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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신앙고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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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직 신앙고백서는 1567년 개신교회의 순교자로 소천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 s, 1522-67)가 1561년에 당시에 스페인의 천주교 정부에 의해서 박해받던 프란덜스(Flanders)와 네덜란드(Netherlands) 교회들의 변호를 위해 불어로 작성한 것을 1566년 안트베르프(Antwerp) 대회(Reformed Synod), 1571년 엠덴(Emden) 대회, 1574년 도르트 대회(Dort Synod)와 1581년 미델부르그(Middelburg) 대회에서 수납하고, 화란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때인 1619년에 불어, 화란어, 라틴어 본들의 비교를 거쳐 도르트 전국 대회(the National Synod of Dort)에서 개정하여, 지금까지 화란 개혁 교회와 개혁파 전통의 교회 안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과 도르트 신경과 함께 가장 중요한 신조로 받아들여지고 고백되고 있는 귀한 개혁파 신조입니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제 1 조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de Natura Dei)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단순하시고 영적인 한 존재가 계심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영원하시고, 불가해적이시며[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으시며], 보이지 아니하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며,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히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고, 모든 선의 넘쳐흐르는 원천이시라는 것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고백은 칼빈과 그의 학생이었던 앙뜨안느 드 라 로셰 샨디우(Antione de la Roche Chandieu)가 작성하여 1559년 파리 대회(a synod at Paris)에서 개정되어 받아들여진 프랑스 신앙 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 제 1 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유일하며 단순한 본질을 가지신, 영적이고, 영원하시며, 보이지 않으시고, 불변하시며, 무한하시고, 불가해적이며(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으시고), 이루 말할 수 없으며(ineffable), 전능하시며, 전지하시고, 온전히 선하시고, 온전히 의로우시며, 온전히 자비로우신 한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고백합니다."

벨직 고백서는 하나님을 "단순하시고 영적인 유일하신 존재"(one only simple and spiritual Being)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하나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신 6:4; 왕상 8:60; 고전 8:6; 딤전 2:5;). 그런데 그 유일하신, 하나이신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이십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몸을 가지고 계시지 않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인 얼굴, 눈, 코, 입, 등, 손, 손가락, 발 등을 가지고 계실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들을 하나님께 돌려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하는 일종의 의인법적 표현, 정확히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anthropomorphism)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런 표현들을 볼 때에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어떤 몸을 생각해 보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성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 4:24).

이렇게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십니다. 로마서 1:20의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라고 말한 것에 의존하면서,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는 영적인 존재임을 선언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썩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디모데 전서 1:17과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이시니"라고 말하는 디모데 전서 6:16의 말씀도 같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보이지 아니하시고 볼 수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해당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하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을 뵈옴(visio Dei)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위에서 인용한 디모데전서의 말씀들과 모순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물리적으로는 영원히 하나님을 볼 자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영적인 생명을 회복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월필드는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뵌 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당신님의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뵌 이는 그 자신이 피조물로서, 더구나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다는 무자격함에 대한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께서 조인을 받아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감격과 경이감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B. B.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56], 491). 이렇게 진정한 신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죽어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에 있을 때에 하나님을 이렇게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영적 교제를 할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가 극치에 이르렀을 때에 우리는 더욱 더 분명히 하나님을 영적으로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은 단순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하다는 말은 사람이 단순하다고 말할 때의 단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본질이 복합적이지(compositeness) 않으시다, 따라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지거나 할 수 없다(free from division into parts)는 뜻에서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즉, 전통적 신학이 늘 강조해 온 바와 같이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을 일으킬 수 없게 하나로 있다는 뜻에서의 단순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각 속성이, 그 절대적 온전성 때문에, 그의 존재 전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each of the properties of God, because of their absolute perfection, is identical with His Being). 이런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분이신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큰 기쁨이고,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벨직 고백서의 내용에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어떠하심 자체를 생각해 보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것에 따라서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알아 가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한 기쁨의 근원이 되듯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묵상 자체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http://blog.daum.net/wminb/13718828에서 퍼온 것입니다. 이글을 이승구 교수님으로 합신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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