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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2:23-33
강설날짜 2017-09-03

지팡이교회는 지난 주일 성찬의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은혜의 방도를 통해서 거룩한 공동체임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사두개인들의 시험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더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주전에 강설(설교)했던 말씀을 잠시 요약하여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서로 원수였지만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헤롯당원은 세금을 로마에 내야 자신들이 누리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고,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은 우상숭배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들은 올무를 놓기 위해서 서로 의논을 한 후 ‘선생님이여’라고 하는 것은 호감을 얻고자 하는 것도 있으면서 예수님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속임수입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본 것에 대해서 당신은(선생님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니 우리의 질문에 확실하게 답변하라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무슨 올무를 놓고자 한 것입니까?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그들의 올무는 놀라운 것입니다. 어느 것을 택하든 예수님 스스로 당신님의 말을 통해서 걸려들게 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을 부인하면 로마 정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제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라고 하면 헤롯당원은 자신들의 명예와 권위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인 것입니다.

 

그들의 악한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시면서 세금 낼 돈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데나리온을 가지고 왔을 때 예수님은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이 말씀을 잘 생각하면 무조건 가이사에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에게만 복종하면서 가이사의 권세를 복종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가이사의 권세와 하나님의 권세는 서로 사람에게 복종을 요구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면 둘 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의 원문을 좀 더 살려서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심으로 가이사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데나리온에 있는 가이사의 형상과 글을 통하여 가이사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것은 결국 심판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부를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기 위한 배려로 오랫동안 참고 인내하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주인을 섬기면서 세상에서 복음의 증인자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올무를 놓았지만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올무를 놓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부활 논쟁은 공관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제사장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를 했다고 하지만 불확실합니다. 사두개인은 제사장과 상류층 유대인으로 구성되어 산헤드린공회 요직에 있으면서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 로마의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으면서 더욱 확고히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율법학자들과 논쟁을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 것을 보명 예수님과 논쟁은 더 치열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은 없고, 천사도 없고, 사후세계도 없다고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왜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모세의 오경만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오경에는 부활 사상이 없는 것으로 보았고, 오경을 오해하여 사람이 죽은 후에는 몸이 소명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령 영혼이 있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육체와 같은 것으로 삶이 사망하면 모두 소멸하는 것으로 자의적인 해석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현실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자들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서 성경을 마치 난도질 하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서로 전혀 다른 입장이었지만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악한 마음은 일치했습니다.

 

오늘 분문 23절을 보시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라는 부사어를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의 올무가 같은 날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올무가 정치적인 것이라면 이제는 사두개인들만 와서 “우리가 종교적으로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이고 망상과 같은 이론을 내놓고 그것을 가지고 예수와 한번 겨루어서 그들 궁지에 몰아넣자”고 생각하면서 온 것 같습니다. 그들의 올무는 무엇이었습니까? 24-28절을 말씀을 보십시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26.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이것은 수혼법으로 남편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경우 그 남편의 동생으로 죽은 자의 대를 잇게 하는 고대의 관습입니다. 단지 고대의 관습으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만 믿는 자들입니다. 신6:5-6절을 보시면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6.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법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사두개인들은 모세의 율법 즉 하나님의 법으로 만약 이 법대로 꼭 해야 한다면 부활을 하면 몹시 희한하고 망측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질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수혼법을 주신 이유는 법을 지킴으로 그들의 각 집안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내용들을 현실적으로 계승하고 자식으로부터 홀로 남은 부모를 모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사실 이 법은 창세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키지 않았습니다. 창38:6-11절을 확인해 보십시오. 그 내용을 생각하면 유다의 아들 오난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형인 엘이 사망하자 형의 대를 있지 않게 하려는 악한 마음을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가 악하다고 죽음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과 사람들로부터 들은 후 올무를 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 얼마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인지 수혼법을 통해서 논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만을 믿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경륜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당신님의 거룩하신 뜻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무신론자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여튼 사두개인들은 신35:5-6절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오늘 말씀에서 논쟁을 하고자 합니다. 일곱 형제가 돌아가면서 한 여인과 결혼을 한 다음 자녀가 없이 사망을 했다고 설정을 합니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여인도 죽었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부활은 무엇입니까? 여인이 죽어서 부활하면 일곱 형제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입니까?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율법이 명하는 이 특별한 제도 자체가 내세와 부활의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 권위를 들어서 윤리적이고 도덕적 문제를 들어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님의 사역을 하면서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가르치신 것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답하고자 하십니까?

