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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5-13
강설날짜 2018-05-20

성령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행2:5-13)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최후로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대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군사다운 모습입니다. 군사다운 교회는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경건한 생황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세상의 군인과 같은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를 아실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주님의 군사로서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군사의 모습처럼 그리스도인은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집중을 합니다. 그러다보면 일상적인 반복적인 삶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등을 감지하지 못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은 현실의 삶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현실의 삶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성도님은 “성령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설을 들으십시오.

 

지난주일 우리는 “홀연히 하늘로부터”라는 강설을 통해서 성령감림이 일어난 사건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에서도 성령의 오심을 이야기하셨고, 승천하시기 전에도 왜 성령이 와야 하는지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제자들과 여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날을 칠칠절 또는 초질절과 맥추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령강림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는 역사적으로 처음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최대한 사용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즉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입니다. 건물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120명에게 성경강림 한 것입니다.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은 유일한 것이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까지 예수님의 증인 자가 될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지난 주 강설에 이어 “성령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강림한 후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는 것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이 임했는데 그러면 사람들에 대한 반응, 특히 제자들의 마음과 심정이 무엇인지 기록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것에 대한 것을 기록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나라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 후 마가의 다락방에 있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것을 확신 하고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왜 천하 각국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왔던 것입니까? 포로생활을 하면서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이 제사를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였던 것입니다. 위의 그림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9-11절을 참고) 각국에 흩어져 있었던 사람들은 오순절 절기에는 두 달 동안 예루살렘 성전 근처에 임시로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우거하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문테스”는 보통 한 곳에 머물러 시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국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둘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각 나라로부터 왔을 것이고, 노후를 예루살렘에서 보내고자 귀국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6절에서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소리’는 성령이 임한 때처럼 바람 소리인지(2절),아니면 4절에서 말씀하시는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과 교수들의 견해는 서로 다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원문으로 ‘소리’를 의미하는 단어는 보통 인간의 소리를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강림 후 각국의 나라로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나라로 말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 언어로 듣는 모습을 보면서 소동했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에도 이러한 현상이 있습니까? 성령강림은 역사적으로 유일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미 성령이 오심으로 또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실이 또 발생하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락방에서 일어난 사건은 이제 예루살렘 성전 주변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나라 언어(방언)로 제자들이 대화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고 흥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행14장에서 말하는 방언과 차원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의 흐름을 잘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7절을 보십시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성령강림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고, 놀라운 광경을 보았던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해 못하는 것이 타락한 사람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놀라움의 모습을 자신들이 보면서 제자들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을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고 하시는 것입니까? 당시 갈릴리 사람들은 마치 우리나라의 지방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투리처럼 발음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이야기를 할 때 음절을 생략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사투리를 쓰는 시골뜨기로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서 요1:46절에서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사투리를 쓰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래 갈릴리는 상징적으로 유대인의 땅과 이방인의 영역인 바다의 중간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방의 갈릴리’ 라고 불렸습니다. 마4:15절을 보시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가 그 증거입니다. 역사적으로도 포로 후에 갈릴리에 정착한 유대인에 대해서 점점 ‘이방의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시골뜨기 혹은 이방인들과 친밀”하게 지낸 것을 비꼬아 말했던 것입니다.

 

소동하며 놀랬던 이유를 8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사람들이 놀랬던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소리를 왱왱 하고 이상한 소리로 지껄이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함으로 방언을 한 것입니다. 다만 듣는 사람들 가운데 여러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각각 자기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어 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었던 사람들의 출신 지역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9-11절을 보시면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라고 기록을 합니다. 이렇게 기록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15개의 지리적 장소는 유대인들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령강림을 경험한 제자들은 언어들은 달랐으나 그 메시지는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의 큰 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갈릴리 출신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하나님의 큰 일에 도구로 쓰임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충만하여짐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깨닫고 자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이미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성취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강림은 우리에게 복음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땅끝으로 전하여 질 것을 9-1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들었던 주위의 사람들은 놀라며 당황하기도 하고, 조롱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12-13절을 보시면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이런 말을 듣는 성도가 있다면 행복한 것입니다.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는 자는 천국 잔치의 기쁨이 다가오기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령강림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술에 취해 황홀경에 빠진 사람처럼 또는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새 술’ 즉 “크류코스”라는 단어는 유일하게 여기서만 쓰이고 있습니다. 다 발효되지 않은 신선하고 달콤한 포도즙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포도즙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쉽게 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더 놀라면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욱 조롱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강림은 세사에서 이기심과 탐욕 그리고 절망 속에 있는 분들에게 자신의 야욕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오순절 성령강림은 그 의미나 역사적으로 일회적 사건이기 때문에 오늘 날 성도요 교회는 그것과 통일한 사건을 체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놀랍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 성경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 속에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자들에게는 고전 12:13절에서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새 언약공동체요 그리스도의 몽인 교회를 창립한 날이기도 합니다.. 오순절에 내린 성령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자 하나님의 성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세웠던 것입니다. 엡2:22절을 보시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가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구원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승천만큼이나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다면 성령 강림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놀랍도록 확장 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초대 교회의 창립과 설립으로 성장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도들은 그리스도처럼 기사와 이적을 행하였으며, 믿는 자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의 하나 됨을 힘써 지켰습니다. 초대교회를 보시면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사랑이고,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이미 구원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리로부터 결과를 누리는 성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가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삶이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믿는 자와 세상에 속한 자는 분명하게 구별되었습니다. 성령강림은 예수님의 부활의 결과로서 제자들이 구원받은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적으로 강림한 것을 일회적으로 방언으로 말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해 나가실 때 발생하는 일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히 은사주의를 집중하는 교회는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행한다 할 때 기적도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 하에서 역사상 어떤 시기 동안에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좀 더 표현하면, 계시 시대에는 기적이 많이 필요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역사적 사실이 증거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오늘날에는 기적을 특별히 요구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기기 때문입니다. 성령강림은 더욱 성경의 말씀을 확증하여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오늘날 기적을 경험하고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봄으로써 거기에서 깊은 사상의 내용과 깊은 가르침을 더 받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을 주지시 아니했다면 과거와 같이 기적이 필요할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을 알고 더욱 성령을 의지하고 의존함으로 주의 길을 걷는 성도입니다. 자신의 언약한 점을 알수록 성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남녀차별 없이, 신분의 차별 없이 부어졌습니다. 9-11절에 열거된 것을 보면 당시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을 “디아스포라”로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과 이방인이 개종한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던 제자들 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유대인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조차도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행10:34-43절을 보시면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한 베드로를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편견에서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으로 지어저가는 성도라는 것을 안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성령충만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 않았던 세상 사람들은 놀라움에 주목하였습니다. 각 나라의 방언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언어적으로 수학적으로 상식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새 술에 취하였다고 단정하고 방언을 하는 무리를 조롱하였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지 방언으로 떠드는 무리를 보면서 이들은 그 말에 귀를 기울여보지도 어떤 상황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증을 가져보지 도 않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모습은 때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또 때로 새 술 취한 자 같이 이성을 잃은 자의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일에 쫓겨 쉴 시간도 제대로 갖지 못하면서 주일 이면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몸단장을 하고 예배당에 모여서 하루 종일 예배 하고 봉사를 하는 우리를 볼 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요 사랑입니다. 참된 예배를 아는 우리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예배를 할 수 있도록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은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강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는 쪽에 서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아는 지팡이교회는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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