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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6:1-5
강설날짜 2019-07-07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행16:1-5)

 

지난주 강설은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다른 사역의 길로 가다”였습니다. 서로 다른 사역의 길로 2차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사역을 통해 교회가 성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휴식한 후 그들이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지역을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형제들을 재방문하여 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권면하고자 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같은 마음이었지만, 마가 요한을 데려가는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1차 전도여행 때 끝까지 동행하지 못하고 에루살렘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친척이기에 꼭 데리고 가야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서로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각자 다른 길을 떠나게 됩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즉 바나바는 마가 요한과 함께 1차 전도여행지로 출발했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난 것입니다.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였습니다. 신자들이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20ec0dac.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676pixel, 세로 403pixel

 

오늘은 계속해서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을 강설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출발한 후 타우루스 산맥을 타고서 그 산을 지나서 산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한 지역입니다. 기억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 지역은 바로 ‘더베’입니다. 바울은 더베를 거쳐 루스드라에 도착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여기서 누구를 만난 것입니까?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디모데’입니다. 이곳은 대다수 이방인만 생활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회당이 없습니다. 회당을 지을 만한 유대인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에서 많은 성과를 거둔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디모데를 소개할 때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지역에 교회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제자는 기독교의 진리를 잘 배움으로 진실 된 신앙인이라고 할 때 쓰입니다. 디모데는 확실하게 주의 길을 가는 제자라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즉 이방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제자였습니다. 부모를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할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를 아주 각별하게 생각 했습니다. 제자라고 불리었다는 것은 디모데의 어릴 적 성장 배경과(덤후3:15) 그 신앙의 열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특히 바울은 고전4:17에서 디모데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 어떤 신자들에게도 또한 제자들에게도 ‘아들’이라는. 호칭을 쓴 기록이 없습니다. 아주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루스드라 지역에서 바울과 디모데를 만나게 하심으로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디모데는 유대인의 생활과 헬라인의 생활 즉 이중 문화에 잘 적응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달할 수 있고, 접근할 힘이 있었을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라고 소개합니다. 그 지역에서 아주 덕망 있고, 인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엄마가 이방인과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외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좋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조건은 바울의 사역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디모데에 인품을 오늘날 사역자가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지도자를 세울 때 매우 중요한 덕목이기도 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에게 잘 대접하지 못 하는 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어찌 잘할 수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케 하는 것 같습니다.(마15:4)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제자로 얻은 디모데에게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3절을 보시면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할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루살렘 공회의를 통해 이방인에게 할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례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하면서 할례를 시행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할례를 그토록 반대했는데 왜 해야 했는가? 의문이 들 것입니다. 유대교를 믿는 자들에 의해 바울은 자신의 신념을 굴복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방법으로 할례를 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디모데와 함께 사역하면서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줄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동안 디모데가 할례를 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도 헬라인 지역에서 생활한 풍습으로 생각됩니다. 모친은 유대교였지만, 아버지는 헬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교에서 행하는 할례에 대해 야만족이 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는 1절과 3절에서 강조하는 것이 디모데의 아버지입니다. 그를 가리켜 ‘헬라인’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신앙이 없었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삼으려고 했을 때 부친의 출신으로 말미암아 어떤 문제가 야기되었다는 것을 보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지역에서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생활하는 자들에게는 디모데가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어머니가 아들을 바르게 가르치지 아니했다고 생각하여 배교자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줌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물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대체로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만약에 디모데가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라는 것을 알면 위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한 일꾼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고전9:20a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입니다. 바울은 유대인이었지만, 이방인에게도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습관에 따라 선교를 한 것입니다. 바울과 동행을 한 실라처럼 디모데도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부터 어려움을 당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만약에 할례를 하지 않고 복음의 증인 자가 되었다면 디모데로 인하여 바울도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잘 받았지만, 할례를 하지 아니한 것을 알 때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혐오하고 금기시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유대인처럼 복음을 전한다면 회색분자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한 후 할례를 한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위해 무엇이 좋은 방향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후 1차 전도 여행지를 돌면서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 사항을 전달해 준수하도록 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여기서 규례는 예루살렘 공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정은 구체적으로 안디옥과 수리아 및 길리기아 전역에 걸쳐 있는 신자들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방인 회심자의 문제는 모든 교회의 영향을 주었으므로 바울은 여러 성으로 다닐 때도 공회의의 결정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바울은 여러 성을 다니면서 즉 순회하면서 복음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열정과 근면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으면 합니다. 신앙인(신자)의 모습과 종교인(교인)의 모습은 참으로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신앙인이 그리스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듯이, 종교인도 그리스도를 종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신앙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듯이, 종교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신앙인이 입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듯이, 종교인도 입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신앙인이 세례를 받듯이, 종교인도 세례를 받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해 있습니까? 바울은 오직 주님을 향한 마음이었습니다. 또 생각해 보십시오. 신앙인과 종교인 모두는 교양 있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과 종교인 모두는 세련된 옷을 입고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그리스도를 주님(Lord)으로 모시고 삶을 살아가지만, 종교인은 그리스도를 메시야가 아닌 위로자 또는 현명한 자로 모시고 살아갑니다. 신앙인은 언제든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가지만, 종교인은 십자가를 목에 걸고 넓은 길을 가고자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만, 종교인은 욕망의 인도함을 받고자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종교인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과연 그대는 어느 쪽인가? 바울과 디모데는 오직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가는 동역자였습니다.

 

참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바울에게 두 가지 좋은 결실이 있었습니다. 5절을 보시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두 가지가 무엇입니까? 교회들이 믿음이 견고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에 속한 신자들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정을 존중하였습니다. 오늘날 시대에도 성경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다른 것을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 열심이었고, 교리의(예루살렘 회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전달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은 안 후 진취적인 복음의 증거 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의의 결정은 바울에게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굳건하게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 사이의 고대 율법 문제가 효과적으로 해결되자 새로운 이방인들이 교회에 더 많이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이 확장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결과입니다.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성장은 있을 수 있지만, 참다운 교회의 성장으로 자랄 수 없습니다. 믿음 없이 외적인 성장을 하지만 결국 교회가 스스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2차 전도 여행을 위해 실라와 함께 시작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의 교회들을 방문하고 그들을 굳게 세우는 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들에게 예루살햄 공의회에서 결의한 규정들을 전달함으로 교회가 든든히 성장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받지 않고 누구나 교회의 일원이 될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믿을 수 있도록 바울은 디모데를 선택했습니다. 이방인의 생활과 유대인의 생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로 어려움을 당할 수 있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칼빈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할례 받지 않은 디모데와 함께 다니는 것에 대하여 피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한 것은 예루살렘 공회의에만 매이지 않고 가급적 유대인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힘을 쓰지 마시고, 오직 성경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주의 길을 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믿음 안에서’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길을 잘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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