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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4:36-51
강설날짜 2017-12-10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님의 재림의 때와 징조를 계속하여 말씀하여 주신 후 “무화과나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지난 주 강설을 정리함으로 말씀의 깊이를 더 잘 알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 종말과 심판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알고 있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지 아니해도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마지막 시대에 대한 것임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심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무화과나무를 사용하심은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감추어진 경륜의 비밀을 드러내심으로 당신님의 재림이 목전에 다가왔다는 것임을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을 통해서 계절의 변화를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하심으로 영적인 긴장상태로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세상에 속해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어떤 신앙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긴장상태에서 생활해야 하는 당신님의 성도를 위해서 신성으로는 아시지만 인성 즉 육신으로는 “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신님의 재림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전신갑주를 입은 무장한 군인처럼 생활하라는 메시지입니다. 비유를 사용하여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심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무화과나무의 깊은 뜻과 기능을 생각해야 됩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의미를 잘 드러내신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지상사역을 마무리하실 때 당신님의 제자들은 다시 재림의 때를 묻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행1:7절에서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하심으로 영적인 긴장 상태로 인내를 하도록 당부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날에 대해서는 언제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서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생활하는 우리들을 사탄에 속한 자들은 “표적과 기사”등을 통해서 유혹을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정신줄을 놓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성경의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예수님의 재림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강설 제목은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무한한 은혜의 방도를 사용하시어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예수님께서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을 통해서 세상의 종말 즉 심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지막 날은 알 수 없다고 하심으로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배우라”고 하신 후 오늘 본문 37절을 보시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인자인 당신님의 재림은 노아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님의 재림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기 위해서 노아의 홍수와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를 잘 알고 있는 제자들은 즉각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도 믿지 못하고 오히려 방황하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무장을 한 군인처럼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전하여도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38절을 보시면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라고 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닥칠 홍수의 위기 즉 심판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나 오늘이나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도 일상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홍수와 재림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방주가 완성되고 선택된 생물과 노아의 가족이 들어가고 있어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재림이 임박해도 일상적인 생활에 즐거워하는 자들을 위해서 방주의 의미를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당신님의 백성에게는 방주의 의미를 통해서 안심하라는 위안과 격려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노아 때와 같이 복음을 전해도 듣지 아니해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오직 하늘에 있는 면류관의 상급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이 경고의 메시지를 깨달을 때 즉 주님의 재림의 날에는 통곡을 해도 아무런 사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가올 경고의 메시지를 들어도 무시하고 일상적인 생활을 했던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당한다는 것입니다. 39절을 보시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지만 그들은 방주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방주의 의미를 들어도 알지 못했던 자들은 갑자기 홍수가 나서 죽게 될 때까지 알지 못한 것처럼 ‘인자의 임함’도 같습니다.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가운데 전혀 예상하지도 못하게 도적같이 재림 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십니까? 41-42절을 보시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참으로 비극입니다. 생명과 죽음으로 한 명은 구원을 또 다른 한 명은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천국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성도와 슬피 울며 이를 가면서 통곡을 하는 자들로 나뉘게 될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가운데, 맷돌질을 같이 하는 가운데 재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화와 적용을 위해서 당시 일상적인 생활로 말씀하심으로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인간의 관계는 중요하지만 주의 날에는 인간관계마저 무의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나 부모와 자식이라 할지라도 버려둠을 당하는 사람은 죄인들이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들이며, 버려둠을 당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인자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함께 달렸던 두 명의 강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들 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난한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 나라가 임할 때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여 구원을 얻는 것처럼 분명하게 갈리는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를 사용하심으로 왜냐하면 내가 다시 올 때는 갑자기 그리고 예고 없이 찾아오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님의 재림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전환점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님의 백성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심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적인 주제로 제자들과 교회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 준비되어 있는 상태여야 함을 강조하심으로 인자 되신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으로 다시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는 43절에서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도적이 어느 시간에 올 것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당연히 깨어 있을 것이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고 막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도 아는 바니’라고 하심으로 무엇이 중요한 지를 다시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좋아하는 자들처럼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환난과 고난의 의미를 알면서 유혹과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또한 표적과 기사를 사용하여 재림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참된 신앙을 지키면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4절에서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42절에서 ‘깨어 있으라’는 의미와 44절의 ‘준비하고 있으라’는 동의어를 사용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깨어 있는 것은 단순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시는 때를 추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깨어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들을 수 있는 백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는 무엇을 준비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까? 