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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이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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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 나라, 천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과 말하는 것이 다릅니다. 성경에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우리 말하는 것도 고치고 사상도 고쳐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이 이야기한 것을 믿어야 하는데 이미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왔고,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이야기해도 실제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미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는 동시에 아직 아닌 하나님 나라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장애인들의 장애가 모두 극복되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확실히 임하였다면 모두 장애가 나아야합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장애가 극복되고,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장애가 그대로 존재한다면 예수 믿는 동기가 이상해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왜 하나님 나라의 극치상태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할 때 최고의 상태 즉, 극치 상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의 극치 상태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미 온 하나님 나라에는 장애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도달했을 때 주께서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영혼과 몸, 이 두 가지 측면은 항상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장애라는 말을 굉장히 외적인 것으로만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의 시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에서 장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상당히 많이 그렇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살다가 한 팔을 잃었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나님 나라의 극치 상태에서도 한 팔을 잃은 상태에서 있을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유일한 예외로 하나님 극치 상태에서도 장애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는 예수님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모릅니다. 추론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나라 극치 상태에서 온전케 될 것이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못 박히신 손을 가지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옆에 찌른 창 자국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때에는 분명히 그 창 자국과 못 박힌 손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창 자국이 있었으니까 지금 장애를 가진 사람도 그대로 있을 거라고 오해하면 안됩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바로 죽으신 분이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못 박힌 손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지금 과연 하늘에서 예수님이 그 상처(장애)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나중에 가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강조해야할 것은, 주님이 우리를 모든 면에서 온전케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장애인일까요?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고, 세리와 죄인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실 모두가 죄인이지만, 회개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을 장애와 비장애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흔히 장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장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도 극복하시고, 우리가 생각하는 정신적, 물리적인 장애도 극복하실 것입니다. 모든 장애는 회복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현재 장애(물리적, 정신적, 영적)로 고통 받고 있는 모두에게 큰 소망입니다.

 

 

 

주님, 지금 당장 장애를 고쳐주실 수는 없나요?

 

 

 

주님이 장애를 극복하는 일을 지금 해주실 수 있습니다. 더러 병 고침을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일 때문에 더러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그러면, 지금 다 해주시죠! 주님!’

 

만약 지금 다 고쳐주시면 예수를 믿는 목적이 나의 장애 극복으로 와전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목적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 나라 극치 상태에는 모든 것이 극복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몇몇 예를 들어 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분명하게 고쳐진다는 일종의 사인(sign)으로 하신 일이죠. 분명 오늘날에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장애가 고쳐지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경우에 그래야 한다든지, 내가 신앙이 좋으면 다 장애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상황에 있던지 장애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나 그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 모두가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바라면서 주님의 프로그램에 따라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장애가 있는 걸까요?

 

 

 

그러면 애초에 장애를 만드셔서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실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연적인 악이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죄를 짓지 않았고, 모든 인류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장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으로부터 이런 것을 배워온 사람들은 잘못된 결론으로 봉착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중도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풀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선천적 장애는 누구의 죄 때문인가?’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부모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이 사람이 살면서 죄를 지을 것을 미리 알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인가?’

 

이 때, 주님이 하셨던 아주 중요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장애가 이 사람들 때문에 생겨진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너희들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멸망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므로 다 어려움을 당해야 마땅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마땅히 다 장애를 가져야 합니다.

 

 

 

몸과 마음의 고통, 죄로 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독특한, 그 사람만의 죄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요한복음 9). 죄에 대한 인류 전체의 책임으로 각가지 형태의 장애가 드러납니다. 작게는 눈이 나쁘다든, 간이 좋지 않다든지 등 몸의 연약함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장애의 경중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장애와 병은 다양한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자기 몸을 마음대로 사용한 사람은 그 결과로 심한 병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 장애는 우리의 죄악을 돌아보게 하는 기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님이 장애를 주셨다고 단언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욥이 병들었을 때는 그 병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욥이 죄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욥의 친구들처럼 정죄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누구의 죄 때문이라는 일반적,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신앙이 있으면 장애가 다 극복되어야 한다고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이 일어나서 장애는 극복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이적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 편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 교수님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어 지난 30여년동안 휠체어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부인해본 일이 없습니다. 비록 내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이 때문에 항상 평안을 누립니다. 물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모든 것이 극복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이를 믿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도 나를 온전케 하실 그 사실을 계속 신뢰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신앙이 있다면 장애가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증거를 삼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당장 장애를 고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치중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 보이기 원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현실의 세상 속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를 삽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 안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채로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다시 오신 그 날, 몸이 부활할 것입니다.

