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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마26:45-56
강설날짜 2018-02-04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26:47-56)

 

우리는 지난 주일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이라는 강설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풍성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의 강설인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는 강설을 통하여 더욱 든든해져 가는 교회로 성장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겟세마네에서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도 극한 시험을 당하면 번민하고 슬퍼하고 낙심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사람의 극한 시험을 넘어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마음을 잘 표현하는 막14:34절을 보시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제자들도 감당할 수 없는 무서운 시험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당하시고 있는 고난의 극치를 솔직하게 드러내심으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없다”는 것으로 제자들과 우리에게도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이런 점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심으로 기도는 고난과 환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겟세마네”라는 의미는 “기름을 짜는 곳”으로 마치 기름을 짜듯이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다고 누가복음은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임박한 고난을 알면서도 땀을 피 방울이 되도록 오직 하나님께 호소를 하고자 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으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는 성육신으로 오신 인성의 불안과 고뇌를 잘 드러낸 것으로 결국 신성과 인성이 하나님께 순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면서 성부 하나님에게 온전한 정직함과 복종 속에서 당신님의 생명을 내어 놓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 번의 기도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이제는 자고 쉬라”고 하심으로 제자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의 고난이 승리되었음을 알리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요16:33절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심으로 당신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도를 생각하면서 시험을 내가 이기고자 아등바등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기도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위해서 당신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기고자 하는 유다가 가까이 왔을 때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승리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그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가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는 강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룟 유대가 배신을 한 것을 안 예수님께서는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고 하신 것을 아실 것입니다. 바로 그 유다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오늘 본문 47절을 보시면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유다는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라고 하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도들“에게서 파송된 경비대원과 함께 예수님을 팔고자 온 것입니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칼과 뭉치를 가지고‘ 왔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에 관심을 집중시킴으로 배신의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누리에 하나님 나라를 전해야 하는 자들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칼과 뭉치로 체포를 하고자 하는 것은 극악무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면서, 용서와 사랑의 가르침과 이적을 보여주셨지만 참으로 아픈 현실입니다.

 

