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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4:1-9
강설날짜 2024-03-10

방언과 예언은 무엇일까? 고전14:1-9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는 의로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오직 삼위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사람이 죽은 후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인해 지팡이 교회는 믿음을 소유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함으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교회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생의 전환점이 있습니다. 그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환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전환점은 사람이 그토록 “불로장생”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예배하며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도록 예수님께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인물을 보시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 사도 바울이 있습니다. 다메섹에서 사도 바울의 전환점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에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복음이 온누리에 전파될 수 있도록 한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유전적으로 유대 종교를 믿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개인적으로 바리새인이 되었고,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자신은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죄가 없다고 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세계의 역사에서 사도 바울은 큰 전환점이 되도록 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만 인생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은 전환점을 받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로또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삶을 생활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삶을 생활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은 “방언과 예언은 무엇일까?”라는 강설을 듣기 전 지난주 강설을 되돌아보도록 보겠습니다. “사랑은 은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다”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사랑장은 고전13장입니다. 왜 사랑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사랑에 대해 말씀을 잘 정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실행하는 교회가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모든 은사가 사랑으로 바탕이 될 때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교회가 갖추어야 하는 기본 덕목입니다. 은사는 재림의 주께서 오시면 사라지지만 사랑은 영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도 사랑은 기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은 온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세상의 방식으로 생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성경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생활해야 합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외적인 은사를 좋아합니다. 외적인 은사를 통해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하지만, 결국 교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실 때 외적인 은사를 가진 자들이 방언과 예언과 지식이 있는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소유하며 인생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갔던 성도에게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생활하도록 하십니다. 어거스틴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은사보다 사랑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3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한 후 고전14장에서는 방언과 예언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을 사모해야 할까를 가르친 후 은사를 비교할 규칙을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사랑의 문제가 예언으로 등장합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입니다. 교회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며 성경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한 은사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이런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 바울은 사랑을 계속해서 구하라고 하면서 사랑은 사람의 행위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신령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령한 사랑을 사모하며 삶 속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말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되어 있으니 교회는 예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언은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생각하는 예언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유명해지기 위해 예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한 유익을 위해 예언이 존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언을 말한 후 곧바로 2절에서는 방언을 말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입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방언과 예언을 이야기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 경험에 기초하여 이야기합니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주신 언어의 방언입니다. 방언하는 사람들을 보면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하며 중얼거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방언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자신에게 방언은 유익할 수 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방언으로 이야기하며 청중들에게 소개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낼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유익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사람들끼리 방언을 받기 위해 이상한 말이라도 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방언을 받는 것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절에서 방언으로 말하고자 하는 성도가 있다면 사람들에게 하지 말고 하나님께 하라고 합니다. 진실한 성도는 하나님께 할 것이고, 가짜 성도는 사람들에게 칭찬받고자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 사람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 방언으로 기도하는 성도는 영으로 비밀을 말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방언으로 교제합니다. 그런데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은사도 있습니다. 통역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성도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과 다르게 예언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3절을 보시면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입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다고 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권면이나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예언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유익과 덕을 위해 해야 합니다. 예언은 방언과 다르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 예언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알며 사람들에게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방언과 예언은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나라를 세워가기 위해 주신 은사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바르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를 사용했습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덕을 세우며 권면하면서 위로하는 예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분들이 있다면 교회는 더욱 하나님 나라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대화의 수단이라면 예언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덕을 세우기 위한 대화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교통의 수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차이가 무엇인지 4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한 덕을 세우고 싶습니까? 교회의 유익을 위해 덕을 세우고 싶습니까? 당연히 둘 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자기의 덕도 필요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한 덕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만을 위한 것은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자입니다. 방언하든 예언하든 중요한 것은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위해 예언은 교회의 덕을 위한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방언과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모두 소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아마도 교회를 위한 사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위한 사역자요 사도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5절입니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입니다.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은 예언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방언과 예언은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꼭 은사가 있어야만 교회를 위한 사역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교회를 위해 일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있습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인해 거룩해진 공동체이기 때문에 서로 교제하는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은사도 교회의 공동체를 위해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교회는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잘 알고 있었다면 고린도 교회는 분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은사도 바르게 사용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으므로 자기 경험을 예로 들면서 방언에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방언은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의 유익이 될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방언은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라고 질문합니다. 6절을 보시면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말한 것을 결론 내리고자 “그런즉”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 교회에게 “형제들아”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형제와 같이 친근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방언으로만 말하면 너희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방언으로만 말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와 지식 그리고 예언과 가르치는 것으로 고린도 교회에게 유익이 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변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잘 알려진 악기를 이용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7절을 보시면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입니다. 여기서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피리와 거문고를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피리와 거문고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단어로 번역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알고 있는 피리는 플루트의 일종으로서 대롱 속에 있는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가 나게 하는 관악기와 비슷합니다. 거문고는 줄을 켜거나 튕겨서 소리를 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악기는 이방인들이 신전에서 자주 사용하던 것입니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악기를 조화롭게 사용해야 하는데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기는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조화로운 음을 낼 수 있도록 연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악기만을 자랑하고자 한다면 누가 연주를 듣고자 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 분쟁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 했습니다. 교회의 유익이 되어야 했지만, 오히려 유익이 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받은 방언을 해석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가 사용될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 교회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나팔 소리에 비유했습니다. 8절을 보시면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입니다. 나팔이 분명하게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적이 쳐들어와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전투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나팔수는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나팔을 이용해 소리를 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합니다. 방언도 통역이 되지 않고 아무렇게 사용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시면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입니다.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미가 없는 소리를 내는 것은 호흡을 낭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소리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서로 유익이 될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는 방언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방언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셨는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무조건 하나님께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질서 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은사는 자신을 자랑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의 유익이 될 수 있도록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부 교회는 성장의 도구로 생각합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런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의 목적을 알며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방언과 예언을 바르게 아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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