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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22:1-11

사도 바울이 다메섹 경험으로 변론(행22:1-11)

 

예수님께서는 타락한 백성을 위해 오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타락한 백성을 건강한 사람으로, 순결한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가들을 통해 교회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믿음의 선배님들은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신앙고백서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세상의 물질과 야망 그리고 권력 등에 의해 메가처치의 노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큰 교회만 메가처치의 꿈을 꾸고자 하는 것입니까? 작은 교회이면 아름다운 교회 즉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인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자들은 교회가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성장하지 아니하면 신자들은 힘들어하고 메가처치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목회자들은 강박에 사로잡혀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로 지향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타락한 교회가 많다고 해도 주님의 교회 즉 신자들을 구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속한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며 순결한 교회, 정결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의지로는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짓 신자들은 메가처치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의 교회는 신자들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순결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메가처치 즉 양적인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순결한 신부를 구원하십니다. 지팡이 교회는 순결한 신부로서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참된 교회의 표지 즉 강설과 성례와 권징(기도)을 성경적으로 해야 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권징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돌이킬 수 있도록 섬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그동안 강설을 했던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주후 57년 초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이 모은 헌상(봉헌)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할 사절단과 더불어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유월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노력한 것을 알 것입니다. 하지만 그 여행을 쉽지 않았습니다. 겐그레아 항구에서 몇몇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바울은 육로를 거처 네압볼리 항구에 가서 배를 타야만 했습니다. 여행 일정의 변동으로 바울은 겨우 오순절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까?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바울은 새로운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이방인 지역에서 많은 수고를 했으니 쉼을 얻도록 했습니까? 환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성전의 규례에 복종한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복종을 통해 무지한 자들 그리고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 나실인과 함께 서원에 동참합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무리를 충동하여 소동을 일으킨 자들은 오해했던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 즉 이방인 드로비모와 함께 성전에 데리고 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내를 거닐고 있는 바울과 드로비모를 잡아 성전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전 안에서 살인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 일어난 소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큰 소동은 결국 로마 군인인 천부장이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로마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개입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가 만들어 놓은 길을 통해 온 누리에 복음이 확장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천부장의 개입으로 바울을 죽이고자 했던 소동은 실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내로 들어가는 바울을 죽이고자 했기 때문에 군사들에게 들려갔습니다. 그만큼 소동이 대단했다는 증거입니다. 행21:36절은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바울은 천부장 앞에 끌려갔습니다. 그때까지 유대인들이 흥분하며 떠들었기 때문에 천부장은 바울을 볼 때 선동가 정도로 판단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능숙한 헬라어를 사용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을 소개할 때 다소 출신 로마 시민권자를 가진 유대인임을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천부장에게 요구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연설할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바울의 요구를 천부장은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기회을 얻은 바울은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 하지만 바울의 연설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경륜과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전의 의미도 모르면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히브리 말로 연설한 내용입니다. 22장 전체를 보는 것이 좋지만 시간상 11절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형들아 내가 지금 여러분 앞에서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입니다. 부형들이라는 것은 형제들과 선배 여려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연설하기 위한 서두이면서 정중한 표현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놀랍게도 스데반이 한 연설이기도 합니다. 아니러니하게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려고 할 때 들었던 말을 지금 사용하고 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바울은 히브리 말로 변론합니다. 소동은 요란했는데 바울이 히브리 말로 부형들아라고 할 때 조용해지며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2절에서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 바울은 헬라어로 천부장의 주의를 끈 것처럼, 히브리 말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로 말했기 때문에 소동을 진정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부형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생각하면서도 히브리말로 말하자 감정이 누그러져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호기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조용해진 가운데 바울은 3절에서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바울은 자신이 태어난 장소와 양육 그리고 정식 교육을 어디서 받았는가를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이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것을 알고 있어서 말한 것입니다. 나도 당신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성에서 자라’입니다. 바울이 죽음의 직면해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중요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가 학문한 곳은 가마리엘이었습니다. 가마리엘은 당대 오늘날 서울대학교와 같은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 즉 랍비 교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합법성을 증명하는 신임장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부형들처럼 나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열심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이야기를 합니다. 4절을 보시면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행8장과 9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면 누구나 잘 알 것입니다. 바울의 도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절실하게 믿고 있었던 도 즉 유대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도는 모두 멸시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바울은 당신들보다 나는 더 열심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처넣은 사실이 있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누구를 이야기합니까? 5절을 보시면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서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기독교인을 핍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나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생활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의 공문을 받아서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 놀라운 체험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6절에서 말합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하늘로부터 큰 빛은 하나님의 광채로 생각됩니다. 영광의 광채는 그것도 대낮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정오의 태양을 무색하게 할 만큼 강한 광채였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바울만 경험한 것이 아니라 그와 동행한 자들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만 찬란한 빛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인하여 눈이 멀어진 것을 동행하는 자들이 도와주었습니다. 왜냐하면, 함께 있던 사람들은 별 이상이 없었으나 바울만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을 읽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저자인 누가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경험한 것을 3번 기록합니다. 9장 22장 26장입니다. 이렇게 중요하게 기록하는 것은 초대교회 역사에서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중요한 위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경험한 것을 더 말합니다. 7절을 보시면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입니다.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직접 알도록 한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식 이름이고 사울은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바울은 누구의 명령을 따르기보다 능동적이면서도 지속해서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다는 것을 스스로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당신님을(자신) 핍박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회로서 하나의 보편성을 누리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바울은 그것이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해 덧붙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9장에서 없던 나사렛입니다. 예수님 이름 앞에 나사렛이라는 지명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름이 많았기 때문에 나사렛이라는 것을 사용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바로 그 나사렛 출신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9절을 보시면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입니다. 바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는 경험에 참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주위 사람들은 빛을 보기는 하였으되 그것을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계시로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9:7절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바울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 하고 섰더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9절과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명백한 상호 모순적인 기록은 헬라어 원본을 검증함으로써 해결됩니다. 헬라어는 소리를 소음으로 듣는는 것과 메시지로 듣는 것에 대해 명확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과 동행했던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소리로 듣기는 했지만, 메시지가 담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은 서로 다른 청중을 겨냥함으로 약간씩 강조점을 달리한 것 같기도 합니다.

