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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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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7:11-26
강설날짜 2018-03-11

지팡이교회는 “가룟 유다의 마지막 인생의 의미”를 알았을 것입니다. 누구나 마지막 순간은 있습니다. 그 때 어떤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순신 장군은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도 복음을 끝까지 전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서 그것도 “저주하며 맹세”하여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참으로 비겁자요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 뜰에서 그것도 예루살렘 성전이 잘 보이는 곳에서 심문을 당한 일과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지는 것을 보던 유다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가 없다는 것을 안 유다는 “스스로 뉘우쳐”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배신한 대가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고자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고 하면서 “네가 당하라”고 한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로마의 힘을 빌려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기 때문에 은 삼십을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혹독하고 처절한 대답을 들은 유다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돌이키기만 하면 한 없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데 어떤 선택을 했습니까? 가룟 유다가 돌이키고 회개를 해도 예수님은 십자가의 처형을 당할 것입니다. 유다 진정으로 회개를 했다면 베드로와 같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사도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 최초의 자살자가 된 것은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가룟 유다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함으로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성육신으로 오신 것입니까? 구원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것처럼 유다도 스스로 자신의 죄를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의미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강설(설교) 되어도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의미를 알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을 위한 출석은 당장은 도움을 얻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심판에서는 허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자신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마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라고 함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도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금요일 새벽이 다가오면 올수록 백성의 폭동이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죽여야 했기 때문에 빌라도 즉 로마의 힘을 빌리어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데리고 빌라도에게 가지만 관정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지붕이 없는 곳을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붕이 있는 곳은 의식적으로 부정하다고 하여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관정 밖에서 호소하는 그들에게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나온 것입니다. 빌라도는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은 요18:30절에서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자신들에게는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죽일 수 있는 권한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한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31a절에서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돌아가야 합니다. 결국 자신들의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31b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있어서는 내란죄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 유대인들 간의 종교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말을 들어준 것 같습니다. 33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이런 상황 속에서 빌라도의 재판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왜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입니까? 산헤드린 공회에서가 예수님에 대한 조롱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주된 고소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심문했을 때 ‘신성모독’이라고 하면서 눈을 가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러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고소를 해야 하지만 그것으로는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정치범으로 고소하여 내란죄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인의 왕’으로 소개하여 정치범으로 기록을 합니다. 하지만 병행본문인 눅15:3절에서는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눅23:2절은 구체적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라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세 가지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백성을 미혹한다는 것으로 잘 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로마의 국가에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잘 알지만 세상 사람도 잘 알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즉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죽이고자 제9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자칭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고소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의 왕”과 “유대인의 왕”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왕은 유대 지역을 다스리는 뜻으로 분봉왕인 헤롯을 가리켜 호칭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유대인의 왕은 아주 중요합니다. 마2:1-2절에서 동방 박사들이 헤롯에게 처음으로 사용을 합니다. 그럴 때 헤롯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 즉 두 살 이하는 모두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것은 메시야를 의미하기 때문에 빌라도는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는 아주 교묘하게 정치범으로 몰고 가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으로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의 왕’ 정치범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아주 교묘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똑똑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한 산헤드린 공회의 마음을 꽤 뚫어 보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고 했고, 막15:10절에서도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런 점을 알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런 빌라도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은 산헤드린 공회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일 수 있는 세 가지의 고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있는 예수님은 곧 바로 ’옳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빌라도의 질문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변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있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빌라도가 질문한 대로 유대인의 왕이지만 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종류의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산헤드린 공회원인 그들은 12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는 것입니다.