그 동안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했지만 당신님께서는 백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리고 한적한 겟세마네라는 것이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회일지라도 예수님은 겟세마네로 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당신님을 붙잡을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 때가 지금인 것입니다. 배신자인 가룟 유다가 온 것입니다. 이미 경비대원과 약속하고 온 것입니다. 밝은 대낮이 아닌 늦은 밤을 택한 것은 자신들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고 백성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48절을 보시면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외국 영화를 보면 친한 사람들은 입을 맞출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입을 맞추는 것은 친밀감과 존경심을 표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배신의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다윗 시대 요압이 아마사에게 입 맞추려는 체하면서 칼로 그를 찔러 죽인 사건을 생각하면 배신자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경비대원과 약속한 대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49절을 보시면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처절히 능멸하는 행동을 가증한 배신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이 모른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같은 동료인 제자는 속일지라도 예수님을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유다의 모습을 생각하면 사악한 자들의 전형적 속성이며,그들은 겉으로는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부르짖지만 속으로는 파멸과 불의와 탐욕을 누리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속한 자들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오직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하는 가룟 유다는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면서 ‘입’을 맞추는 것은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유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5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가증스러운 유다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친구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친한 친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대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당신님의 제자를 부르실 때는 각자의 이름을 불러 주셨지만 여기서는 매우 이례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포도원의 비유에서 강설로 들었습니다. 그 때에 나중에 온 사람들과 같은 품삯을 받은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한 자들에 대해서 친구라고 했고, 천국 잔치에 청함을 받았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자에 대해서 호칭을 할 때 친구라고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본문에서 사용되는 친구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이름을 호명 받고 있는 친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십니다. 유다가 왜 왔는지를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모르는 채 물어 보는 내용 속에 책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이켜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 승리하심으로 의연하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유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비극입니다. 포도원의 비유처럼 가룟 유다는 아침부터 들어와 일한 품꾼과 같았지만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소유만을 챙기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를 잘 드러낸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배신을 당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하나님께 순복시키는 것을 보면 무한 감사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모든 현실을 보고 있던 베드로는 51절에서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는 것입니다. 유다가 경비원들과 약속한 싸인을 실행으로 옮기자 곧바로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충성을 다짐했던 베드로는 검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배어 떨어뜨린 것입니다. 병행본문인 요18:10절에서는 그 종이 바로 ‘말고’라고 기록함으로 실제적인 사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은 특히 베드로는 싸움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고백한 것처럼 담대함으로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위급한 순간에도 군인다운 모습으로 의지를 지킨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로 이제와 포기를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켜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왕이신 예수님께서 누가 보더라도 그들에게 패배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일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지켜볼 준비는 되어 잊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5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심으로 베드로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 속에는 생명에 대한 존엄 사상이 들어 있는 것으로,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귀한 것이며, 생명을 해하는 자에게 형벌이 주어질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군사적 승리보다 훨씬 더 중요한 승리를 얻기 위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든 그리스도이든 그것이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검을 든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평화주자라고 하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베드로에게 ‘검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한 것이지 내어 버리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을 마태는 강조함으로 평화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체포되는 순간에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3절을 보시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심으로 군사적인 행동이 부적절함을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힘이 없어서 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열두 군단’이라고 하는 것은 7,200명의 천사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앗수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왕하19:35절에서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한 나라의 군대를 송장으로 보낼 수 있는 막강한 힘을 한 명의 천사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두 군단’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마태복음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에게 그리고 당신님의 백성들에게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긴장감 있도록 하시면서 십자가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54절을 보시면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목적이 있음을 알려 주심으로 언젠가는 깨우칠 것이라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열두 군단’를 동원해서라도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를 멸하시되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를 구원하고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잡으러 온 그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뭉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붙잡기 위해 배신과 속임수를 동원한 것을 이야기하심으로 그들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 밤중에 ‘검과 뭉치’를 들고 온 그들에게 위선자임을 알리신 것이고, 진짜 동기를 들추어 내셨습니다. 본래 죄 없는 자가 죄인을 불러 심문하고 판단하는 것이 법인데 오히려 죄인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심문을 하고자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를 동원하여 체포를 하고 심문을 한다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 더욱 불법임을 들려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누리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예수살렘 성전 안에서 앉아 가르친 것을 강조하심으로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체포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56절을 보시면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하심으로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을 체포 하려는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것에 일침을 놓고는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왕이신 예수님께 기대했던 마지막 대답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모든 것을 같이 했지만 이 말씀을 하심으로 부활하시기까지는 더 이상 가르침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순순히 붙잡혀 가시는지, 지금까지 가르쳐 주신 말씀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당혹과 혼란에 빠져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는 것을 이루시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은 정치적이요 군사적인 힘의 왕이 아니라 힘없는 패배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을지언 정”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겠다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도망친 것입니다. 병행본문인 막14:51-52절은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고 함으로 신속하고도 황급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잘 드러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시험과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겟세마네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기도처럼 기도 외에는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도 영적인 전투에서 칼이 아니라 기도로 주님과 동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함으로 결국 한 청년처럼 벗은 몸에 홑이불을 두르고 도망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지하여 그동안 예수님께서 가르쳐 오신 모든 일을 생각하지 못하고, 칼과 뭉치를 들고 온 것을 보면서 도망친 것입니다. 기도로 준비하지 않으면 마귀는 수단 방법을 총 동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할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무너지듯이 그러나 제자들은 부활하여 승리하신 예수님을 안 후에는 결국 주님과 같은 순교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정죄 되시고 처형을 당하시는 과정은 이처럼 이상한 방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절차와 법이 무시되고 옳고 그름이 뒤바뀐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군단’를 동원해서라도 이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큰 은혜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배신한 제자들을 책망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을 위해서 순순히 체포를 당하시는 것은 끝까지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부족한 제자들이라도 당신님을 신뢰하고 따를 수 있도록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자신의 무지를 알고 예수님을 향한 순교자의 삶은 본향을 향해 가는 우리들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심에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에게 큰 축복이 있기를 원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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