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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1:18-22
강설날짜 2017-07-09

무화과나무 사건과 기도의 능력과 응답(마21:18-22)

 

고난과 죽음을 알리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어디로 가셨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이방인의 뜰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처럼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요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는 곳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56:7절에서 잘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성전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집이요 기도하는 장소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는 성전에서 장사꾼과 종교지도자들이 결탁하여 무엇을 하였습니까? 특별한 절기에 하나님께 제사하러 온 사람들에게 장사를 한 것입니다.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본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기도하는 장소에서 당신님의 백성이 은혜와 긍휼이 될 수 있도록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장사를 하는 사람은 쫓아내시고 맹인과 저는 자들을 고치신 것입니까? 성전은 기도하는 집임을 은혜와 긍휼이 베풀어지는 장소라는 것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병든 자라도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도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성전에서 소리를 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특히 어린이들이 호산나 하면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소리에 더욱 화가 나서 예수님께 항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자 하는 그들에게 나도 잘 듣고 있다고 하시면서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하시면서 다윗이 고백한 시8:2절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당신님의 백성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영광을 올려 드릴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비슷하나 하나님은 아닌 존재지만 권세를 주심으로 영광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있다는 것을 다윗이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 어린아이들이 하는 호산나가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예언한 일들을 성취하시고 있는 가운데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고 하는 것은 당신님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알고 영광과 존귀를 올려 드리는 공동체입니다. 기도하는 집으로 서로가 연결되어 은혜와 긍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교회입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평안히 주무셨는지 아니면 밤새도록 기도하셨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다음 날 예루살렘으로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18절을 보시면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다시 오셨지만 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여기서 왜 마태는 시장하셨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입니까?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오늘날의 우리에게 배고픔과 관련된 예수님께서 교훈을 주실 것을 미리 암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19a절을 보시면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예수님의 눈에 무화과나무가 보이는 것입니다. 더 가까이 가보니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있는 것입니다. 평소대로라면 그냥 지나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이라면 지나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시장하시다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하면서 우리에게 무화과나무 사건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병행본문인 막11:13절에서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아직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한 때는 3-4월입니다. 이 때부터 잎사귀가 나오고 열매는 8-10월에 맺습니다.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본문 19b절에서 저주를 하십니다.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무화과나무는 자기를 창조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말라버립니다. 구약의 성경에서 무화과마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종교지도자들과 성전에서 장사하는 타락한 백성에 대한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유대인들은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바로 자신들에게 하는 심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은 단호하게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할 것을 저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신들이 무화과나무의 잎사귀처럼 화려하지만 열매 없는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메시야를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은 열매 없는 백성으로 메시야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 요한은 눅3:9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고 하신 것을 다시 재확인하여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지만 어떠합니까? 예수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겉모양은 화려하고 경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무화과나무처럼 저주를 받는 다는 것은 영원한 심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생활한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을 위한 신앙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것은 이방인에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성전으로 되어가는 지팡이교회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많은 이적과 기적을 보았고 경험을 직접 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병든자를 고치시고 그리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실 때도 제자들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경험한 것은 예수님께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적과 기적이라도 제자들이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랑이 일어서 자신들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무화과나무의 사건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지금까지 동고동락을 했지만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에 대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계절에 저주를 한 것인가? 무화나무에게는 도덕적인 책임도 없습니다. 창조주가 만들어 주신 대로 계절에 따라서 열매를 맺으면 됩니다. 제자들조차 상상할 수 없는 가운데 그들이 알고 있는 이적과 기적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는 계절에 저주한 것을 본 제자들의 입장은 예수님다운 모습이 아닌 부당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장하시다고 해서 열매가 없음으로 저주를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을 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시는 분이 나무를 저주하여 죽이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같이 읽어 보았으면 합니다. 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황당한 대답은 기도의 능력과 응답에 대한 가르침으로 더욱 이해하기 힘들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의 저주와 기도의 능력과 응답에 대한 가르침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특히 예수님은 21절 첫 시작을 “아멘 레고 휘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당신님에게 특별한 권위가 있다고 하시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제자들은 예수님께 시선이 주목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지금 무화과나무를 저주 한 것과 같이 기도의 능력과 응답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을 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무화과나무를 나와 같이 말라버리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은 기도에 대해서 믿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마음대로 기도하여 이 산을 저 곳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산을 옮기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의 표현에 응답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어떠한 형태로든지 따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 좋은 말씀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화나무 사건의 마무리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능력을 사람이 하는 것처럼 강조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능력을 하나님께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함으로 인간의 무기력함을 더 많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6: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내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때 응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도 당신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모범적인 기도를 보여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동문서답과 같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의 장소를 막고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 기도하는 집이 무엇인가를 22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부터 얻어진다는 영원한 진리를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화과나무처럼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것은 마치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한 모습 같습니다. 성전의 모양은 장엄하고 웅장하지만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그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 것에 대한 저주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상징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처음으로 가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처럼 풍성한 잎사귀는 있어도 거룩한 열매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 돌이킬 수 있도록 기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욱 종교지도자들과 갈등이 격화되어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의 처형을 당합니다. 그 후에 부활하심으로 기도의 능력과 응답이 무엇인지를 증명하신 것입니다. 내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에도 이스라엘처럼 믿음이 있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열매를 맺기를 거부하고 반역하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상징으로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듯이 우리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살길은 돌이킴으로 오직 기도로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바라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보아도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살고 잘 먹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새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보냄을 받은 메시아를 부인하는 열매 없는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결국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무시한 것입니다. 마18:20장의 말씀처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권징 속에 기도함으로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속이면서 권위와 세상적인 탐욕을 위해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오늘의 시대에서 잎사귀만 무성하지 마십시오. 열매가 없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교훈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하며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무화과나무처럼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외식하는 자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외식을 회개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의심치 말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재력과 명예, 능력을 신뢰하는 것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성도가 되가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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