 

바울의 경험은 우리가 표현할 수 없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입니다. 바울이 주님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명확하게 말합니다. ‘다메섹으로 들어가라’입니다. 너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질문을 기록함으로써 그의 회심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함으로 당신들도 돌이키라는 메시지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행한 일과 도를 따랐던 신념이 잘못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해야 할 일을 주시는 것입니다. 돌이킴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하시는 은혜입니다.

 

다메섹에서의 경험으로 바울은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도움을 받았습니까? 11절을 보시면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입니다.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바울을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동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도움을 받지만, 앞으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 잘 알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해치려는 유대인들 앞에서 충실하게 율법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충성스럽고 양심적인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자신 있게 반론합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더 힘들어질 수 있는 현실에서 바울은 참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자신이 했던 일을 증명하여 줄 수 있는 자들이 누구하고 말하였습니까? 제사장과 장로 즉 가장 뚜렷한 증인 자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가장 적대자라고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신자들을 죽이는 살인자였습니다. 유대교를 믿지 아니하고 배교자라고 생각하면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교회의 최악의 적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심으로 놀라운 사역의 길로 사용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해야 합니다.

 

사역의 길로 부르셨지만, 결코 평탄하고 고난이 없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잘 소개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소 출신이며, 이 성에서 자랐고 가마리엘의 문하에서 랍비로 교육받았다는 것을 연설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대인으로서 철저한 훈련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다메섹에서 경험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 것은 일시적이고,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의 경험은 이처럼 세계사에서 큰 획을 그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울에게 영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것처럼 주님을 믿는 우리도 같은 것입니다. 세상의 삶에서 변화되어 새로운 생명으로 회복된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증인 자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푸른 초장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길에 동참하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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