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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6:1-13
강설날짜 2018-01-14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음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알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함정만 생각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의 영광을 위해서 당신님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아주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 지팡이교회는 “마지막 심판”에 대한 강설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 말씀을 다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들과 오늘날의 우리들을 위해서 마지막 심판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통해서 바르게 깨닫게 하시고,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신앙생활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백성인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는 임금이신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영광의 보좌’에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모든 민족’을 모으신 후 울타리 위에 앉아 양쪽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양과 염소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양은 오른편으로 염소는 왼편으로 심판의 대상자를 표현하심으로 그 날은 모두 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말씀은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마지막 시대를 생활하는 나에게는 위로입니다. 나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충성된 청지기로서 복음의 증인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와 반대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심으로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에서 떠나 다른 선택을 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듣고 돌이켜야 합니다. 연약한 자를 위해서 경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함정을 만들고 있을 때에도 아마도 염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함으로 결국 예수님을 못 박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마지막 심판의 선언을 잘 기억하시고 주의 길을 바르게 가기를 부탁드립니다.

 

영광의 심판의 자리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왼쪽에 있는 불신자들은 하소연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주여 주여”해도 이미 늦은 것입니다. 아무리 호소를 해도 아무리 애원을 해도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라고 심판은 여유가 없음을 묵시적으로 꾸짖으심으로 마무리 하십니다. 그 날에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판자이신 예수님은 최종판결로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영원한 것처럼, 지옥이라고 칭하는 그곳도 영원히 형벌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을 통해서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것은 당신님의 백성에 대한 애정과 간곡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말씀부터 27장까지는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셨던 것을(마16:21, 17:1, 20:17-19) 다시 확정하여 주시는 것이 오늘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말씀하셨던 것이 성취되는 시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영원한 죽음의 지옥에 대한 것으로 신자와 불신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은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어떻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도록 직역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들을 마치 셨을 때 그것이 일어났다. 그가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가르침에 대한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말씀을 모두 마치신 후 예정된 죽음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수난의 길에 다가가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육신으로 오신 사명을 감당하신 후 십자가의 죽음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도록 2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유대인에게 유월절은 중요한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유월절은 우리나라 3-4월 중에 14-15일에 해당합니다. 그 이유는 저녁부터 하루의 시작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유월절을 사용하여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유월절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종 되었던 애굽으로부터 구원시켜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16:12절에서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께 유월절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를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한 것은 사망의 그늘에 있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과 당신님의 죽으심을 연관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신 그 차체만으로 은혜와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잘 표현하는 것이 3-5절입니다.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유대 백성의 최고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고자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대제사장은 오직 한 명인데 그 당시에는 전직 대제사장들과 고위 제사장을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더욱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지만 오히려 잡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정결하게 해야 하는 직무가 있음에도 관저에 모여서 극악한 일을 꾸미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종교지도자들은 은밀히 악한 일을 도모하였으나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계획은 결코 숨기우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 망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생각하지 않고 악인의 길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혜와 명철 그리고 모략으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싶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당한 방법과 절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여러 나라에서 생활하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사람이 많았고,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다 보니 예수님을 죽인다는 것은 폭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폭동을 두려워함으로 예수님을 죽이는 일을 뒤로 미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야 하는 자들이었지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도 놓친 것입니다.

 

지금까지를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6-13절에는 우리가 잘 알듯이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입니다. 먼저 6절을 보시면 장면이 바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어” 예루살렘으로 동쪽에 있는 베다니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문둥이인 시몬의 집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수많은 병자 중에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고 쿰란 문서에 의하면 당시 베다니에 문둥병자 수용소가 있었다고 합니다. 요11장에 의하면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의논을 하지만 반대로 시몬은 자신의 집에 편안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나라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시몬과 같은 마음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편안한 안식처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때 7절을 보시면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이 여인은 요12:3절에 의하면 나사로의 누이이며 마르다의 자매인 마리아였습니다. 향유는 매우 귀한 것으로 인도에서 식물의 뿌리에서 채취한 것으로 한 옥합은 노동자의 한 해 월급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하실 때 비스듬히 누운 상태로 식사를 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식사하시는’ 단어의 의미에서도 상체를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인 예수님의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단번에 흘러내리도록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행위는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제자로서의 진정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은 화들짝 놀랍니다. 그 모습에 대해서 8절은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고 구원하여 주셨는데 한 옥합이면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는 귀한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로 생각하면 몇 천 만원이 넘는 돈으로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이 여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참으로 소중하다고 여긴 무엇을 표현하고자 향유를 부었던 것이었고, 향유를 다 쏟아 붓는다 하여도 내 안에 있는 귀중함을 표현하기에는 모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제자들은 9절을 보시면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이라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줄 수 있겠도다’는 미완료형으로 그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못한 것을 계속해서 아쉬워 하며 격분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요12:5-6절에서 가룟 유다의 책망에서 잘 드러나 있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서 참뜻을 파악을 해야 하지만 영적으로 밝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이 상황은 예수님께서 잡혀서 돌아가시기 직전으로 제자들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의 중요성을 알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서 ‘좋은 일’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님의 죽음을 생각하고 행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분노와 원망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 이유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 안에 들어 있는 은혜로운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드린 헌신과 사랑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제자들도 알아야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직까지는 야망과 야욕이 많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수난에 대해서 여러 차례 이야기 하신 것에 대해서 다시 확인하여 주시는 것이 11절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이 땅에 머물 시간이 길지 않음을 언급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가지 있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의 상황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 적절한 판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더욱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이 널리 알리어져도 그리고 교회 안에서 복음의 메시지가 선포되어도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위해 생활하는 것은 죄입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돌이켜야 합니다. 영적인 긴장 상태에서 말씀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하는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님의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한 것임을 예수님께서 12절에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유대인은 장례를 치를 준비가 된 시신은 천이나 옷감으로 여러 겹 감싸면서 그 사이에 향신제와 향료를 집어넣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기름을 부은 행동은 당신님의 장사를 위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서 최대한 가능한 모든 기회의 가르침을 사용하신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 13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여인을 통하여 드러내시고자 하는 것은 복음이 유대만이 아니라 온누리에 전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이 여인이 행한 일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행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강조하는 것이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녀의 행동을 기억하셔서 마지막 심판 날에 인정하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심으로 예수님의 권위가 반영된 엄숙성이 있습니다.

 

이 여인에 대한 것은 성경의 기록 중 매우 이례적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기념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당신님의 행하신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을 기념하라는 것은 그녀의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여인이 즉 마리아는 예수께서 모진 고난을 당하실 것을 미리 알고 가슴 아파하며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한 유일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눅7:38절에서는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라고 기록함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애도한 표시였습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여인의 행동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러 사건들 속에 이 여인의 사건은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념하라고 하는 것은 유대 지도층이나 여러 해 동안 따라다닌 제자들도 깨닫지 못한 것을 마리아는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직접 동행을 하고 말씀을 나눈 사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한 귀한 성도입니다. 복음의 은혜를 깨닫고 믿는 일이 사람의 힘과 지혜와 지식 그리고 재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유능한 목사라고 해서, 직분을 통해서 섬김을 드러낸다고 해서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적으로는 알 수 있겠지만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나의 힘과 지혜로 불가능한 것으로 전적으로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회개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나를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지팡이교회는 내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을 구하고 이 여인의 믿음을 생각하면서 주만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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