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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한삼서1:1-3절을 읽어 보십시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가지고 소위 ‘삼박자 구원’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혼과 세상 일, 건강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 가지만 잘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죽어서는 천국가고, 살아서는 땅에서 성공하고 죽을 때까지 육신도 건강하다면 그야말로 모든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부모님의 영향과 기도원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영향으로 신학교 시절에는 일 년 정도 매주 화요일 동기들과 갈멜산 기도원, 삼각산 기도원 등에서 야밤에 기도한 후 새벽에 내려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복을 받기 위한 것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요삼1:1-2절을 다시 읊조리어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자신을 장로로 소개하면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글입니다. 개역 개정은 ‘편지하노라’고 하지만 어떤 성경에는 괄호로 함으로 원문에는 없지만 삽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요한 삼서는 편지라는 것을 알기에 삽입을 한 것입니다. 관주 표시가 있는 성경이 저는 좋은 성경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혹시, 어떤 성경책을 가지고 읽습니까?

 

‘가이오’의 이름은 로마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을 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가이오’라는 이름이 등장하지만 정확하게 누구인가는 모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가이오’의 뜻은 ‘기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3절에서 말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가이오’의 이름은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가이오는 로마식 이름으로 보아 바울처럼 시민권을 획득한 것일 수도 있고, 로마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이오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1절에서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합니다. 애정 어린 표현으로 진리 안에서 개인적이고 특별한 표현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른 성경에서는 ‘참으로’를 ‘진실로’라는 표현도 합니다. 그러면 ‘진실로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것도 좋은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요한의 진실함이라기보다는 그들 사이에서 확인되고 있는 공통점, 즉 예수님에 대한 동일한 진리를 믿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동일한 실체를 서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 가이오를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였으며 그 진리야말로 절대적인 진실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나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따르는 진실한 자요, 기뻐하는 자요, 사랑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는 지체입니다.

 

하나인 지체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인 성도요 교회로서 진리에 바탕을 둔 신성한 사랑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이 언급하고 있는 ‘사랑’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향해 품으신 그 사랑, 그래서 당신님의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창조해 놓으신 그 사랑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요 교회인 우리는 진리 안에서 연합할 때 초자연적인 사랑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구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계속하여 2절의 말씀을 보면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십니까?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흔히 말하는 삼박자 구원으로 오해할 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범사에 잘 되고는 직역하면 여행하는 사람에게 좋은 길로 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치 인생의 여행길로 성도의 길을(순례자)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좋은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우리에게 그 길은 좁은 길로 좋은 길입니다.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영광의 면류관인 진리의 길입니다. 교회요 성도인 지체님,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은 모든 일에서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말씀에 동의하면서 생활하십니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은 영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생활은 순례자와 같은 모습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모습으로 자녀된 삶을 고난 중에도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설명하여 주기 위해서 요한삼서를 다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요한삼서를 읽어 보시면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은 가이오에 편지를 전달해 주는 전달자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서 진리의 길로 잘 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잘 가는 것은 가이오의 영혼이 잘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순례자와 같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힘들지만 영혼이 잘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지만 축복의 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의 존재에 있어서 영적 차원을 묘사할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왜 이렇게 사용하고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 또는 영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영적인 삶을 생활하는 가이오에게 그리고 오늘날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 사도 요한은 ‘잘 되고’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순조로운 여행을 하다’(롬 1:10)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순조로운 여행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것이고 진리 안에서 생명의 면류관의 길을 걷는 길입니다. 그 길을 걷는 우리에게 그 길을 잘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성도요 교회인 지체에게 강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먼길을 떠나고자 할 때 부모는 자식에게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당시에는 이단들과 그리고 로마의 시대였습니다. 진리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시대에도 예수님을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현실에게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하나님의 길을 잘 감당하면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삼서가 쓰여지는 시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영혼이 잘되는 것을 가리켜 한없이 건강하고 부유하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장담하거나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육신적인 번영이 영적인 건강의 척도가 되는 것처럼 왜곡할 뿐 아니라 육신적으로 번영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진보가 멈춘 것이라고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은 신비주의자들에게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나 오늘의 시대나 가이오(기쁨)의 뜻처럼 기쁨으로 하나님의 길을 잘 가라는 의미로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를 생각하면서 충실한 신앙인의 본을 보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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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2. 9일 삼박자 축복에 대한 글, 과연 그런가? 하나님의 길을 잘 갑시다. 전은덕 2016.12.09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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