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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1:1-9
강설날짜 2019-12-15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바울(행21:1-9)

 

지팡이 교회는 이 세상이 표현하기 어렵고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 백성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로서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통치를 받는 교회는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의 행위로 무엇인가를 드러내고자 하기보다 성경의 가르침과 새 언약에 근거한 공동체로서 날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는가를 고민해야 보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교회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하나의 예배당이 두 교회로 나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는 세상의 법정을 통해 자신들을 위한 다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세상의 가르침을 외치고 있는가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 나라의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정부 그리고 정치가와 손잡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은 이단과 다른 것입니다. 이단은 구별하면서도 교회가 타락되어가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교회가 은혜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백성이므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구원과 필요 없이 자신을 위한 안심보험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는 말은 듣는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성경을 통해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하루 품삯처럼 계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비유처럼 은혜는 처음 온 사람이나 나중에 온 사람이나 따지지 않고 공평하게 주는 것입니다. 은혜는 세상 적으로 계산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런 시대에 공평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은혜를 강설을 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주 강설을 통해 오늘 말씀을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 강설한 후 개인적인 모범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여 주신 것처럼 에베소 교회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 든든히 그리고 거룩하게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업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핵심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는 교회는 세상의 단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기관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의 열쇠가 없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은 이 말을 꼭 기억해야 했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 에베소 교회는 어떠합니까? 참으로 비극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교회를 위해 어떠한 신앙인이 돼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개인적인 모범을 위해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신 있으면 고별 강설에서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를 보면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열 가지 은혜의 언약”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의 강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됟돌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백성임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 사역을 위해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자신이 쓸 것과 동행들에게 필요한 것을 충당하기도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와 오늘 우리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어 주신 것처럼 교회도 같아야 합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모범을 이야기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이별이었기 때문에 절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작별 인사를 기도로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무기이며 힘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잘 알고 있는 장로들은 애절한 기도로 바울을 생각했을 것이고, 자신들이 앞으로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바울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장로들은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전송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환송을 받을 수 있는 일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서 어떻게 사역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사도로서 자신의 사역을 다 했으며, 장로들은 겸손과 눈물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피로 사신 에베소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도 같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3차 전도 여행의 핵심지인 에베소를 떠난 바울은 주후 57년 초기에 이방인 교회들이 모은 헌상(연보)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일행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특히 21장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부터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결국 로마로 가는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행21:13절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입니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많은 재물과 권력 등을 가지고 누렸던 왕들도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죄의 삯은 멸망이라는 것처럼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영원한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밀레도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소아시아 해변을 끼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바울의 여행을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입니다. 누가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어려웠는가를 강조한 후 이동 경로를 기록했습니다. 언급된 장소들은 하룻길 거리와 밤 동안의 정박지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도착한 장소는 밀레도에서 약 7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고스입니다. 이곳은 히포크라테스의 고향입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 시대 의사이고, 의학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의학의 아버지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로도로 장미의 섬으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리 중 하나로 알려진 태양의 상징 아폴로 신상이 크게 서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바다라는 장소로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이동했습니다. 2절을 보시면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입니다. 베니게는 팔레스타인 북쪽 두로나 시돈이 위치한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아마도 배를 갈아타고 이동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후 3절을 보시면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 구브로는 바다와 두로의 중간 지점에 있는 지중해 섬으로 과거에 바울과 바나바가 바보에서 바예수의 훼방을 물리친 장소이기도 합니다.(행13:4-12) 그런 후 바울은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 도착합니다. 대표적인 이교 도시로 번영과 부패로 알려진 장소였습니다. 또한, 구약과 신약에서 책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누가는 이곳에서 바울이 짐을 풀려 함이라고 기록합니다. 긴 여행이었기 때문에 잠시 휴식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바울은 여행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사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성령이 알려졌기 때문에 알고 있었습니다. 두로는 행11:19절에서 알려준 것 같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세운 교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곳에서 신앙생활 하던 신자들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신자들 즉 제자들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제자들을 만나고자 수소문할 정도면 대략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재촉을 했지만 7일 동안 머문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에게서 들은 소리로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성령으로부터 감동하여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제자들도 성령의 감동하여 말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면 오해를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생겨난 결과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받게 되리라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제자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중단하도록 만류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을 통해 더 확실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야 하는가를 알았을 것입니다.(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바울은 아무 말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이 두로에서 이동을 합니다. 5절을 보시면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입니다. 이 글을 읽어보며 뭉클합니다. 바울의 여정을 알고 있는 신자들은 밀접한 형제와 자매 같습니다. 7일 동안 머문 도시였지만, 이별은 밀레도와 비교하면 그보다 못하지만 애절했습니다. 아내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동행하여 바울을 전송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전송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로에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소규모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여행을 위해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서서 기도해도 좋지만, 마지막 이별을 알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은 더 애절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고난에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기도가 끝난 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6절을 보시면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입니다. 이별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신앙은 가족과 같은 것이기에 슬퍼하면서도 왜 믿음의 생활을 해야 하는가를 다짐했을 것입니다.

 

두로에서 출발한 바울은 둘레마이에 도착합니다. 7절을 보시면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둘레마이는 오늘날 아코 시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구약에서는 악고로 알려진 도시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바울은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하루를 보냅니다. 이곳도 역시 복음이 전파된 장소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복음은 널리 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만 있었던 복음이 스데반의 순교로 퍼진 것을 보면 놀랍기도 합니다. 둘레마이에서 하루를 보낸 바울은 어디로 이동했습니까? 8절을 보시면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어디였습니까? 가이사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사건을 알게 됩니다. 행8장에서 사라진 빌립의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 도시는 규모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행정 장관이 거주하는 수도였습니다. 사실 이곳은 바울이 다시 방문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우리는 빌립에 대한 정보를 여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던 빌립이 가이사랴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가이사랴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빌립은 딸들이 네 명 있었습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구약에서 보면 대체적으로 남자 선지자들만 예언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약에서 그것도 한 집에서 네 명이 예언하는 가족이었습니다. 그것도 결혼하지 않은 처녀였습니다. 요엘이 예언한 가운데 여자들도 예언한다는 것은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신 결과이고, 오순절에 성취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여인들이 어떠한 은사가 있었는가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처녀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빌립의 가족은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었던 파피아스의 말에 의하면, 빌립과 딸들은 몇 년 후 소아시아의 히에라폴리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 딸들 가운데 오랫동안 생존하여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었던 사건이나 인물들에 관한 자료들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저와 같은 생각이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위험이 오더라도 또한 그것을 알더라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죽음을 알고 있는데 순교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른 길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급 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도였습니다. 밀레도에서 그리고 두로에서 예언은 오히려 사도 바울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생각할 때 미친놈입니다. 이미 바울은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은 “성령에 매임을 받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었습니까? “나의 얼굴을 다시 못 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바울은 어리석은 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온 누리에 복음이 펴질 수 있도록 순교를 감당한 위대한 사도요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과 환난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불러 세웠는가를 인간의 마음이지만 알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을 가는 여행은 더 긴장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우리가 바울처럼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알도록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지고 있는 은혜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면서도 바울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을 더 견고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보다 신앙인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을의 믿음은 결국 로마가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당신님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신 것처럼, 바울도 예수님의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바울 역시 예수님의 마음처럼 자신을 희생하여 유대인과 이방인과 벽을 무너지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오후에 교회론을 통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주는 예루살렘으로 더 가까이 가고 있는 바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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