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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6:1-4
강설날짜 2024-05-12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ZC4pHbXBwtg

예루살렘 성도를 위해 헌상해야 하는 이유(고전16:1-4)

 

사도 바울처럼 교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인물이더라도 교회를 세워간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맹수와 같은 자들에 의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있기에 오직 교회를 위한 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자들은 많이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세워가고자 하는 시대입니다. 과거보다 오늘날은 맨땅에 헤딩해야 합니다. 목사가 무명이고, 개척 인원이 없고, 재정이 부실하면 맨땅에 헤딩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의 언변이 약해서, 준비가 부족해서 그것보다 나를 위한 유익을 줄 수 있는 대형교회가 더 좋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가르침보다 문화의 혜택을 받고자 대형교회를 찾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맥을 통한 나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라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믿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론이 중요합니다. 이단들의 공통점은 교회론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는 종교개혁가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론을 바르게 가르쳐주신 것을 토대로 교회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진리가 바르게 세워져 가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유기체로 이루어진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숨 쉬고 있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한 공교회이기 교제하는 성도입니다. 생명을 품고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교회를 세워가야 하는 성도입니다. 쉽지 않은 시대에 있지만,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예루살렘 성도를 위해 헌상 즉 봉헌해야 할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상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 지난주 강설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사람의 몸이 있고 짐승의 몸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도 육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육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은 신비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성도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죄로 사망해야 하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혈과 육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는 나팔 소리가 울립니다. 그때 순식간에 교회는 다 몸과 영혼이 변화되어 홀연히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교회만 홀연히 올라갑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혈과 육으로 생활하던 자들도 부활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극과 극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러니 교회는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결실하며 주의 일에 힘쓰며 가야 합니다.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해바라기처럼 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난주 강설을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오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상에 대해 이미 갈라디아 교회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갈라디아 교회만 아니라 마케도니아에서 신앙생활 하는 교회도 예루살렘을 위해 헌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헌상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대체로 한국 교회는 헌금 또는 봉헌 그리고 연보라고 합니다. 헌금이라고 부르면 세상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헌금을 돈으로 오해하며 돈을 내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헌상이라는 단어는 이런 오해를 넘어서 나 자신이 누군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헌상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삶의 영광을 올려드리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헌상입니다. 헌상은 구원받은 백성이 감사하는 마음과 죄에 대한 고백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헌상을 통해 교회 안에 어려운 성도가 있을 때 구제의 용도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성도에게만 헌상이 사용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헌상은 교회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헌상을 은혜가 흘러가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헌상을 통해 복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람은 복을 받고자 합니다. 하지만, 헌상은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자원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헌 집 줄게 새집 다오”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복을 받으며 잘 살기 위해 신앙고백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헌상해야 하겠습니까?

 

