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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2017.01.17 19:29

가나안 여인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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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15:21-28

지팡이교회는 두 주간 동안 ‘장로들의 전통’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전통은 아주 중요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에 대한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생활하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질문은 아주 좋은 의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질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조상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장로들의 전통’에 근거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은 정죄 당해야 한다고 강하게 항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심으로, 장로들의 전통 중에서 예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은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에게 질문을 한 것에 대해서 ‘무리를’ 불러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평가해 달라고 하면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라고 하면서, 율법의 정결규례는 너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을 죄악으로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따라 정결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팡이교회도 주님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은 백성임을 잘 드러내는 것이 출생한 후 팔일만에 할례를 하는 행동입니다. 할례를 한다는 것은 자신들만이 언약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부심은 언약의 백성으로 정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장로들의 전통을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할례를 통해서 이방인과 구별하는 것이고 정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보내어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을 중요시하는 그들과 논쟁을 한 후 이스라엘 지역을 떠나서 이방인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이동을 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어디에 도착하신 것입니까? ‘두로와 시돈’입니다. 오늘날의 장소로 말하면 갈릴리 지역 북서쪽으로 지금의 ‘레바논’입니다. 이 지역은 엘리야가 이방인 여인에게 도움을 준 지역이기도 합니다.(왕상17:8-24) 왜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가신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해 보시면 어떠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방지역으로 가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사역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두로와 시돈’은 부정함의 상징이라고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부정함의 도시로 가셨을까? 진실한 믿음을 찾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영토가 아닌 이방인 도시에서 찾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22절을 보시면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기서 가나안 여인이라고 하지만 병행본문인 막7:26절은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이라고 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태는 왜 가나안 여자라고 했는가?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한 후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그들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들은 그 후 수로보니게 지대에서 살다보니, 마태는 과거의 이름으로 마가는 그 당시의 지역이름으로 기록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수로보니게는 헬레니즘이 들어오면서 큰 번성을 하면서 헬라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헬라인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방인 중의 이방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여자는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지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여러 나라로 전파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 소리의 내용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딸이 정신적으로 귀신이 들렸다는 것을 아는 엄마의 심정은 당연히 예수님께 달려와서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고충을 말할 것입니다. 저라도 가나안 여자와 같은 현실에 있다면 예수님께 달려가서 고쳐달라고 할 것입니다. 지팡이교회 성도님, 자신의 자녀 중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것도 힘들지만, 정신적으로 당하는 병은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이고 저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하루하루 힘든 생활을 하던 중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희망의 빛인 것입니다. 자신이 그 동안 생활해온 모든 고통과 서러움, 그리고 절망 등을 호소하는 마음으로 ‘나를 불씽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엄마로서 애처로운 자신의 딸을 위해서 호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황당하기도 합니다. 23절을 잘 보십시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말을 듣고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받아들이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란 태로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예수님이 사역을 보십시오. 귀신에 들린 사람들이 왔을 때 거절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찾아 온 사람들은 치료를 받았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면서도 예수님께 ‘그를 보내소서’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단지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를 보내소서’라는 말 전에 무엇이라고 기록합니까? ‘제자들이 청하여’라고 기록하는 것은 원어로는 미완료형으로 계속하여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 계속하여 듣고 있어도 대답을 안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가나안 여인이 왔을 때 이상한 태도를 보이신 것일까? 여기에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냉정한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제자들의 요구에도 예수님은 24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에게는 구원이 없는가에 대한 고민도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민을 하지만, 가나안 여인은 오직 자신의 딸을 위해 간구할 뿐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아니면 내가 다시는 살길이 없다는 심정으로 구합니다. 이것을 마가는 7:25절에서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라고 기록하는 것을 보면 간절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고통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반문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렇게 말씀아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마10:26절에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25:13-15절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그의 손자인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언약을 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지금 가나안 여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모른 체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가나안 여인을 비롯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 약속의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가나안 여인에게 냉정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단지 자신의 딸이 귀신 들린 것을 고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의 마음을 아신 것만이 아니라 개인의 심정과 형편을 아시면서 생명의 은혜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을 베푸시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이 단지 병만 고치고 가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다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합니다. 25절을 보시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여기서도 가나안 여인은 끊임없이 엎드리어 절하면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지팡이교회도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형편에서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당신님의 능력과 사랑 그리고 지혜로 인도하시면서 구원하여 주실 것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가나안 여인은 계속하여 간청을 해도 예수님의 모습은 냉정한 것처럼 보입니다. 26절에서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시는 것은 인격적으로 모욕을 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이 떡을 주시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떡을 이스라엘 자녀에게 이미 주었는데 다시 달라고 해서 개들인(이방인) 너희들에게 던져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자녀라고 하고 개를 이방인으로 말하는 것은 심한 욕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개’라는 단어를 생각해야 합니다. 원어를 보시면 더러운 동물로 간주하며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 여인을 배려한 모습으로 작은 강아지의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합니다. 유대인은 이방인들을 모두 부정적인 개로 생각을 했지만 예수님은 애완용 동물처럼(?) 생각을 하면서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여인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을 합니다.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저도 예수님이 개들에게 주시는 부스러기라고 주시면 매일 먹고 싶은 마을일 때도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이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면서 자신을 개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러 모습은 자신의 딸을 치료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엄마의 모습입니다. 가나안 여인의 말은 참으로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문회에 나온 어느 사람처럼 미꾸라지처럼 이런 저런 말로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말로 예수님께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단지 딸의 병만 나을 수 있다면 좋다는 것입니까?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28절을 보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이 크도다’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딸이 치료만 될 수 있다는 것만 간청한 것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으로 간청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는 이스라엘인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하시지 않고, 오늘 말씀에서 이방 여인에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종을 위해 믿음으로 간구한 백부장의 믿음(마8:10)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팡이교회는 22절의 말씀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기서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믿음으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개’처럼 말할 수 있는 것도 유대인보다 더 아마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잘 이해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처럼 우리도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저주를 받은 가나안인으로서 예수님에게 나아가서 간청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각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시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진정한 메시야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안 여인에게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두 주간 마15:1-20절 말씀을 통하여 정결에 대한 것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믿음으로 정결하여 진 것이고, 믿음으로 자신의 딸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혈통이 아니라 바로 이방인이라도 믿음을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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