도적같이 온다는 하는데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예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45-47절에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6.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심으로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두 부류의 종들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먼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듣기 좋은 말을 먼저 전한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도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은 나에게 맡기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 잘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재물과 다른 종들을 포함하는 그의 집 사람들은 주인의 마음과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종은 주인에게 순종함이 자신에게 가장 좋은 유익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 준비함으로 가장 좋은 유익 즉 구원의 상급인 면류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신 것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종이 아닐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고 나에게 맡기신 것이 있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재산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맡은 청지기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아버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생활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당신님의 백성인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입에 풀칠할 만큼 주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럴 때 목회자의 마음이 찡합니다. 그럼에도 신앙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있는 것이고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길을 잘 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영적인 양식을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다시 45절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러므로 주인이 맡기신 그의 집안사람에게 제 때에 양식을 주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누구냐?”입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우리말의 특성상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 누구냐”로 되어 있습니다. 서로 나누어져 표현 되어 있지만, 원문으로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 누구냐’라고 함으로 의문문의 형태를 띠어서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깨어 준비가 되어 있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의 상태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의 모습은 그가 실천하는 행위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맡겨 준 일에 대해서 충실할 뿐만 아니라 사려 깊게 생각해서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는 종이니다. 청지기인 그가 한 일은 적절한 때에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주인의 양식을 청지기가 나누어 줄 수 있는가? 이것은 도둑질이 아닌가 생각될 것입니다.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집안사람들에게 적합한 때에 양식을 나누어 주는 모습은 예수님이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하신 말씀을 떠 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자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로 가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긴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잡지 못했을 때 부활하신 당신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럴 때 베드로는 요21:17절에서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교회는 영적인 양식에 메말라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때를 따라 꼴을 먹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재림을 기다리는 올바른 자세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48-51절을 보시면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악한 종은 주인이 빨리 오든 늦게 오든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더디 오시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깨어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미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사 모두 멸망치 않고 회개하여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종들은 상상을 초원하게 타락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9절을 보시면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즉 악한 종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만약 우리의 입장에서 악한 종을 어떻게 하시기를 바랍니까? 악한 종은 주인이 자신에게 맡긴 지위를 이용해서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했하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술 취함으로 더 타락하는 것입니다. 악한 종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망을 생각하지 못하고 또한 깨어 준비하지 못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악한 종을 사용하여 예수님은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라고 하심으로 왜 깨어 있어서 근신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백성에게 강한 메시지를 51절에서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심으로 마24장에서 특징적으로 자주 사용하고 있는 문구이기도 합니다. 처절하게 후회하는 모습이나 극한의 절망과 고 통을 안겨 주는 철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울어도 비극적인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교훈의 의미를 꼭 생각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알지 못하지만 영적인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님의 백성을 위해서 40일 동안 금식하시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사탄의 시험을 모두 이기셨습니다. 지상의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하루 종일 무리들에게 시달려 온몸이 피곤하셨을 지라도 홀로 산으로 올라가 조용히 기도하셨던 분이 누구십니까? 또한 누구를 위해서 하신 일입니까?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도 온 뼈마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음에도 우리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하셨던 분이 누구십니까? 왜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당신님의 백성을 위한 참된 길과 진리요 깨어 준비하도록 하시기 위한 사랑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재림을 부정하면서 벧후3:4절에서는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라고 하면서 불의한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참된 청지기로 주의 길을 잘 가는 지팡이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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