 

 

 

몸의 부활은 기독교의 중심 사상입니다.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 중 대표적인 이들이 초대교회 이단 가운데 영지주의자들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의 구원만을 추구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만 구원받기 때문에 몸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이 세상에서 벗어나서 영혼만 하나님이 계신 곳에 있습니다. 영혼이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에 있던 몸과 영혼이 다시 합쳐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몸의 부활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몸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가 없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영지주의가 나타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다빈치코드라고 하는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다시 영지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영지주의가 진짜 기독교라고 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도마복음서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영적인 것만을 강조하고 물리적인 것을 무시 하는듯한 말씀들만 모아놓은 복음서입니다. 도마복음서의 방향은 영혼만의 구원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장애인을 요즘 흔히 쓰는 말로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영지주의 나름대로는 장애 극복이 있습니다. 장애가 있는 몸으로부터 벗어나서 영혼만 구원을 받는 것이니까요. 비장애인도 영혼만 구원받고요. 그러나 이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진짜 기독교는 몸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몸이 다 온전해지는 것, 이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온전해진 몸으로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혹시 장애가 있어 주님을 마음껏 섬기지 못했던 사람들은 분명 다른 방식으로 주님을 잘 섬깁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사용해서 주님을 마음껏 섬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갈망이 더할 것입니다. 영지주의처럼 이런 갈망을 없애버린다면 장애인이 주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사야서는 주님이 오실 때 꼭 장애인의 회복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은 현재 비정상입니다. 주님은 그 날에 이 모두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메시아 오시는 때의 예언에는 이미 부활의 소망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모두 현실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우리가 생각대로 되지 않았어도 그 분이 가져다주심을 믿고 가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실 말씀을 믿고 우리는 그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큰 열쇠입니다. 장애에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이야기할 때 창조-타락-구속-극치를 이야기 합니다. 장애에도 동일하게 적용합니다. 창조 때는 장애가 없습니다. 타락 때문에 장애가 생깁니다. 이 때 무슨 죄 때문이라고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주께서 구원하십니다. 구원한다고 해서 금방 다되는 것이 아닙니다. 극치로 이르기까지 유예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은 장애를 가지고 믿음으로 행하는 기간입니다. 제가 확신하기는 하나님 나라의 극치 상태에서는 장애를 가졌던 모든 사람들이 장애는 나에게 은총이었다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장애인이 신앙을 가지고, 주님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 모양으로 돕는 것입니다.

 

 

 

부활과 고난은 나뉘지 않습니다.

 

 

 

흔히 서방교회는 십자가 중심이고, 동방교회는 부활 중심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누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함께 가야 합니다. 둘 중에 어떤 하나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부활의 희망이 같이 나타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어느 하나만 강조하면 안 됩니다. 요즘 들어 한국교회가 고난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 믿어서 영광받기만 기다합니다. 고난 받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장애인 사역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고난을 강조하면 장애인 사역을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을 강조하는 것은 동시에 부활의 희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온전해 지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야 가능합니다. 장애인 사역, 최대한 우리가 장애인의 필요와 손, 발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온전히 근본적인 해결일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가 못하는 것 다 해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맡깁시다. 주님께 맡겼다고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는 장애를 가진 사람만의 고난 아니라 우리의 고난입니다. 현재 고난도 부활도 제대로 강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불균형이 나타나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고난을 잊어버린 교회, 부활의 희망을 알지 못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로 여기서 누립시다!

 

 

 

자폐성 장애인의 경우 의사 표현도 안 되고 듣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장애인을 기어코 교회를 데리고 와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전달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해야 합니다. 복음은 강압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직접 일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손발이 더 필요합니다.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설사 앞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입으로 시인할 가능성이 없다하더라도 그들을 계속 붙들고 기도하면서 성령님이 일하시도록 함께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교회 공동체는 같이 사는 공동체입니다. 신앙은 지금 당장 치유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견디는 것입니다.

 

때로 비장애인들이 돕는 사역을 하다보면 돕는 입장이라는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월감을 가진 상태는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의식, ‘우월감, 열등감을 갖습니다.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 이 관계성은 장애가 없어진 하나님 나라의 극치상태에서도 유지될 것입니다. 서로가 있어 유익하고 행복할 것입니다. 도우면서도 우월감을 갖지 않고, 도움을 받으면서도 열등감을 갖지 않는 상태가 하나님 나라의 극치 상태의 예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극치 상태를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장애의 존재 자체는 우리의 장애요 고난이라고 생각하며 함께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교회의 진짜 모습입니다. 하나님 나라 완성의 때에도 모두 함께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함께합시다!

 

하나님 나라의 극치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던 장애인과 지금 할 수 없었던 모든 대화를 기대해봅니다. 설사 당장 절망이 먼저 찾아온다 할지라도 주님 다시 오실 그 날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날을 현재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실 것을 함께 고대하며 견디는 믿음은 장애 당사자, 장애 가족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오늘도 장애인과 함께하는 모든 주님의 사람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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