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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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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덧 무더운 여름은 어느새 지나면서 가을을 알리는 비가 내리는 수요일입니다. 저에는 비는 슬픔이 많은 추억이 떠 오르게 하면서도 새로운 희망을 생각하는 비이기도 합니다. 이런 날에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성경책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방금 전에 주님이 계신 낙원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오늘을 구원에 대한 글을 적고자 하는 것입니다.

 

조직신학적으로 구원론은 대체적으로 1970-1990년도에 아주 중요한 부분의 역할을 했습니다. 이단들이 여기에서 많은 오류를 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에는 이단을 분별할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단과 정통교회라고 하는 교회에서 교회론이 부실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교회론 때문에 그 기나긴 신학을 계속하면서 왜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목회의 현장에서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방법을 동원하고자 하는 마음의 갈등의 마치 선악 악이 싸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교회론에 대한 문제가 한국교회를 상당히 어렵게 하는 부분이라 먼저 이 부분을 세우는 것으로 갈 방향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돌아와서 구원론에 대한 대한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질문을 던지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으로 믿습니까? 질문에 답은 역사적인 교회의 믿음의 선배님과 오늘날의 우리는 명확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명확한 사실이요, 고백이지만 그런데 이 질문을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놀라운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의 십자가의 사건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 회심하는 것이고 칭의를 얻는 것이면서 구원을 보증받는 것입니다. 내가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증하여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증하여 주신다는 것은 성령님이 함께 하심이고 이것이 성령의 세례이면서 성령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없어지면 내가 노력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인치심은 즉 한 번 구원은 영원한 인도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선배님들은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로교라고 하면서 성도의 견인을 말하지만 잘 못 가르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예는 아닐지라도 생각을 하면, 마치 내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오해와 이단들을 만들어내는 알미니안의 방식을 생각하면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위험성을 알렸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상당수 많은 분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 교회를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 무엇입니까? 알미니안의 방식으로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마치 성공도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된다고 하는 생각입니다. 자기 자신의 결단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자신은 확신을 하는 것으로 회심의 구체적 경험도 없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런 사람들로 인하여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듭난 줄로 여기는 일이 문제다. 효과적 부르심도 없는 백성에게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하니 문제다. 자신은 설교로 통하여 은혜를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이것은 자신만의 상상은혜인 것입니다. 구원의 자신의 노력으로 그리고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노력과 행위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을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가룟 유다가 구원을 얻었는가? 못얻었는가는 주님이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왜 가룟 유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양심으로 구원을 얻을 있을가라는 생각을 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양심을 속였지만 다시 자신의 양심 때문에 흔들립니다. 그러면 주님앞에 나아가면서 회개의 길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의 양심으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으로 양심적인 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자책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하기 힘들지만 양심과 노력 그리고 행위로 구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양심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처럼, 그리고 스데반을 죽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죽었던 그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를 붙잡은 것을 기억합시다. 이것이 진정한 회심이고 진정한 성령의 세례이고, 진정한 성령충만한 삶을 주님을 의지하면서 행활한 것이빈다. 어떠한 고난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자신의 노력이 아닌, 양심도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만 바라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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