 

예수님은 29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사두개인들이 잘못알고 올무를 놓아 시험하고자 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수혼법을 주신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경우 오히려 사람의 존재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고 의미 있게 전하는 것이고, 사람의 존재가 죽은 후 부활한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강하게 책망을 하십니다. 30절을 보시면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사두개인이 생각하는 사망은 모든 것이 소멸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의 질서가 지금 이 땅의 세계와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어떠합니까? 사두개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전하여 주신 말씀을 믿지 아니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자 하는 그 풍성한 구원의 은총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바른 가르침을 받아서 나를 더욱 든든하게 하면서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잘 가야합니다. 그런데 사두개인처럼 명예와 권력을 누리면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자 하는 것은 과연 성경의 가르침입니까? 오늘날도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세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생각하면 너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사두개인처럼 부활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좀 제대로 알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하면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들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마태복음은 아주 간략하게 의미만 전달했습니다. 병행본문인 눅20:34-36절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35.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36.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고 하심으로 부활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자만이 부활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면 부활을 어떻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31-32절을 보시면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사두개인들이 오경만 믿는 것을 아시고 오경에 나오는 족장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언급하시면서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을 강변하는 것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하고 특히 부활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족장들이 죽음으로 소멸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시고 있습니다. 전제로 하시면서 사두개인들에게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라고 하심으로 너희는 유대인의 지도자들이니 더 잘 알아야 하는 것이니라고 하심으로 과거나 오늘이나 말씀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믿는 자의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심으로 그들은 살아서 즉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하여 주시기 위해서 32절은 출3:6절을 인용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면 사두개인들이 질문을 한 사후 세계에서 여인은 누구와 결혼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롬7:1-3절을 생각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3.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라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사람이 죽은 후 사두개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자는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하여 일곱 명과 결혼을 한 여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결혼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 형제 중에 한 명과 결혼을 하면 간음죄가 되는 것입니다. 간음죄 중에서도 근친 간의 성 윤리를 범하는 것입니다. 구약은 이 세상에서 육적인 결혼의 관계는 사람이 죽은 후 모든 관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에서 말한 결혼을 오해하여 부활까지 인정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의 하나님이고, 이 세상에서 사망한 후에도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힘을 주시면서 고난과 마치 전쟁과 같은 삶의 생활이라도 나를 지켜주시고 구원하여 주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을 바라보십시오.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행복스럽고 가장 고귀한 영광의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두개인들은 지금 내세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맺어주신 족장들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활시킬 것을 믿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있다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지팡이교회와 당신님의 백성들과 함께 있으면서 내가 죽은 후에도 부활시키심으로 진정한 영광과 권능으로 신령한 새 하늘과 새 땅이 무엇인가를 친히 보여 주실 것을 확신하십시오. 오늘 말씀을 듣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 백성으로 부활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복음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두개인들은 33절에서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돌이킬 수 있는 기회로 말씀을 들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게 도전하는 그들에게 당황하지 않고 그 반대로 고발하심으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강설의 마무리를 청교도 토마스 왓슨의 말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강설(설교)의 유익이 뒤따르지 않는 한 가지 이유는 신앙의 핵심 내용이 교리 문답식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강설만 하고 교리문답 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기초 없이 건물을 짓는 것과 같다” 지팡이교회는 오후에 믿음의 선배님이 유산으로 남기신 교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웨스터민스터 소요리문답 38문답에서 “신자는 부활할 때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유익을 받습니까?” “신자는 부활할 때 영광 중에 일으킴을 입어, 심판날에 공공연히 인정받고 죄 없다 함을 얻고, 완전히 복되게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흡족하게 즐거워할 것입니다.”를 생각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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