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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교회

일용할양식

2016.08.19 06:59

2016.8.17일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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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의 부조리한 것을 생각하면 십일조와 새벽기도와 목사에게 맹목적인 충성은 하나의 교회인 공동체인 성도를 무너뜨리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지만 정작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부르심과 교회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서 분명하게 웨스크민스터의 신앙의 고백을 하고, 소요리문답을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일부분의 목사는 자신의 편리성을 위해서 해석을 함으로 가르치는 것은 양심의 고백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전통성을 중요하게 생각을 하지 않고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이단은 더 한심한 것입니다.

 

오늘도 하루를 저보다 먼저 눈을 부비면서 시작을 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대표적으로 잘 아시는 말씀으로 묵상을 하면서 주님만 의지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18:20절은 “두 세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인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로 오해할 수 있지만 가장 일차적인 해석은 마태복음 18장의 전체문맥을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체적인 문맥으로 보면 “권징”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의심이 든다면 주석책을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크리스챤 카운슬링에서도 같은 해석을 합니다.

 

이 해석을 먼저 저에게 하는 것이 성도를 위한 목회자의 마음이라 생각이 됩니다. 목사는 권면도 하고 책망도 해야 하는 막중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를 장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로는 두 부분으 나누어져 있습니다. 목사라 하는 장로는 권징과 설교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장로는 설교가 없는 권징만 있는 것입니다. 권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는 성도를 돌보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책망 받을 만한 일들이 많은 목사입니다. 성도를 섬기기 위해서 성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이지만 목사의 설교와 권징의 임무를 잘 감당하지 못한 죄인입니다. 책망을 할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신령하고 모범적인 인격과 생활도 해야 하지만 나약한 목사임을 고백합니다. 저는 성도를 사랑합니다. 지금도 가장 아픈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성도를 복음주의적인 교회가 아닌 교회로 과거에 보낸 것을 후회하면서 계속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그 분은 그곳이 가장 좋은 교회라고 생각을 하지만 차마 말과 글로 표현을 못하는 목사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 분을 잘 인도하여 주실 것을 믿으면서 기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무조건 권징만 하는 것이 좋은가 할 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스승님은 장로님과 많은 다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장로를 권징할 수 있어도 오랜 기달림으로 기달렸습니다. 교회를 자신의 것처럼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는 장로님을 향해 설교로 독설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할 수 있지만 오직 설교 중에서 바른 해석을 함으로 기달린 것입니다. 그 분은 세계적인 학자의 학위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스승님은 늘 인자한 마음으로 장로님님의 말을 듣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화도 날 것입니다. 하지만 늘 웃으면서 뒤에서는 기도하는 분이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스승님을 사모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를 시작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때는 화도 날 것이고, 어느 때는 웃음꽃이 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세상에서 화를 내야 할까라고 할 때 웃으시기 바랍니다. 그 웃음에는 하나님께서 권징하여 주실 것을 믿고 오직 주님에게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처럼 화를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인내를 하면서 그들이 나와 같은 신앙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환경에서 화를 참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권징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미약하나마 다루었습니다. 교회는 목사의 것도 아닌  교회 공동체의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당회보다 더 중요한 공동의회가 바로 교회의 주인을 잘 표현할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어 가시는 주님만 바라봅시다.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잠시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본문을 더 조명하여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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