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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1:23-32
강설날짜 2017-07-16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마21:23-32)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후 베다니에서 유숙을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시장하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먹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저주하니 곧바로 나무가 말라버린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리고, 예수님의 정체성도 거부하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에 대한 징계를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참 신앙이 없다면 영원한 심판을 하시겠다는 의미로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참 신앙의 고백을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참으로 신기하고 놀랬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계절에 나무를 저주한 것에 대하서 “어찌하여 말랐나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지 질문을 하는 것은 이전에 보았던 이적과 기적과 다른 것이고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당신님은 “아멘 레고 휘민”으로 더욱 제자들의 시선은 예수님께 주목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동문서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심으로 기도의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강조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심판을 알리시고 그들이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유일하게 살길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바라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의미로서 예수님은 세상의 종교지도자들과 마귀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더욱 고난과 죽음이 가까이와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기적을 행하신 후 어디로 가셨습니까? 23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가르치시고 있을 때입니다. 병행본문이 눅20:1절은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며,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회개는 안하고 오히려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은 진정한 정체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이권을 위해서 눅19:47-4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죽이고자 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린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흠집을 내 당신님의 권위의 가르침을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이스라엘 정부의 집행부이자 입법기관으로 사법부의 역할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 예루살렘의 입성 그리고 다윗의 아들, 호산나, 무화과나무 사건 등 이전의 모든 일들(가르침, 이적과 기적)에 대한 함축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권세가 무엇이며, 그 권세가 어디에서 오는지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공적인 사역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상당한 파급 효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장로들은 자신들의 권위와 이권이 침해당한다고 생각함으로 흠집을 내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질문을 한 것은 모두 틀린 것입니까? 성전에서 가르치는 위해서는 종교의 법칙에 따라 절차를 밟고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누구이기에 승인도 받지 않고 가르치는가? 만약 예수님께서 나는 나 스스로 권위를 가지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승인을 받아 가르치는 권세가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즉시 그들은 옷을 찢으면서 지금까지 덫을 놓았지만 잡지 못하던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24절에서 이렇게 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고 하심으로 역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역질문을 하시는 것은 당시 랍비들이 자주 사용하는 대화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서를 보아도 예수님은 반대자들의 질문을 다시 질문하심으로 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역질문을 하십니까? 25a절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장로들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하는지 보고 있는 백성들에게 답을 하신 것입니다. 역질문을 받은 그들은 갑자기 수세에 몰리게 된 것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서 역질문의 공격은 세례 요한의 세례로 그가 했던 모든 사역의 근원은 어디인지 밝히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냐 아니면 사람으로부터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세에 몰리면서도 답하지 않고 서로 의논을 하는 중입니다. 25b-2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6.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서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역질문은 그들에게도 숙달되었고 오히려 자신들이 공격을 당한 모양이 된 것을 안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예비한 요한에 대해서 즉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것으로 인정을 하면 예수님이 옳았고 메시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요한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백성으로부터 요한을 선지자로 믿지 아니한다는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고 결국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속으로는 요한도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도 인정하지 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도 두려운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백성입니다.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생각함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따르지 않을 것과 그 이상의 폭동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상대방의 약점을 이용하여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까? 서로 피장파장 하자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상대방을 공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더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늘 예수님은 상대방의 의도가 악하더라도 늘 진실을 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말하심으로 당신님의 권세에 대한 답을 회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진실한 대답을 하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마3:1절에서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들이 요구하는 당신님의 권세가 무엇이고 그 출처가 어딘지 세례 요한으로 답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정체성을 즉 메시야를 세례 요한을 통해서 그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결국 믿음과 불신앙의 문제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말씀을 하심으로 당신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씀을 들어도 지식으로 듣고자 하고, 아예 말씀을 듣지도 아니하는 이 시대에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슬픔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사역을 통하여 가르치시고 이적과 기적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무시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위를 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보다 백성을 무서워함으로 답을 회피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27절에서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목적과 이익을 따르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말해도 진리를 따르지 않는 그들에게 답을 더 해 주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을 아시고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들을 귀 있는 교회요 성도입니다. 더욱 예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현재의 국면을 전환하시고 공세를 취하시면서 세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그들을 고발하십니다. 그 첫 번째가 오늘 본문 두 아들의 비유인 28-32절입니다. 두 번째는 악한 농부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 21:33-46절로 종교지도자들의 영적인 의무를 무시함으로써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과 예수님을 학대하고 박해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혼인잔치의 비유입니다. 22:1-14절로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무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특권과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비유들은 각각 공부를 할 수도 있지만 대체로 서로 관련성을 주의하면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고발을 세 비유를 들어서 하는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발하시는 것은 23절에 대한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지팡이교회는 예수님을 알고 영원한 천국의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사용하심으로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에게 하시는 물음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이 비유를 연관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라고 하심으로 스승이 제자들에게 문제 해결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 위해서 자주 쓰던 관용어입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의 대답과 태도를 사용하심으로 종교지도자들의 무식과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28-30절을 보십시오.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맏아들은 당연히 가겠다고 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의 행동을 알고 둘째 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아들은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뉘우치고 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으로 두 아들을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보낼 때 똑같은 지시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두 아들에 대해서 편견이 없으십니다. 두 아들 모두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을 하게 하심으로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아들은 처음에 말한 것과 다르게 모두 끝에 가서는 자신이 말한 것과 정반대로 일을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최초의 말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행동을 보아야 합니다. 맏아들은 겉으로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것 같지만 그 마음에는 그렇지 않고 거역을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거역하지만 나중에게 뉘우치고 순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너희들은 누구냐’ 즉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에 대한 답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누구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당연히 잘 전달하고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은 오신 메시야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에 대한 경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31절에서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고 하심으로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인지 대답을 들은 후 심한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세리와 창녀는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는 개와 돼지로 즉 부정한 자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유대인보다도 세리와 창녀가 들어가리라고 하십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본은 좀 어렵게 되어 있지만 원어로 보면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지금 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행동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믿음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세리와 창녀보다 못한 큰 죄인으로 말씀하는 것은 큰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32절에서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의의 도’라는 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신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를 믿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세리와 창녀는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전한 메시지는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불의한 죄인이 하나님께 만족하실 진정한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으로 죄인을 중생시키고 새롭게 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증거를 믿는 자들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회개하는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이 둘째 아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신이 원하는 데로 생활하다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믿고 회개한 자가 둘째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자들은 겨우 하나님을 아는 척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팡이교회는 죄인이라고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응답을 기대하면서 생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보여준 믿음은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준 성경을 통하여 은혜 받고 믿으면서 승리하기를 소망합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생각하며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철학적이고 인생을 위한 위로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은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책도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은 이 세상 가운데에서 나를 건져내어서 고난의 십자가 길을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은혜의 방도로서 전하여진 말씀을 진실로 믿으면서 기도하기를 소망하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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