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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행9:10-19
강설날짜 2018-12-30

아나니아를 만난 사울의 이야기(행9:10-19)

 

사울이 회개한 사건을 누가는 행9장에서 객관적으로 기록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전에 했던 강설을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스데반의 죽음의 결정권자 역할을 했던 사울을 기록한 후 갑작스럽게 사울이 회개한 이야기를 9장에서 기록을 합니다. 스데반을 죽인 사울은 살기가 등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메섹이든 어디든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것입니다. 어찌 이런 자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은혜가 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사랑에 감사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울의 열정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마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통해 이방인을 위한 복음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사울은 지식과 지혜로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사울에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면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땅에 엎드려져 있는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황당했을 것이고, 이해하지 못하면서 두려웠을 것입니다.

 

사울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아마도 두려웠을 것이고 자신이 해왔던 일들이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심으로 회개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믿음을 주심으로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핍박 자인 사울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님이 누구신가를 알리신 후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사울에게 지시하심으로 아나니아를 만나도록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와 동행을 했던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제자인 아나니아를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누가는 사울의 회심을 이야기 한 후 10절을 접속사로 시작을 합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사울에게 나타나셨을 때는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했지만, 아나니아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함으로 매우 대조적이기도 합니다. 아나니아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을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에 익숙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성품은 행22:12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합니다. 사울에 대한 회심을 잘 알고 있는 증인이었고, ‘제자’로 기록하고 있고,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의 이름의 뜻처럼 당신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것을 사울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울에게 가라는 명령을 11절에서 받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직가’라는 지명은 다메섹 옛 도성 안에 있었습니다. ‘직가’는 다메섹 동문에서 서문으로 통하는 중요한 도로 이며,좁고 곧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대도시로서 남아있다고 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사울이 다소 출신이라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소는 길리기아 평원에 있는 고대 도시로, 국제 무역의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길리기아는 주전 64년에 로마 황제 폼페이우스의 명령으로 로마 지방에 편입되면서 로마 총독의 거주 도시였습니다. 그로인하여 다소는 안토니우스 때부터 세금을 면제 받는 자유 무역 도시로 성장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소 출신 사울을 찾으라고 하면서 그는 ‘기도 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도는 9절에서 말한 것처럼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면서 깨달은 것은 예수님은 그토록 유대인들이 기다려오던 ”메시야“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깊은 고민과 함께 절박함이 있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사울은 기도하던 중에 환상을 통해 아니면 꿈을 통해서 아니니아가 와서 자신의 눈을 볼 수 있도록 해 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2절을 보시면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환상은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고, 두 번째는 기도하던 중에 아나니아가 와서 안수함으로 눈이 회복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도하면서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밀한 과정을 통해 사울을 회심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이방인의 복음 전도를 위해 사울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 감사할 뿐입니다.

 

13-14절 말씀을 통해 아나니아가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은 그 내용이 구체적인 것만큼이나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명령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이스라엘 지역만이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도 사울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의 악명이 온 누리에 자연스럽게 퍼진 것입니다. 사울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에게 있어서 악명 높은 사울에게 안수하라는 예수님의 지시는 충격적인 사실로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은 사울의 회심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지니기도 합니다. 아나니아는 ‘주의 성도’라고 함으로 그리스도인에 대한 다양한 표현 중 하나입니다. 성도는 “구별된 거룩한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성도에 대한 박해가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예수님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의 성도처럼 같은 의미로 쓰였던 것이 14절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시에 여러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사울의 회심은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것이 지팡이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가 이해할 수 있도록 두 가지를 이유를 제시하십니다. 먼저 15절을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울만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서 하나님께 선택된 자임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각자의 삶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그릇으로 부르심을 받은 주의 성도입니다. 이런 의미를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가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16절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심으로 사울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고난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사울이 고난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사람이 믿겠다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음으로 고난 받는 것임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우리도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필연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주의 성도를 핍박했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이 역으로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해 왔던 일을 잘 알기에 더욱 복음을 잘 전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로 잘 알았기 때문에 위대한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의심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명령대로 직가로 가 유다의 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합니까? 17절을 보시면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안수를 한다는 것은 기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에 비해 아나니아의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기록을 합니다. 하지만 행22장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했던 말을 상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회심이 진짜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아나니아와 사울이 만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짧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의 부르심뿐만 아니라 부르심에 대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라는 그릇을 준비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명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사울 즉 사도 바울처럼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화도 날 것입니다. 마음의 울분이 나올 때 기도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형제’라고 호칭을 함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선언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에서 이제는 교제의 대상이요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알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함으로 사울의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예수님의 명령대로 안수를 할 때 어떠한 사건이 일어납니까? 18-19절을 보시면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입니다. 안수를 받은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졌던 것입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사울의 눈이 보지 못하게 된 원인이 제거됨을 묘사하고 있는 의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 마다 다른 해석을 하지만 이적을 사울이 경험한 주관적 느낌이나 상징적 표현으로 이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그 동안 자신이 해 왔던 일에서 눈이 열렸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안 후 아나니아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빌립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베풀었던 것과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례는 신앙의 외적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고백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는 금식에서 이제는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내적 갈등과 고뇌는 아나니아의 안수와 세례로 종결되고, 새로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회심 후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으로 부르심은 전적으로 당신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인하여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전적인 부패로 인하여 소망이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니니아처럼 주의 명령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핍박자인 사울을 찾아서 안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의 경우 역시 쉽지 않은 순종의 모습을 보이기에 귀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짧아서가 아니라 이것이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사람의 회개는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울 역시 자신의 전적인 부패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알고 성경의 지식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참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진실하게 전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진정한 복음은 자기를 부르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회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신앙의 고백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열정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기도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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