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38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17:1-9
강설날짜 2019-08-18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LoL2aA6fB-k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메시지(행17:1-9)

 

“부흥과 개혁사”라는 출판부에서 나온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책에서 백금산 목사님께서 이런 질문과 답을 하였습니다. (추천의 글 중에)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각자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에 대한 답으로 백금산 목사님은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입니다. 책의 저자도 같은 맥락으로 미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한 말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입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활하는 신자들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강설(설교)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를 위해 선물로 주신 것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기 때문에 복음이 증거돼야 합니다. 복음이 증거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에 사로잡혀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즉 구원함을 받은 영광스러운 자녀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해 개그맨처럼 웃기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속에서 긍정의 힘만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세상의 종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예수님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은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으로나, 학문으로나 부러울 것이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배설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의 모습으로 일꾼이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의미를 알기에 자신의 몸을 헌신했습니다. 교회는 목사의 것도 아니요, 바울의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웠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사역도 예수님께서 지상명령으로 주신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전도입니다. 전도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온 누리에 전하는 것입니다.

 

구원함을 받은 사도 바울은 자신을 헌신하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열심이었습니다. 지난주 강설은 “감옥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 그리고 구원”이었습니다. 간수는 감옥 안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기에 바울에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전하지 아니하면 세상과 같은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는 사도 바울처럼 구원의 열쇠를 지상명령으로 전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간수는 가족들을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간수는 바울과 실라의 매로 맞은 상처를 씻어 주었습니다.

 

간수에게 일어난 사건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었던 후 “상관들이 부하를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입니다. 죄가 없으니 석방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결론을 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감옥 안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수는 상관들의 말을 바울에게 전하면서 이제는 감옥에서 나가 평안히 가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은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풀려나와서 떠나기로 작정하고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빌립보 지역에 교회가 잘 세워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경험한 바울은 어디로 향했습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입니다. 감옥에서 일어난 놀라운 사건은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얻도록 한 후,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도착을 합니다. 짧은 거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략 160킬로미터 거리를 걸어온 것입니다. 바울이 걸어온 도로는 로마의 주요한 도시들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먼 지역이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는 주전 315년 마게도냐의 왕 카산더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카산더는 빌립2세의 딸인 자기 아내 즉 데살로니가의 이름을 사용하여 명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는 가운데 마게도냐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습니다. 로마는 데살로니가의 중요한 위치 때문에 마게도냐의 두 번째로 가는 행정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내륙의 풍요로운 농경지를 동쪽에 있는 육로와 해로을 연결하는 군사적인 요충지였습니다. 빌립보 지역에는 없었던 ‘회당’이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좀 더 쉬웠을 것입니다. 회당이 있어서 바울과 실라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선교지로 택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휴식을 취하기보다 선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환경을 관광하기보다 지상명령에 충실했습니다. 2절을 보시면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잘 알기에 성경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전하지 않는 것은 참된 신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와 싸워 승리했습니다. 또한, 종교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도 말씀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손에 잡히는 성경책을 가지고 복음을 쉽게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루마리로 되어 있어서 가지고 다닌다면 한 보따리가 넘을 것입니다. 책가방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바울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학문과 가족의 배경이 아니라 성경을 가지고 강론한 것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마치 무답을 하듯이 그리고 연설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전한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으면서 적어도 한 번 이상 빌립보 교회로부터 ‘쓸 것’을 공급받았습니다.(빌 4:16) 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친히 노동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푯대를 향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살전2:9절은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오늘날 목회하기 힘든 시대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전한 복음은 무엇이었습니까? 3절을 보시면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입니다. 바울은 회당에서 구약성경에 근거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절대적인 필요성을 전한 것입니다. 회당에서 전했기 때문에 구약의 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의 강설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눅24:26절을 보시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 인정하고 고난과 부활을 잘 몰랐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당하는 고난을 싫어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더욱 강조함으로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한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말로는 쉽게 넘어갈 수 있지만, 바울은 뒤에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람어로 메시야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야’이니까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강설한 것입니다. 메시야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방신과 다르며 세상의 임금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고난과 부활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초능력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 성육신으로 오셔서 사람과 같이 고생하고 괴로워하였으며 죽음의 공포를 당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메시야를 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증거와 선포로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부활은 오히려 메시야이심을 성취한 것입니다.