 

아무 말로 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면서 빌라도는 13-14절에서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의 세 가지 고소에 대해서 답변할 것을 축구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아니할 때 놀라워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는 것은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그들이 계속해서 당신을 죽이고자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변호를 해서 죽음을 면하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답답했을 것입니다. 또한 빌라도는 자신의 곤경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답변을 촉구한 것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고소를 당하면 수단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방어합니다. 죄가 있더라도 거짓말을 하면서 무죄를 증명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잠잠하심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무죄를 주장하지 아니하면 로마법으로는 유죄를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병행본문인 눅23:6-10절을 보시면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갈릴리 지역 분봉왕인 “헤롯 안디바”에게 보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나고 싶어 했고, 이적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자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무죄라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예수님에 대해서 빌라도는 로마의 법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석방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헤롯 분봉왕도 죄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월절이 다가온 것을 알고 15절을 보시면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시기하기 때문에 죽이고자 공모하지만 빌라도는 사태를 관찰하고 죄 수를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하여 놓아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16-18절에서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와 예수님을 선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단순한 죄를 지은 자가 아닌 바라바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석방하려고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을 다스리면서 명성을 얻기 위해서 고안해 낸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맞춰 그들이 원하는 죄인을 풀어주는 일을 이용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풀어주면 자신이 더 통치하기에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아이러니 한 것은 ‘바라바’는 아람어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대조하는 것 같습니다. 빌라도는 두 인물을 대조함으로 그들이 현명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빌라도가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19절을 보시면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까? 아니면 재판의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까? 또 아니면 예수님께서 꿈을 통하여 초자연적인 계시를 내려주셨던 것입니까? 하여튼 ‘꿈’으로 인하여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옳은 사람’이라고 함으로 헬라 세계에서 의롭다는 것은 신과 이웃에 대해 정당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욱 무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빌라도의 입장에서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말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무죄라고 생각을 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20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산헤드린 공회원인 그들은 백성을 동원하여 왜곡된 주장을 하면서 바라바를 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사형하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진퇴양난에 걸린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위해서 무지한 백성을 동원한 것입니다. 오늘날 말씀이 선포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교묘하게 포장하여 속이는 것은 마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실수한 후에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수정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말씀을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진퇴양난에서 어떻게 합니까? 21절을 보시면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백성들은 바라바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빌라도는 22a절에서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고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다. 하반절을 보시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아주 놀랍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죽음의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그들도 종교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죽이는 죄에 가담한 것입니다. 총독은 죄수를 십자가에 처할 권리를 지니고 있으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해 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로마인에게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방인에게 사용한 방법 중 가장 심한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의 요구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판단을 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23절에서 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설득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죄라는 것을 옹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더욱 거세게 외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소리에 놀아나면서 더욱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된 것입니다. 병행본문인 눅23:22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요19:1-4절을 보시면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따져 물었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6절을 보시면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은 이런 수치심을 당하면서도 나를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빌라도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풀어주고자 했지만 더 두려웠던 것이 있습니다. 24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더 강력하게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무지막지한 폭력으로 변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민란이 두려워 어떻게 했습니까?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면서 나는 죄가 없으니 너희들이 당하라는 것입니다. 빌라도에게는 강한 권력이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유대인의 민란의 힘에는 가장 약한 법입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양심과 소신을 모두 포기한 것입니다. 병행본문인 요19:11절을 보시면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가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음성을 잘 들었던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25절을 보시면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저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정치적 묘략과 권력 등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를 죽이기 위해 이루 말할 수 없는 저주의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어떻게 합니까? 26절을 보시면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로마의 법에 의하면 사형을 하기 전에 먼저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주면서 사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 채찍에는 작은 쇠조각이 달려 있어서 맞으면 살이 파이고 피가 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모두에게서 배반을 당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들은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자신들이 후손에게 돌린 저주는 실제적으로 주후 60-70년에 일어난 전쟁에서 예루살렘이 무너졌고 120만 명이(?)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로부터 나라를 잃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빌라도가 백성들 앞에서 죄를 감당하라고 돌리었고, 종교지도자들은 유다에게 모든 책임을 넘김으로 모두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했습니까? 지팡이교회는 양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당시 백성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쳐하라고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들의 폭동을 두려워한 빌라도는 결국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외면했습니다. 또한 종교지도자들도 가룟 유다의 양심을 외면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는 양심을 속이지 마시고 예수님의 길을 잘 가십시오. 종교지도자들과 빌라도는 서로 책임을 회피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복하시면서 결국 그들의 죄 값을 감당하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일어난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당신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당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라도 한 자라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에 포함되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며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 예수님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지팡이교회는 양심을 속이지 마시고 복음의 증인자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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