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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6:5-12
강설날짜 2024-05-19

사도 바울의 여행 계획과 고린도 교회를 위한 마음(고전16:5-12)

 

지난주 지팡이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즉 성도를 위해 헌상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십일조에 대한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자들은 구약에서 말씀하시는 십일조는 신약 시대에 십일조는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학자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십일조에 대해 고전16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헌상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십분의 일보다 더 넘어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신의 형편대로 해야 합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분들은 있는 그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시면 됩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십일조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지 율법대로 십일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약의 십일조대로 하고자 하신다면 십일조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시고 하면 좋겠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십분의 일보다 더 많이 내야 합니다. 십일조의 종류가 생각보다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헌상에 대한 것을 검색하면 좋은 책들이 있습니다. 책을 읽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위해 연보 즉 헌상해야 하는 이유를 알도록 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헌상은 사도 바울이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십일조 정신에 있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자들을 위해 십일조를 사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도 있었지만, 고아와 과부 그리고 거류민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사람이 생활할 수 있도록 십일조를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의 출발지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들에게도 십일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빈곤으로 인해 힘든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통해 예루살렘을 위해 헌상하도록 합니다. 교회의 시작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었었지만, 이방인이라도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경제적으로 좋은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교회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헌상을 통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서로 부활의 영광을 위해 주의 길을 가는 성도임을 알도록 합니다. 교회는 피부색이 달라도 언어가 서로 달라도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중요한 것은 거룩한 교회로서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매주 첫날에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헌상을 미리 준비해 두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도착했을 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은혜로운 가운데 예루살렘을 위해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오기 전에 헌상해야 합니다. 헌상할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생각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상해야 합니다. 헌상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 교회는 고린도 전서를 강설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다음 주에 고린도 전서를 마무리합니다. 고린도 전서는 오늘날 교회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많습니다.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십니다.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가기를 소망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지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와 차원이 다른 교회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마무리하기 위해 자기의 여행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행19:21절과 고후1:16절과 연결해 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기록한 장소가 에베소입니다. 에베소에서 헌상한 것을 위해 고린도 지역으로 이동한 후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여행의 목적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로 먼저 갔습니다. 이것에 대해 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거룩함이 상실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도 바울은 당장이라고 갈 수 있었지만, 감정적인 분노로 인해 교회를 힘들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잠시 마게도냐로 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곧바로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이동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한 일꾼으로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쪽 지방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는 장소에는 늘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섭리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사역한 후 어디에 머물고자 했습니까? 그곳은 고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설립했던 고린도 교회에서 체류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혹시”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6절을 보시면 “혹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도 하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고린도 교회로 향한 마음은 갈급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기 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 위해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섭리 가운데 사역해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혹”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머물며 겨울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낼 듯”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라면 가고 멈추면 멈추는 일꾼이요 사도였습니다. 자신의 마음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혹”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알기에 그리고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도 바울을 어디로 인도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고린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로 가야 했던 이유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상한 것을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도 같이 가기를 소망하면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일부 신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의 종교처럼 예수님께 “비나이다”를 합니다. 이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초신자일 때는 그럴 수 있어도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다면 사도 바울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가고 싶었습니다. 7절을 보시면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람이라”입니다. 고린도 교회로 가고 싶었지만, 사도 바울은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라고 합니다. 모든 계획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에 있다는 것을 고린도 교회가 알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도 하나님께 삶을 의탁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 삶은 가장 좋은 행복입니다. 좋은 행복은 나그네의 삶에서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안에 있다는 행복이 있습니다. 바울은 늘 주님의 인도를 구하는 삶이었으며 순종하는 사도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로 가고 싶은 가운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편지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고린도 교회에 가서 이야기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야기해 주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일꾼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로 가고 싶은 가운데 지금 있는 장소는 에베소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현실과 여행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8절을 보시면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려 함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고자 합니다.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왜 에베소에 머물고자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베소에서 봄을 보내고 마게도냐에서 여름을 지낸 후 고린도 교회에서 겨울을 보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온전하게 알 수 없지만,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의 교회를 위한 사역자였습니다. 교회를 위한 사역자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 것 같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현실을 그대로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보시면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기록하고 있는 곳은 에베소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사도 바울은 대적자가 많다고 하셨습니다. 대적자가 많다는 것은 반대로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가 세워질 때 쉽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 교회가 설립되지 않도록 합니다. 대적자가 많아지도록 하면서 사역자들이 지치도록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유효한 문”이 열리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유효한 문이 열리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섭리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능력을 주시면서 교회가 세워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랑하는 것은 자기를 위한 삶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라는 의미를 아는 성도는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입니다. 대적자들이 교회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기회가 되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교회를 세워가고 있는 가운데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제자를 보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디모데입니다. 10절을 보시면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그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라”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제자인 디모데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알도록 합니다. 디모데도 사도 바울처럼 사역하는 일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길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삶입니다. 그런데 지금 디모데가 있는 곳은 에베소가 아니라 마게도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에서 사역하고 있는 가장 사랑하는 제자 즉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냈습니다. 왜 디모데를 보냈을까? 당연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도착하기 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를 잘 맞이할 것을 당부합니다. 디모데는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라고 사도 바울은 칭찬했습니다. 디모데는 젊은 일꾼이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로부터 어려움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를 배려하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역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신자들은 사역자가 교회를 위한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반대로 사역자는 신자들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서로 다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동행한 일꾼이요 복음을 위해 헌신한 사역자이기 때문에 고리도 교회를 위해 가장 적합한 청지기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아들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보기를 소망합니다. 1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그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를 멸시하지 말고 사역을 잘 마치도록 협력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사역을 잘 마무리한 후 평안한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떠나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디모데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이런 글을 썼던 것입니까? 분쟁이 일어난 교회를 위한 사역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디모데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누구를 보내고자 했습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협력했던 아볼로입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이며 구약에 정통한 변증가입니다. 이런 사람이 개종했던 이유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복음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면서 아볼로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쟁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갈 뜻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측을 해 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아볼로, 바울, 게바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볼로가 가면 디모데가 사역하는 데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아볼로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사역하는 일꾼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 했던 사역이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전도 여행의 계획이 무엇인지 고린도 교회가 알도록 합니다. 전도 여행은 혼자도 할 수 있지만, 협력하는 교회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교회를 설립했음에도 불구하고 후원금이 없을 때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중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이요 사도로서 사역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를 지난 후 고린도 교회로 가기를 소망했습니다. 교회가 분쟁으로 인해 흔들리는 것을 바로 잡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편지를 써서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나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위해 편지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로 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사도였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일꾼의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한 사역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대적자들이 많아도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일꾼이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처지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계사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꼭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에는 은혜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을 주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사랑하는 제자요 동역자인 디모데를 먼저 보냈습니다. 디모데가 사역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디모데가 두려움이 없이 사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사도 바울이 설립한 고린도 교회는 디모데를 환영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며 교회의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합니다. 디모데도 사도 바울이 말씀하신 것처럼 “주의 일을 힘쓰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디모데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일을 감당하고 힘쓰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하여튼,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 멸시하지 않으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만 아니라 아볼로도 고린도 교회로 보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아볼로는 지금은 갈 뜻이 없다고 했습니다. 해야 할 사역이 있었기 때문이라 믿습니다. 아볼로는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린도 교회로 가고자 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이처럼 사역은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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