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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5:38-58
강설날짜 2024-05-05

부활을 믿어야 구원이 있습니다.(고전15:38-58)

 

부활은 개신교에 있어서 핵심입니다. 부활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 영광의 면류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 중에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개인은 대체로 부유한 가문과 제사장 가문으로 이루어진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누리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 같았지만, 로마 총독과 헤롯 왕과 타협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율법만 믿었습니다. 즉 모세 오경만 믿었습니다. 모세 오경에 부활이라는 단어가 없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은 부활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단12:2절을 보시면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입니다. 구약 성경은 부활을 암시하고 있지만, 사두개인은 몸과 영혼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부활을 논쟁했습니다. 논쟁을 마무리할 때 사두개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모세 오경을 믿고 있던 사두개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육체적인 결혼의 관계는 사람이 죽은 후 모든 관계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에 대한 것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고전15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활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합니다. 그만큼 부활이 중요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길게 기록했습니다. 지난주 지팡이 교회는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 중 일부는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받았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받으면 그들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신앙고백은 다른 사람이 대신 고백해 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고백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했습니다. 맹수와 같은 자들에 의해 위협이 도사리고 있더라도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마음으로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부활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지 말며 깨어 의를 행하고 정신을 차리며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부활을 성도에게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아니하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생활합니다. 하지만, 성도는 거룩한 공교회를 위한 교제를 하며 생활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일반 은총으로 세상 사람들이 부활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합니다. 씨앗이 땅에 심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씨앗이 죽어야 새로운 형태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부활도 비슷합니다. 사람이 죽어 몸이 땅에 장사 되어 썩지만, 하나님께서 몸과 영혼을 부활하도록 하십니다. 그 모습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처럼, 가장 좋은 모습으로 우리를 부활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을 믿으며 신앙생활 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부활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라고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39절을 보시면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과 새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실 때 무엇으로 만드셨습니까? 그것은 흙입니다. 흙을 사용하여 창조하셨습니다. 하여튼, 사도 바울은 다양한 모습의 몸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이것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육체들과 땅에 속한 육체들도 다르다고 합니다. 40절을 보시면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입니다. 몸은 다양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늘에 속한 영광은 따로 있습니다. 즉 부활의 영광은 따로 있습니다. 반대로 땅에 속한 영광도 따로 있지만, 결국 지옥을 의미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하늘에 속한 것들의 영광이 무엇이 서로 다른지 41절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입니다. 육체에 속한 영광이 다른 것처럼 하늘에 속한 영광도 서로 다르다고 합니다. 해와 달의 크기와 밝기를 서로 다릅니다. 그리고 별들도 서로 크기와 밝기도 다릅니다. 이것을 통해 아마도 사도 바울은 육체에 속한 자들도 다양한 모습이 있듯이 부활의 모습도 다양한 영광이 있다고 합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부활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해 주신 말씀을 통해 부활의 육체를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42절을 보시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그와 같다는 것은 “이와 같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비교하는 의미로 부활의 모습도 다양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 강설에서는 부활을 마치 씨를 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씨를 땅에 심음으로 인해 새로운 모습으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부활도 비슷합니다. 땅에 심어진 씨앗 중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사람의 부활도 썩을 것으로 심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썩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삶을 살아온 성도는 썩지 아니할 영광으로 부활합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어떠한 삶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지금의 삶 속에는 질병과 고통과 기쁨 등이 있지만, 부활한 후에는 오직 기쁨만 존재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을 생활하기 때문에 기쁨만 있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하늘에 소망을 두며 썩지 아니할 부활을 위해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삶을 생활하라고 한 후 43절에서는 부활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설명합니다. 43절을 보시면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입니다. 부활 전의 모습은 욕된 몸이지만, 부활 후의 영광스러운 다시 살아난다고 합니다. 즉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모습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건장하고 외모가 아름답다고 하지만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아기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늘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결국 사람은 사망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활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육의 모습만 부활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44절의 모습을 보시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입니다. 영의 모습을 알 수 없지만, 부활은 몸과 영혼의 부활이 있습니다. 지금은 약한 존재로 몸과 영혼이 존재하지만, 부활한 후에는 완벽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함께 생활합니다. 부활은 이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모습은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까? 45절을 보시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입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죄가 들어오므로 영생할 수 없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살려 주는 영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담과 같은 몸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인해 교회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부활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육에 속한 자로 생활하고 있지만, 부활 후 신령한 자로 생활합니다. 46절을 보시면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입니다.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영생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땅에서 났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인해 하늘에 속한 자로 생활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것인가? 반대로 자신의 고집대로 생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47절에서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48절을 보시면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입니다. 흙에 속한 자는 아담에 속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성도입니다. 하늘에 속한 성도는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영광의 모습으로 부활하기 때문에 기쁨만 존재합니다. 49절을 보시면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고전15장을 마무리하기 위해 최종적인 진술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의 성격을 이야기하면서 너희도 나처럼 승리하라고 합니다. 50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한 혈과 육은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부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부활합니다. 썩을 몸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는 예수님처럼 부활하지 못하지만, 썩지 아니할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교회는 부활합니다. 썩지 아니할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부활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51절에서 우리의 모습이 홀연히 변화된다고 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예수님처럼 부활하지만, 어떤 모습으로 변화될지는 비밀과 같습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에는 누구나 부활합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과 생활하는 교회와 반대로 사탄을 믿고 따라 생활한 자들은 지옥에서 생활합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극과 극의 생활을 합니다. 교회는 심판의 때에 영광의 기쁨을 누립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됩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나팔 소리가 울립니다. 그 소리는 참으로 아름답고 웅장할 것이라 믿습니다. 52절을 보시면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입니다. 나팔 불 때 참된 믿음으로 신앙생활 한 교회는 혼인 잔치에 참여합니다. 장사 되어 있던 사람이 나팔 소리를 듣고 부활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님의 모습을 뵐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기쁩니다. 세상에 이런 기적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부활은 순식간입니다.

