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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0:14-22
강설날짜 2023-12-10

사람이 주 예수보다 강한가?(고전10:14-22)

 

누구나 신학교에 가면 ‘주의 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교회에서 특히 목사님께서 “주의 종”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원에 가도 “주의 종”이 말씀을 전한다고 했기 때문에 신학교에 가면 누구나 주의 종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연 이런 생각은 바른 생각입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만 주의 종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벧전2:5절에서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9절을 보시면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에게만 하시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카톨릭처럼 계급과 같은 구조가 없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는 사제권을 폐지했습니다. 교회 안에 계급과 같은 구조를 없앴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 목사, 장로, 집사 순의 구조가 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이것을 마치 세상의 기업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직분을 주신 이유는 신자를 섬기도록 주셨습니다. 직분자는 교회 안에서 서로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봉사해야 합니다. 더 많은 일을 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을 더 섬겨야 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교회 안에 목사를 성직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 즉 “말씀 봉사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돌이키도록 한 개혁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는 점점 타락함으로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함으로 인해 목사를 성직자 또는 주의 종이라고 부르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목사는 주의 종도 아니며 제사장도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장처럼 특별하게 기름을 부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따라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니 목사는 에베소의 말씀처럼 목사 즉 교사입니다. 엡4:11절을 보시면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입니다. 여기서 목사란 교회를 돌보고 양육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뒤에 교사 때문입니다. 목사와 교사가 구별된 의미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원어에 의미를 살려 매끄럽게 번역되기를 소망합니다. “목사 즉 교사” 또는 “목사요 교사”로 번역하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세월이 흐르면서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이겠습니까? 누구의 생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성경을 교사처럼 전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며 교사인 말씀 봉사자로서 말씀을 강설하고 있습니다. 강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 강설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왜 그럴까?”였습니다. 우상숭배는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기에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바른길을 가도록 합니다. 우상숭배를 피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로 갈 수 있습니다. 과거나 오늘이나 우상숭배는 교회를 무너지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교회는 자만하지 말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도록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구약시대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과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만이 홍해를 건너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신비한 기적입니다. 그리고 만나와 물을 주시며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신비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멸망입니다. 우상숭배만 멸망의 지름길입니까? 음행도 같습니다. 그리고 주를 시험하는 것과 원망도 결국 멸망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교회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멸망의 지름길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주 말씀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같은 제목으로 할까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주 예수보다 강한가”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교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예수님보다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절대 하나님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이 어떻게 강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런지 오늘 말씀을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사도 바울이 고전10장에서 하고 싶은 말씀 중 핵심입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입니다. 너희들이 우상숭배를 하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 우상숭배 하지 말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합니다. 간략한 말씀이지만 명료합니다. 1절부터 13절에 대한 것을 14절에서 명료하게 “그런즉”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기 때문에 “내 사랑라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14절을 통해 우상숭배를 할 수 있는 자리에서도함께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분별력을 길러야 합니다.

 