 

우리가 들을 때는 ‘당연합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강설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는 더 놀라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말씀을 잘 알기에 바울이 전한 메시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메시지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이해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도 너희들이 잘못 알고 있는 메시야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메시야의 참뜻을 알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그 오묘하고 신비로운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을 생각해 보아라. 예수님의 행적과 부활을 비추어볼 때 메시야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강설을 들은 후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시면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즉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믿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복음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었습니다. 그중에 높은 위치에 있는 귀부인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다른 많은 사람도 믿었습니다. 개종한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를 따라 다녔습니다. 말씀을 듣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 듣는 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어려움이 다가왔습니다. 아마도 개종을 한 것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은(유대교) 시기와 질투가 생긴 것입니다. 개종했다는 것은 회당에는 굉장한 손실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완악함은 시장에서 불량배들을 동원해 무리를 모았습니다. 5절을 보시면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불량배를 모은 그들은 떼를 지어 야손의 집으로 침입했습니다. 야손도(여호수아 또는 예수에 대한 헬라어 번역 이름) 기독교로 개종을 했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그 집에 자주 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손의 집으로 간 것입니다. 그들은 권력과 영향력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의 일행을 시기한 것입니다. 복음을 믿기보다 훼방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분이 메시야요 예수님이신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이 강설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야손의 집에서도 발견되지 않자 어떻게 합니까? 6절을 보시면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입니다.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에게 간 것입니다. 여기서 읍장이란 도시의 통치자로 그 지역을 담당하는 치안 판사입니다. 로마는 데살로니가를 식민지가 아닌 자유 도시로서 인정하여,주후 1세기에는 다섯 명의 읍장들이 이 도시를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바울의 메시지을 듣고 개종한 야손과 형제들을 시기한 자들은 종교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확대를 한 것입니다. 죄명을 거짓으로 만들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라고 한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고발한 것입니다. 이렇게 고발하는 것은 가이사의 칙령을 어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를 무너지도록 하려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로마법으로 보면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잘 설명한 것이 7절입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이사의 칙령은 대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로부터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들의 왕이라고 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같은 맥락입니다. 거짓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자신들을 위한 속임수입니다. 당시 로마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함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사의 칙령을 지키는 것은 충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확대하여 고발하는 것입니다. 고발한 자들은 ‘다른 임금 곧 예수’라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영리한 계획 아니겠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타락한 죄인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이사 외에 다른 왕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반역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의 끝에 가장 큰 죄인 반역죄를 야손과 형제들에게 덮어씌운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바울의 강설 중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로마에 반역하여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임금을 세웠다고 고발한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8절을 보시면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즉 읍장들은 이러한 중대한 죄명의 고소 사건을 듣고 그 진위를 조사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음모에 쉽게 말려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발한 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법과 질서였습니다. 고발한 자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바울의 입장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과 읍장들도 있었습니다. 읍장들도 이러한 고소에 대해 성의 없는 반응을 보이면 그들 역시 반역 공모죄를 범하는 결과를 낳게 되므로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을 보시면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즉 보석금을 받고 풀어준 것입니다. 아마도 야손은 바울이 치안을 방해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야손과 형제들은 어떤 이의를 제기했는지 알 수 없지만, 바울의 일행을 도시 내에 다시 들이지 않겠으며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보석금을 내는 정도로 충분히 석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성경을 강설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메시지는 비교적 짧은 복음 전도였지만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들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는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들을 싫어하여 읍장들에게 고소했습니다. 이유는 바울 일행에게 거처를 제공한 야손과 형제들을 가이사의 칙령을 어긴 것으로 즉 정치적인 고발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손과 형제들은 바울 일행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을 전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당연히 최후의 심판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노력은 살전1:1-4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우리도 이러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힘을 다해 믿음 생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메시지는 굳건한 신앙과 인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기쁨으로 보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324 교회를 위해 덕을 세우라 전은덕 고전14:10-19 2024-03-17 2
323 방언과 예언은 무엇일까? 전은덕 고전14:1-9 2024-03-10 8
322 사랑은 은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다 전은덕 고전13:8-13 2024-03-03 16
321 사랑 과연 사랑의 은사인가? 전은덕 고전13:1-7 2024-02-18 6
320 더 큰 은사는 무엇일까? 전은덕 고전12:28-31 2024-02-04 4
319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전은덕 고전12:12-27 2024-01-28 15
318 성령의 은사 전은덕 고전12:1-11 2024-01-21 13
317 사도 바울이 성찬을 말한 이유? 전은덕 고전11:17-34 2024-01-14 15
316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 전은덕 고전11:1-16 2024-01-07 13
315 하나님 나라에 호적을 둔 교회 전은덕 시87:1-7 2023-12-31 13
314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전은덕 눅2:1-14 2023-12-24 11
313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은덕 고전10:23-33 2023-12-17 22
312 사람이 주 예수보다 강한가? 전은덕 고전10:14-22 2023-12-10 11
311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왜 그럴까? 전은덕 고전10:1-12 2023-12-03 23
310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도 바울2 전은덕 고전9:14-27 2023-11-26 19
309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도 바울 전은덕 고전9:1-12 2023-11-19 14
308 우상 제물을 먹을까? 말까? 전은덕 고전8:1-13 2023-11-12 12
307 정혼자를 둔 자들에게 주는 교훈 전은덕 고전7:36-40 2023-11-05 13
306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전은덕 요1:1-4 2023-10-29 14
305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마음 전은덕 고전7:25-35 2023-10-08 4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7 Next
/ 17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