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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1:27-36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히다(행21:27-36)

 

지팡이 교회는 벨기에 신앙고백서를 아실 것입니다. 대부분 신자는 벨직 신앙고백서로 알고 있습니다. 대체로 신앙고백서는 작성된 장소의 이름을 사용하여 부르기 때문입니다. 런던 신앙고백서, 프랑스 신앙고백서, 독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영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 나라와 지역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처럼 벨기에도 같은 것입니다. “벨기에”라고 하는 것은 벨기에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서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각 신앙고백서는 그 지역마다 독특한 고백이 있습니다.

 

벨기에가 독립하기 전 그들은 네덜란드에 속한 지방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무적함대인 스페인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시대였습니다. 그때 귀도 드 브레가 작성한 것이 벨기에 신앙고백서입니다. 귀도 드 브레는 부모님에 의해 카톨릭 신자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종교개혁은 귀도 드 브레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547년 개신교로 개종했습니다. 오늘날 카톨릭 신자들도 신앙고백서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벨기에 사람들이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을 했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하여튼, 귀도 드 브레는 여러 나라에서 공부했습니다. 또한, 카톨릭에서 개종을 한 후 귀도 드 브레는 목사의 신분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망명 생활도 했었습니다. 망명 생활을 마친 후 귀도 드 브레는 고국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치열한 삶의 생활에서 귀도 드 브레는 신앙고백서를 만듭니다. 귀도 드 브레는 신앙고백서를 통해 “개혁신앙의 신봉자들은 기소된 것처럼 반역자들이 아니라, 성경 말씀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 교리를 고백하는 법을 지키는 사람들”임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1567년 그는 교수대에 매달려 순교를 당합니다. 그의 순교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작은 시작이었지만, 개혁신앙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지 100주년이 넘었지만, 신앙고백서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한국인의 신앙고백서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벨기에에 귀도 드 브레가 있을 수 있도록 신약시대에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로 인하여 복음이 종교개혁 시대에도 전달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아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들 그리고 신자들은 순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도 같은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길 즉 십자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처럼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든, 종교개혁가이든 참된 신자의 삶은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주님의 사람입니다. 신앙고백서를 보아도 편안한 삶의 결과물이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잡히다”라는 강설을 듣습니다. 오늘 말씀을 알기 위해 지난주 강설을 잠시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지금까지 다섯 번째 방문이지만, 다시는 방문할 수 없는 마지막 길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순교도 알면서 이런 길을 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길은 주님의 사랑을 위한 푯대의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향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형제들이 영접했습니다. 아마도 나손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환영을 받은 바울은 이튿날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 모든 장로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외 사도들은 왜 없었는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지역으로 출타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토록 도착하고자 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방인 사역을 어떻게 한 것을 낱낱이 보고했습니다.

 

낱낱이 보고한 바울은 귀한 대접과 환영을 받아야 했지만,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 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수만 명이라고 하는 것은 구름과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을 이야기하는 표현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율법에 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옛것을 모두 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쁨도 있었지만, 오해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해로 인하여 바울에 관한 이야기를 야고보와 장로들이 전달한 것입니다. 누가는 왜 그런가를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차분하게 강설로 듣고 있는 지팡이 교회는 그것이 아닌데 하며 개종한 유대인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바울에게 말한 그들은 “어찌할꼬”합니다. 바울이 온 것을 개종한 유대인들이 들으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묘안을 내어 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고 합니다. 나실인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하니 서원한 사람들의 비용도 부담하고, 정결 예식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율법을 지키는 바울이라는 것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서원한 자들처럼 머리를 깎음으로 유대인들이 오해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에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이방인들에 관한 결정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이방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해가 생기지 않게 하려고 무엇이라고 기록했습니까?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입니다. 개종한 유대인이라도 율법 준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바울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런 문제는 구원과 관련이 없으므로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이 심어질 수 있도록 대승적 차원에서 결단해야 합니다.

 

