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의장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모든 신자가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지팡이 교회도 목회자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좋은 교회로 성장하기를 소망합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며 각 개인의 시민권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확정하였습니다. 이로써 교회가 이방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로 나누어지지 아니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 회의에서 서로 다른 견해가 있더라도 그들의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서로가 세워가는 것입니다. 공회의의 의장인 야고보는 모든 의견을 경청한 후 연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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