 

사도 바울은 53절에서 변화된 모습을 다른 말로 설명해 주십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입니다. 마지막 때에 나팔 소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서 생활하고 있던 사람도 부활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자들은 누구나 주님의 재림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는 영광이지만,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온 자들은 상상할 수 없는 눈물이 가득합니다. 그때 주여 주여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복음의 소리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어야 구원이 있습니다. 죄악 된 모습을 벗어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십시오. 주님의 재림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54절을 보시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결과는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기록된 말씀을 믿어야 부활합니다. 성도의 부활은 영원한 승리이며 사망의 영원한 추방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성경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따르는 자들은 영원한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은 지옥입니다. 55절을 보시면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합니다. 사망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더 이상 사망이 없습니다. 단지 지옥과 하나님 나라로 구분될 뿐입니다. 죄로부터 탈출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망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결국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56절을 보시면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망은 죄라는 무기를 이용해 사람이 죄를 짓도록 함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합니다. 죄는 이처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이기는 것이며 사망도 이기며 부활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된 신분으로 삶을 생활합니다. 부활의 승리는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이길 수 있도록 하시며 승리하도록 하시는 누구에게 감사한다고 하셨습니까? 57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음부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음부의 권세도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리하여 주심으로 인해 우리는 값없이 영생의 특권을 누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하도록 하신 것을 교회가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고린도 교회처럼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수고가 헛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부활에 대해 마무리하며 권면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합니다. 부활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방법은 주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기다리는 몸과 영혼의 부활은 영광의 날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활할 때는 불완전한 존재로 생활하지만, 주님의 재림 후에는 부활한 몸으로 온전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썩지 아니할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영광된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부활합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인해 교회는 값없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사라질 세상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을 바라보는 교회는 현재의 삶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는 것보다 청지기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사라지고 없어질 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집착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광을 믿는 성도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알기 때문에 부활을 기다립니다. 부활은 구원이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교회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지팡이 교회는 땅에 속한 삶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맛보기 생활을 하며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활이 구원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한 헌신을 했습니다. 한번 헌신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한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헌신은 또 하고 또 다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헌신은 영원한 것입니다. 참된 한 번의 고백은 영원해야 합니다. 오늘날 헌신 예배를 자주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연약하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위한 삶은 헛된 삶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는 기쁨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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