바울은 참된 기독교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를 신봉하는 개종한 신자들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다 포기하고 가르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장로들은 유대법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바울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나실인을 서원한 네 명과 7일 동안 결례를 한 후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을 지키어야 한다는 자들에게 어떤 효과가 있었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일로 인하여 바울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 오순절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또한, 바울이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기 위해 오늘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그 이레가 거의 차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말한 홍보 전략의 실패라고 생각됩니다. 아시아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아마도 에베소에서 온 자들로 생각됩니다. 바울이 결례를 한 행동은 오히려 또 다른 신자들에게(디아스포라 유대인) 빌미를 잡힙니다. 바울이 7일 동안 정결 예식을 마친 후 뜻하지 않은 무리와 만나게 됩니다. 성전에서 나실인과 함께 참여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격한 감정으로 흥분하였습니다. 그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즉 에베소에서 이방 종교인들이 일으킨 소동을 묘사하는 단어와 같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바울을 죽이려고 소동을 일으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28절을 보시면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무리를 충동하여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르며 바울을 고발합니다. 고발한 내용은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민 백성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과 성전을 거스르는 내용을 가르쳤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그들은 바울이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하며 지속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성전에는 유대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과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바깥 뜰’ 즉 이방인의 뜰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뜰’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사형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바울이 규정을 어길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두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경고문까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자들은 29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고향 도시의 이방인 드로비모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드로비모를 이방인 뜰에서 이스라엘의 뜰로 데리고 갔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랍비였기 때문에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바울을 곤경에 처하도록 하는 비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적대자들이 선동하기 위해 외친 소리가 사실의 목격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29절을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 전에 바울과 드로비모가 예루살렘 시내에서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전에서 바울을 보자 소동하여 드로비모와 함께 이스라엘의 뜰로 들어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휘장을 찢으심으로 당신님을 통해 구원이 있다는 것을 증거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는 성전이 더 중요했습니다. 성전이 구원하여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곳에만 있다면 구원은 아주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전을 주신 참된 의미를 몰랐던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로 인하여 무리가 충돌하여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전 뜰 즉 이스라엘의 뜰에서 붙잡혀서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를 끌고 성전에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30절입니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 무리를 충동했던 그들은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선동은 매우 과격하고 비이성적이었기 때문에 자초지정을 듣지 않고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이스라엘 뜰 안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면 성전을 더럽히게 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성전 문들이 곧바로 닫혔습니다. 성전 밖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고 바울을 어떻게 하고자 했습니까? 31절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온 예루살렘이 요란하다는 소문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들리매” 죽이고자 했습니다. 법정에 세우지 않고 즉결심판을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의 선동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도 성전에 대한 것이 더 중요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성전을 중요시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분명하게 모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내에 소동이 일어난 것이 천부장에게 들어갔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할 때 다행히 천부장이 개입했습니다.

 

천부장의 개입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신의 한 수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32절을 보시면 “그가 급히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거느리고 달려 내려가니 그들이 천부장과 군인들을 보고 바울 치기를 그치는지라”입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가운데 해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구원하심으로 그를 로마로 보내기 위한 섭리입니다.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하는 세상 가요가 있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해야 합니다. 부하들이 천부장이 있는 곳에 바울을 데리고 도착했을 때 천부장이 한 행동과 말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33절을 보시면 “이에 천부장이 가까이 가서 바울을 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라 명하고 그가 누구이며 그가 무슨 일을 하였느냐 물으니”입니다. 천부장이 한 행동은 바울을 잡아 쇠사슬로 결박한 것입니다. 천부장은 법을 집행하는 장교였습ㄴ디. 천부장의 역할은 폭동의 원인이 되는 자를 그의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체포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결박된 후(아가보가 예언한 것이 이루어짐) 천부장은 군중에게 설명할 이유를 질문합니다.

 

천부장이 바울에게 질문을 헀지만,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34절을 보시면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는 이런 말로, 어떤 이는 저런 말로 소리 치거늘 천부장이 소동으로 말미암아 진상을 알 수 없어 그를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니라” 무리가 서로 나뉘어 서로 다른 말로 소리쳤습니다. 무리가 매우 소란스러운 가운데 여러 가지 말을 했기 때문에 천부장은 그 사건의 실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큰 소리로 때문에 바울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천부장은 어디로 데려가라고 명령합니까? 위험을 느낀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고 한 것입니다. 영문 안으로 데리고 간 것은 사람들이 그 안까지는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문은 천부장이 주둔하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천부장의 명령이 내려진 가운데도 어떠한 상황이었습니까? 35절을 보시면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여기서 층대는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에서 천부장이 주둔하고 있는 연문 안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그 돌계단에 이르렀을 때 무리는 극에 달하여 바울은 군인들이 바울을 손으로 높이 들어 올려서 영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폭동은 이처럼 바울을 어떻게 하든 죽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는 외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장 잘 알아야 하는데 현실은 가장 모릅니다. 오늘날 어쩌면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마지막 말씀인 36절을 보십시오.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무리의 폭행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찡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결례를 행한 사건이 있고 난 뒤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로마인들에 의하여 구출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아시아에 온 유대인들에 의해 일어난 사건을 통해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일어난 이야기는 결국 폭동으로 변화였습니다. 바울이 죽을 수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천부장을 이용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천부장에 의해 구출된 바울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로마로 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복음이 들어가 온 나라로 전파되도록 하기 위한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당신님의 계획대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율법의 정신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것을 자신의 노력으로 지키면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통해 의를 얻는다거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을 주시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선하신 뜻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결국, 율법은 하나님께 당신님의 백성을 연결하여 주신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하나님과 직접 연결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신뢰를 받으며 성도의 교통을 누립니다. 이렇게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초대를 하십니다.

 

이것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바울을 로마로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잡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면서 복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독자인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사명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풍부하고 놀라운 심오한 비밀의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 전달하고자 그는 최선을 다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이러한 마음이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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