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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2:22-30
강설날짜 2020-02-16

바울이 천부장에게 나는 로마의 시민권자라...(행22:22-30)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유기체요 조직체인 교회입니까? 오늘 오후 모임에서 유기체와 조직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시간을 기다려 주십시오. 하여튼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교회입니다. 자신의 삶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질문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물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착취를 하는 것은 언약의 열 가지 말씀 즉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것(물질 등)을 이웃을 위해 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부자 청년처럼 재물일 수 있고, 자신의 욕망, 권력 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은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 재산은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경영해 나갈 힘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재물은 어떠한 힘으로 생각하십니까? 부자 청년처럼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힘으로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길을 걷고 있는 지팡이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만 소망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지난주 강설을 기억하십니까? 제목이 길어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아니아를 만난 이야기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끄심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다른 분을 통해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당신님의 섭리로 교회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참된 사역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아나니아를 준비하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여호와 이레”입니다. 아나니아는 유대인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삶을 보여준 신실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형제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새사람이 된 것을 알았다는 증거입니다. 같은 길을 걷게 된 사울 즉 바울에게 아나니아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바울이 소동을 일으킨 자들에게 이야기한 이유는 자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해 주는 사람이 아나니아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조상의 하나님을 나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복음을 전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아나니아가 했던 말을 이야기 합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바울에게 아나니아는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했습니다. 새사람이 된 바울이 초대교회가 행하고 있던 세레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회심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도착한 바울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경험 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계속 있으면 유대인들로부터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해야 할 사명이 있어서 떠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이 말을 할 때 바울은 창피했을 것입니다. 회심은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알고 다시는 과거의 잘못으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떠나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율법의 정신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지 21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한 것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로부터 해방되고 유대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한 것을 보면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을 구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소동을 일으킨 자들은 다시 폭도로 돌변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천부장에게 나는 로마의 시민권자”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오늘 말씀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먼저 보십시오.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바울의 변론을 다 들은 자들은 이방인이라는 소리에 돌변합니다.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는 것입니다. 마치 잠잠하던 화산이 폭발하듯 큰 소동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오셨는가를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폭도로 변한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선민사상으로 가득했습니다. 바울의 변론을 통해 마음을 돌이키지 않고 오히려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선민사상과 우월의식이 있기 때문에 바울을 살려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출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는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던 폭도들의 모습을 23절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리니”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이단들이 행동하는 것들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신성모독입니다. 신성모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모아 공중에 날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신성모독을 자신들이 제거하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 같지만,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을 눈으로 확인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현장감 있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죽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행동을 보여준 것입니다. 바울을 당장 죽이고 싶어도 천부장의 군인들이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면, 성경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면 마치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올바른 말씀이 선포되지 아니하면 소동을 일으킨 자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선포가 될 수 있도록 신자들은 기도해야 합니다.

 

사태가 심각해짐으로 천부장은 부하들에게 바울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24절을 보시면 “천부장이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 명하고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심문하라 한 대” 층대에서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라고 한 후 채찍질하며 심문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왜 바울이 피해자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 채찍질하며 심문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피해자라도 참된 말을 듣기 위해 심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로마가 사용하는 채찍은 예수님께서 당한 것과 같은 것으로 금속과 뼛조각을 가죽에 박아 넣은 것을 사용했습니다. 심문을 당하면 살 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채찍은 심문이 길어지면 사람이 죽을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왜 천부장은 심문하라고 한 것입니까?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사용한 말은 히브리였기 때문입니다. 천부장이 자세히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심문을 통해 자세히 알고자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큰 위험이 있기 때문에 빠르게 정리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천부장은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을 21장에서 바울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러면 채찍을 사용하여 심문할 수 없습니다. 천부장이 로마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범죄가 완전하게 소명이 되기까지 로마인에게 가혹한 형벌을 사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소동을 빨리 잠재우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동이 길어지면 로마로부터 문책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법을 어기고 있는 천부장의 지시를 받고 있는 백부장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25절을 보시면 “가죽 줄로 바울을 매니 바울이 곁에 서 있는 백부장더러 이르되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부장의 명령을 받는 백부장이라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후 움찔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당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항의는 당연합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을 들은 백부장은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26절 보시면 “백부장이 듣고 가서 천부장에게 전하여 이르되 어찌하려 하느냐 이는 로마 시민이라” 백부장은 상관에게 보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심문을 계속하면 나중에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보고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백부장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같은 마음이라 생각됩니다.

 

백부장의 보고를 들은 천부장은 바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에게 어떠한 질문을 했는가를 27절에서 기록합니다. “천부장이 와서 바울에게 말하되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바울에게 질문했을 때 자신 있게 나는 ‘그러하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로마의 시민권자가 된 것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간략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로마 시민권자임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자신이 영광 받기 위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도록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기 때문에 간략하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들은 천부장은 놀랬습니다. 왜입니까? 천부장은 로마 시민권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고 했습니다. 로마 당시에 로마 시민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몇몇 특정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정부의 고위층 등으로 아주 소수였습니다. 천부장이 많은 돈을 들여서 시민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천부장이 많은 돈을 통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로마 황제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들이 국고를 채우기 위해 시민권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시민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천부장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바울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는 나면서부터‘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아버지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아마도 천부장처럼 많은 돈을 들여서 얻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바울의 아버지가 로마에 큰 공헌을 하여 그 대가로 시민권을 얻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바울은 아버지로 인하여 출생하면서부터 시민권자였다는 것입니다.

 

천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자마자 두려워했습니다. 29절 보시면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곧 그에게서 물러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시민인 줄 알고 또 그 결박한 것 때문에 두려워하니라” 천부장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심문하려던 사람들도 두려워하며 물러갔습니다. 상급 기관 또는 부대에서 알면 자신들이 한 일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은 행23:26절과 27절에서 허위 문서를 총독에게 보냈습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27.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바울이 로마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거짓으로 문서를 보낸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천부장이라도 바울에게 한 행동으로 인하여 문책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작성해 바울을 총독에게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부장이 를라우디오 루시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들은 천부장은 어떻게 했습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이튿날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진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그들 앞에 세우니라” 바울이 감금 상태에 있는 것을 천부장이 풀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시민권자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고발했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소동을 일으킨 자들이 왜 바울을 죽이고자 했는가를 알고자 했습니다. 아마도 밤중에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날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를 모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바울이 그들 앞에 세워 진실을 알고자 한 것입니다. 천부장은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지만, 바울을 체포했기 때문에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임시로 모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전의 진상을 알고자 한 것입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고소한 사람이 있어야 심문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문제는 종교이기 때문에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바울이 증언한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에 대한 긴 이야기를 할 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변론한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인 것처럼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처럼 무서운 일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유전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함으로 바울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하여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바울은 구출됩니다. 구출을 받은 바울은 소동을 일으킨 자들에게 히브리어로 변론을 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다메섹의 사건과 아나니아를 만난 이야기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계기를 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이 진실인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신성모독을 한다고 하며 더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부장은 바울을 성내로 들여보냈습니다.

 

그런 후 바울을 채찍을 사용하여 심문하도록 했습니다. 심문하려던 백부장에게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말했습니다. 놀란 백부장은 천부장에 말했습니다. 백부장과 천부장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두려워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자신의 위치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마치 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 욕망, 권력 등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하여튼, 바울의 시민권을 확인한 천부장은 제사장과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나서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통해 마무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예루살렘을 떠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육체적인 고난을 겪지 않게 하심으로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나눈 나는 오늘 말씀을 어떻게 정리하고 싶습니까? 깊이 고민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사용하여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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