헌상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오늘은 본분에 충실히 하고자 합니다. 헌상에 대한 글은 홈페이지를 참고해 주십시오. 사도 바울은 헌상을 통해 구제받을 대상이 누구라고 합니까? 기독교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헌상이 주는 즉 구제하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알도록 합니다. 1절을 보시면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헌상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령한 것 같이 고린도 교회도 연보 즉 헌상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헌상해야 하는 것입니까? “성도를 위하는 연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지역에서 신앙생활 하는 교회도 있지만, 예루살렘 지역에서 신앙생활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지역마다 교회 이름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거룩한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는 지역 교회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헌상을 통해 교회는 서로가 하나의 지체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구제와 사랑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합니다. 교회는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합니다. 교회가 한 몸이라는 것은 헌상으로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헌상 즉 연보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아십니까? 2절을 보시면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매주 첫날 즉 주일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수입에 따라 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매주 예배할 때 헌상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헌상은 많이 하든 적게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직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하도록 했습니다. 정해진 금액 등이 아닙니다. 이단들과 비슷한 자들은 헌상의 액수를 정해주기도 합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도록 많은 금액을 하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단들과 같은 방법으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헌상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교회가 구제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청지기와 같은 삶을 통해 얻은 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준비해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연보를 매 주일 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구제를 위한 헌상이 무엇인지 알도록 합니다. 기독교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는 예루살렘에 왜 구제를 위한 헌상을 해야 했습니까? 예루살렘의 기독교의 출발지라서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예루살렘 지역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던 교회는 재정적으로 매우 빈곤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필요한 물질을 공급하면서 서로 하나의 교회로 만들어가는 데 헌상을 사용하고자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제를 위한 헌상을 통해 도움을 주고자 했습니다. 헌상은 은혜임을 알도록 합니다. 3절을 보시면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헌상을 예루살렘에 전달해 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에 도착하여 강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제의 헌상은 인편으로 전달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인편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인정한 사람을 통해 전달될 수 있도록 합니다. 사람에 의해 전달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3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은혜”입니다. 성경에서 은혜는 복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마치 동의어와 같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고린도 교회가 헌상한 것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는 사람의 손을 통해 헌상 즉 은혜가 전달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고 사람들에 의해 전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과 은혜는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사람을 통해 대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구제는 교회의 본질 사역이면서 복음이 심어지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헌상을 예루살렘에 자신이 직접 전달하지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험에 들도록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한 유익이 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원하는 사람을 통해 전달되도록 합니다. 구제의 헌상을 통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도록 합니다. 은혜는 사람이 아무런 공로 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지역 교회가 예루살렘을 위해 헌상한 것을 받은 예루살렘 교회는 얼마나 큰 기쁨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구제의 헌상은 아무런 대가를 원하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더 극대화되리라 믿습니다. 헌상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오기 전 미리 헌상해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필요에 따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매 주일 헌상한 것으로 잘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이런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원하면 자신도 같이 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교회를 배려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원하는 것처럼 동행하여 예루살렘으로 갔습니까?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롬15:25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를 생각할 때 아마도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간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여튼, 구제의 헌상은 나눔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위한 연보 즉 헌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위해 이방인 교회가 헌상을 통해 섬기도록 하는 것은 은혜입니다.

 

구약에서 십일조를 허락하신 이유는 거류하는 객과 고아 그리고 과부 등 그리고 레위인을 위한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의 섬김을 하기 때문에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류하는 객과 고아 과부 등은 일하고 싶어도 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십일조를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가 섬김의 손길을 통해 은혜를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신약시대 교회는 전통을 이어받아 헌상해야 합니다.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도록 하셨습니다. 꼭 헌상이 아니더라도 구약에서 정해진 방법대로 하고자 한다면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그 외 십일조도 있습니다. 하여튼, 십일조이든 헌상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성도에게 잘 드러낼 수 있는 은혜입니다.

 

이단들처럼 빚을 내면서 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으로 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억지로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처럼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에게 억지로 헌상하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교회를 위한 유익이 아닙니다. 헌상은 교회를 위한 유익이 있으므로 가족을 건실하게 부양하는 계획안에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헌상은 단지 돈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의 은혜를 알며 삶으로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헌상은 우리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삶이 예배라고 했습니다. 모이는 교회로서 즉 예배당에 모여 예배하는 것과 흩어지는 교회로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헌상을 삶으로 하도록 하신 것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늘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교회는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삶으로 예배하는 교회는 헌상할 때 자기 몸을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헌상을 준비하는 자세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당신님의 사랑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교회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을 위해 협력해야 했습니다. 협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의 은혜”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진실한 마음으로 헌상한 성도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랑의 사역과 같은 구제의 사역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실 수 있지만, 교회를 통해 대행하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복음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를 위해 헌상해야 하는 이유를 고린도 교회는 바르게 알도록 가르쳤을 것이라 믿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오늘 본문을 통해 헌상의 의미를 알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헌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며 은혜입니다. 헌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 교회가 교회의 일치를 위해 드러내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공교회로서 교제하는 신자들은 하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은 은혜를 기억하며 삶으로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참된 마음으로 헌상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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