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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사야 신학에 대해서 살피려 한다. 이사야서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을 말하라 하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181쪽 참조하라-한권으로 읽는 이사야-장세훈)

 

‘거룩’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왜 ‘거룩’으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란 표현이 무려 25번이나 나타난다. 하나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의 호칭으로서 이렇게 표현한다. 그런데 타 구약 본문? 통틀어 총 6번뿐이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만 26번. 이는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둔다는 것과 이사야가 ‘거룩’에 관심이 있음을 알게 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는 표현도 있다.

 

세 번은 잘 쓰지 않는데, 최상급에 더 최상급, 그 정도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1장에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

 

예레미야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 - 마음의 법

 

에스겔은? - 성전회복(지금 바벨론 포로, 성전은 무너짐.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짐. 그러나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거룩’ - 카도쉬. ‘거룩하다’라는 말로 해석하지만, 원래 뜻은 ‘구별되다’는 뜻이다. ‘set apart from'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오해되어지는 단어 중 하나이다. 거룩이 중요하고 많이 강조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구별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전적으로 구별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 우리는 피조물. 하나님은 구원자, 우리는 구원 받야 할 대상이다.

 

 

모세가 가시떨기 나무 아래서?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 네 신을 벗어라. 하나님이 그 땅에 지금 임재해 계시기 때문에 다른 땅과 달리 거룩한 것이다. 강대상이 ‘거룩’?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으로 구별되어 있기에 ‘성구’가 되는 것이다.

 

카톨릭의 ‘성상숭배’, 물건, 옷, 숟가락 - 만지면 거룩해지는 것처럼. 효험이 있는 것처럼.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다. <

 

 

이사야가 ‘거룩’을 강조하는 이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으로부터이다. 구별되어지지 않으면? 거룩이 없는 것이다. 사라지면 부정이 일어난다. 이사야가 거룩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거룩성을 잃어버린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구별되어져야 거룩한 백성이 되는데 어떤 점에서 구별?

 

1. 예배로부터 구별되어져야 한다.

 

이스라엘인지 이방인인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가? 예배를 보면. 이방인은 우상을 섬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긴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면? 구별되지 않기에, 거룩을 상실케 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신 5:15에 나타난다. “너희는 기억하라” “종 되었던 것을” “안식일을 지키라” 예배 드리는 목적?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배란 자신이 애굽에서 종이었는데,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준 것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일어나게 된다. 결국 예배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 반응인것이다. 드릴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신약에서 마가가 제자도 강조한다. 소경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은 따르라 하지 않았는데, 그는 예수님을 따른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았을 때 자발적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그 전에 젊은 관원이 나타난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나를 따르라 함. 그런데 그는 따르지 않는다. 두 번째는 요한과 야고보.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 누가 더 큰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디매오는 자발적으로 따라간다. 누가 진정한 제자인지를 보여준다.

 

 

구약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은 ‘기억하라’는 것이다. 기억하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 기쁨, 헌신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예배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도 늘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것을 기억하면? 헐벗은 자 보면 당연히 베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방인들의 예배는 근본적으로 이스라엘과 다르다. 그들이 신을 섬길 때 목적이 있다. 그것이 ‘다산’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배를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 때 당시 그들이 믿던 바알은 남신이다. 남신이 비를 내리는데, 비가 ‘씨앗’이 된다. 여신은 자궁이다. 씨를 뿌려주면 여신이 자궁이 되어서 자식을 낳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곡물’이다. 그들의 중요한 관심은 오로지 ‘물질적 풍요’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구속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으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다. 요구하지 않아도 아시고 채워주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언약에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중요하다. 그것에 신실하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복 주겠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에 포커스 두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관계에 둔다는 것이다. 이방인은 오로지 물질적 풍요에 있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예배를 드리다가 농경사회에서 다산이 중요한 시대에,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면 더 많은 풍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 그래서 그들은 양다리를 거치게 된다. 한 번도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적은 없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면 무엇을 상실? ‘거룩’을 상실하게 된다.

 

한국 사람들의 관심? ‘교육’과 ‘부동산’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그 이야기다. 자신교육과 재테크에 관심이 쏠려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 관심 가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추구하는 목적이 달라야 한다. 그들은 그것이 목적이다. 우리는 우리가 구속받은 자로서 어떻게 합당하게 하나님께 우리 자신, 자녀,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유학시절 사역을 할 때이다. 한국인이 이민오면 구역 예배할 때, 장로, 권사님들은 한국에서 온 사람의 직업과 경제력에 관심이 많다. 어떤 분은 어떤 교회다녔고, 어떤 봉사를 했는가에.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데, 자신의 관심에 따라서 나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한국교회 이처럼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2, 예배는 그들의 삶과 윤리와 관련이 많다.

 

레위기 ( 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다산’에 대한 가치(세계관)가 생활 속에 그대로 나타난다(이 때 이를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안된다). 그들의 관심은 더 많은 물질을 충족시켜 가는 것이다. 이방인들의 사회는 항상 ‘이익’이 우선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약육강식’이 나타나게 된다.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장사할 때도 때로는 ‘속인다’.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기 위해이다.

 

 

 

우리가 이러한 목적, 번영을 목적으로 살아가면?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삶의 중심은 ‘이익’이다. 자기이익, 자기 중심적이다. 이에 대한 대안? 전혀 다른 세계관을 보여 주신 분? ‘예수님’이시다.

 

우리의 ‘교육’ - ‘다산’을 위한 교육이다. 전인교육, 인성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다신중심이면? 경쟁, 자기 중심성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 바알신은 헌신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제사’만 요구. 하나님은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심. 그런데 우리는 대입시험이 닥치면 새벽기도? 주일에만? 이방인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이사야 5장을 보라. 재미 있는 표현이 있다. 포도원을 노래한다. 포도원을 짓고, 심었는데? 들포도 열매가 나온 것이다. 제사, 예배 드렸는데 그들의 삶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 5:8)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이 때 이미 부동산 투기가 만연되어 있다. 결국 ‘희년’이 지켜지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 ‘소유’의 인식전환에 있다. 종에서 해방된 사람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주어진 것이기에 은혜의 삶이다. 내 것이 없는 것이다. 구속받은 사람의 특징은 소유권에 대한 인식이 분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유’를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없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은 모두 자기 것으로 여긴다. 결국 삶의 방식이 다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소유’를 자기의 것으로 삼게 되면서 ‘희면’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특징을 잘 들여다 본 사람 중 한 사람이 ‘마르크스’이다.( 5:11)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러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철저히 쾌락에 빠져 살게 된다. 오늘날 이시대와 비슷하지 않은가? 사람들의 관심은 얼마나 더 많은 소유, 더 많은 쾌락을 추구할 것인가에 있다. 어떤 국회의원? ‘카드로 결제된 접대비가 수조원’.

 

이사야는 ‘일찌기’, ‘깊도록’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다.

 

( 5:20)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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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것으로 단 것으로 삼으며’ - 악을 선하다? 다수가 진리를 결정하는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진리를 결정하는 주체가 사람이 된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모습이 나타난다. 영국도 동성애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반대하면? 국회의원에서 떨어지기에. 정치가들이 이를 반대하기 어렵다. 유럽은 동성애가 합법화.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있다. 무서운 사회가 된 것이다.

 

( 5:23)그들은 뇌물로 인하여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의를 빼앗는도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삶.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란 의식이 점점 사라진다. 이방인과 더 이상 구별이 되지 않는다. 사는 것은 이방인과 동일하다.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면? ‘거룩’을 잃은 것이 되는 것이다. 이사야가 무엇보다 중시하는 주제가 그래서 ‘거룩’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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