우상 제물은 사실 별거 아닙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상 제물을 바친 우상에게 존경과 종교의 행사로 생각하며 먹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다른 종교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신은 오직 하나님만 존재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인정하면 개신교도 종교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15절에서 고린도 교회가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호소합니다.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상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도시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학문으로도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는 날카로운 이성과 토론을 좋아하니 이성과 양심으로 판단해 보라고 합니다. 너희는 지혜가 있으니 판단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함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기 말을 이해하고 따를 것을 촉구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성경이 있기 때문에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판단할 수 있도록 16-18절까지 논증하고 있습니다. 특히 16절과 17절은 성찬을 통해 판단하도록 합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먼저 17절을 보시면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입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시행했고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을 신앙고백 하는 교회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찬의 잔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성찬의 잔이 복을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17절을 차분하게 읽어야 합니다. 중간부터 보시면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입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서로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주심으로 인해 교회는 성찬에 참여하며 교제할 수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이방인 종교도 인정하며 그들의 의식을 존중하며 구원이 있다고 하는 자들은 성찬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는 자입니다. 성찬은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에 참여하는 의미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된 몸과 피에 대한 잔치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된 몸과 피를 통해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회복되었다는 것을 성찬을 통해 늘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함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교제해야 합니다. 그리기 위해 고린도 교회는 우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잔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잔이 축복을 주지 않습니다. 잔에 담긴 내용물이 중요합니다. 잔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니 교회는 성찬이 있을 때 입술로만 참여하지 말고 참된 믿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른 신은 없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16절 뒷부분에서 말한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17절에서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떡은 하나라는 것을 알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님들은 하나의 떡을 가지고 떼며 성찬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의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26:26절에서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떡으로 성찬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몸도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떡으로 참여하도록 함으로 모든 사람이 한 몸이 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떡이 찢어지도록 함으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도록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우상을 섬기지 말고 오직 삼위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믿음이 있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찢어진 떡의 상징인 떡을 떼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참고로 성찬식을 할 때 떡을 미리 떼어 놓는 것은 그리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성경을 의미를 살피며 무엇이 좋은 방향인지 고민해 보십시오. 성찬은 우리가 서로 한 몸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며 주님 안에서 나를 되돌아보도록 합니다.

 

성찬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보도록 한 후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제사를 이야기합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입니다. 읽어 보아도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이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구약의 백성과 대조하기 위함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께 제사한 사람들이 남은 것을 가지고 서로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렇게 하도록 함은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지니도록 하셨습니다. 서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의 신분이 높고 낮음도 아닙니다. 누구나 서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신12:18절을 보시면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에 참여한 사람은 서로 같이 남은 것을 먹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도록 함은 교제하도록 하며 섬기도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16절부터 18절까지 이야기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19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알도록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라고 했습니다. 우상 제물과 우상은 하나님과 멀어지도록 합니다. 우상과 우상 제물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참여하다 보면 신앙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이방인 신은 즉 가짜 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교주들과 같은 자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이용해 소원을 이루어지기 위해 물품 등을 요구합니다. 세상에서 잘 되기를 소망하며 우상을 통해 얻고자 합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상의 허구를 이야기하며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라고 합니다. 20절을 보시면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입니다. 여기서 귀신이라고 불리는 거짓된 신들에게 바치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동과 정반대는 귀신에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귀신과 교제하기를 원합니까? 고린도 교회처럼 귀신들에게 즉 이방인 신에게 제사하고 싶습니까?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예배하고 싶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성경이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21절을 보시면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우상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이방인은 신에게 술잔을 이용해 주피터에게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술과 고기 등을 먹으며 우상의 이름으로 복을 빌었습니다. 결국 잘 되는 나를 원하는 제사입니다. 이와 반대로 교회는 복받기를 소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망하며 존귀와 영광을 섬기는 생활을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인 신을 섬기는 것은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주 예수보다 강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마음대로 하는 행동은 멸망의 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22절에서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 우월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질투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께서 질투하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강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신령한 삶을 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마음의 근심과 걱정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고 따라가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때 ‘주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니 나를 믿으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믿으며 전진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보다 강할 수 없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섬김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불평과 불만을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은 험난하고 쉽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우상과 교제하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와 같은 모습입니다. 지팡이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방식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의 세계관과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 어느 것을 따라가고 싶습니까? 지팡이 교회는 연약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부흥하지 않습니다. 부흥하지 아니하면 잘못된 교회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방법만 있다면 세상의 것을 가져오는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만 부흥하면 어떤 방법도 좋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이런 부흥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흥입니까? 이런 방법은 사람이 주 예수보다 강하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지팡이 교회는 세상을 따라가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제정하여 주신 성찬을 사모하며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 몸입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이 있기에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늘 주님만 바라보며 사람이 하나님보다 연약한 존재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손종하는 교회로 전진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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