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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는 어제 마17:14-21절의 말씀을 사용하여 “귀신 들린 아이의 고치심에 나타난 제자의 모습과 나”라는 강설을 들었습니다. 오늘 다시 말씀을 읊조리어 보면서 ‘존귀와 영광’의 삶을 삼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신앙을 해야 합니다.

 

은사주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귀신이 들려서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귀신 들린 아이의 고침에만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또 보면 어떠합니까? 잠시 의식을 잃고 발작하는 외부적 증상이 간질과 유사한 것으로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아 괴롭히는 영적 차원의 병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병은 모두 귀신이 주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상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과연 오늘 본문은 은사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말씀하는 것입니까? 본문의 문맥과 앞뒤장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전후 문맥이 연결됨으로 더 읽기 쉽게 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탄식하신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 그리고 이미 능력과 권세를 받은 제자들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의 소리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를 향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라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귀신을 내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너에게 믿음이 있는가? 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나 자신의 믿음을 보아야 하는 것이지, 은사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철렁했을 것이고,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권능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다시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다시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고 하면서 ‘주여’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주여’라고 사용하여 신적인(하나님의 아들) ‘주’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주’라고 부름으로 연약한 나의 아들을 의롭고, 존경을 받고 있는 예수님이 고쳐주실 것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 주라고 부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실 것을 믿음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고쳐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변화산에 올라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제자들이 고쳐 줄 것을 믿었지만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니 더욱 예수님을 향해서 ‘주여’라고 하면서 믿음으로 간구한 것입니다. 전후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고칠 수 있는 권세를 받고도 고치지 못하는 신앙의 믿음과 신뢰가 많이 약해진 것에 대한 탄식과 책망을 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고 하면서 연약한 제자들의 믿음을 보면서 당신님은 그 아이의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심으로 능력과 권세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면서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하심으로 ‘너희 믿음이 작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부연 설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가장 작은 ‘겨자씨’를 통해서 ‘가장 작은 믿음’을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있으면 제자들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당신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 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 생활하고자 하는 형제님, 자매님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더욱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고, 고난의 길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급이고 면류관을 얻은 백성입니다. 힘을 냅시다. 오늘 하루도 나의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하나님이 것임을 생각합시다.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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