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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5:29-38
강설날짜 2024-04-28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고전15:29-38)

 

주님의 부활을 믿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를 고대하며 생활하는 교회는 그날을 계산하고 예측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도덕같이 오실 것을 믿으며 일상생활을 합니다. 언제 오실 것을 예측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삶을 생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을 생활합니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의 주로 오실지 모르지만, 항상 깨어 있는 삶을 생활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말세”라고 합니다. 지금이 말세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심으로 이미 종말의 말세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 말세의 끝은 재림의 주로 오시는 날입니다. 언제가 재림의 날인지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실 날을 믿으며 생활하면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단과 사이비 등은 날짜를 예측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넘어가는 자들은 참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종말의 시대를 생활하면서도 복음을 증거 합니다.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은 전투하는 교회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생활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믿고 들은 사람들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복음이 마음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재림은 언제인지 모르지만, 삶으로 복음을 증거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재림의 날이 다가올수록 무엇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교회는 고난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고난 없는 시대는 없습니다. 하지만, 재림의 날이 다가올수록 고난이 더 강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이 강해지더라도 교회는 믿음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고난이 강해진다는 것은 구원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재림의 주가 언제 오실지 삼위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삶으로 예배하면 됩니다.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몸과 영혼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고전15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지난주 말씀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이 없었다면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부활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인해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함으로 교회는 주님을 믿음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모든 통지와 권세 그리고 능력으로 악한 자들을 멸하십니다. 결국 그들은 심판받고 사망합니다. 사망은 영원한 심판으로 영원토록 지옥에서 생활한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의 연속된 내용으로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고린도 교회는 죽은 자들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죽은 자를 위해 세례를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29절을 보시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베풀어도 죽은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성경 외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다른 종교의 영향을 받는 일부 교회도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이단 그리고 사이비를 구별하지 못함으로 인해 가짜 교회와 성경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이단 등을 믿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지적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30절을 보시면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입니다. 이 질문은 29절과 연결된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 삶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의 삶은 “위험”으로 요약합니다. 사람은 안전하고 평안하고 잘 먹고 잘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늘 평안했습니까? 오히려 죽음과 연결된 삶이었습니다. 이방인보다 오히려 동포로부터 살인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입니다. 바울은 죽음의 위험이 가득했다는 것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자아보다 그리스도의 영광만이 남기를 소원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여튼,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설립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죽음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기를 소망했습니다.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사도 바울은 사망의 그늘이 위협하더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승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사도 바울은 헛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오직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그리함으로 복음이 유럽을 넘어 온 누리에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자기의 삶은 날마다 죽노라고 합니다. 생명의 위험이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숨의 위협과 싸우면서도 오직 복음이 중요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부활을 증거하며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자랑합니다. 그것이 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의 삶보다 부활한 후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극치의 이르는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있었던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32절을 보시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입니다. 에베소에서 싸웠던 자들은 마치 맹수와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격투기 선수처럼 싸웠다는 것은 아닙니다. 맹수와 같이 공격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싸운다고 해서 유익한 것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는 오늘날 과거의 이름이지만 터키입니다. 바로 이곳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미신을 좋아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르테미스의 축제는 큰 행사였습니다. 바로 그날 사도 바울을 죽이고자 온 도시를 뒤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사역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싸우지 않도록 하며 도망치도록 합니다. 복음이 계속 전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맹수와 같은 세상이더라도 부활은 모든 것의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라고 합니다. 과연 이것이 중요합니까? 무엇이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향해 속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런지 33절을 보시면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즐겁게 생활하면 성도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성도를 유혹하기에 참으로 좋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설립되었지만, 사도 바울이 다른 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났을 때 세상의 것에 유혹됨으로 인해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들 때문입니다. 교제는 좋습니다. 하지만, 좋지 못한 교제는 교회를 무너지도록 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며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귀면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그 당시에 유명한 속담입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도 친구가 중요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친정한 교제는 하나님의 교제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권면합니다. 34절을 보시면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나중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말한 의미는 지금 “깨어 있으라”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아무도 모르게 오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고 하는 이유는 교회를 의롭게 하는 것이며,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 중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부끄러움을 알도록 말하니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돌이킴으로 이제는 선하고 의롭게 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성도는 깨어 있는 삶을 통해 사도 바울처럼 믿음으로 생활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무지를 통해 부끄러움을 알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겠습니까?

 

이런 가운데 고린도 교회에게 어떻게 부활이 가능한가를 알도록 합니다. 장사 되어 죽었던 자가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사도 바울에게 질문합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서 어떠한 몸으로 사는가?입니다. 35절을 보시면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입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하면 어떻게 답하고 싶습니까?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왜 어리석은 자들인지 36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뿌리는 씨를 사용합니다. 추수하려면 씨를 뿌리든 심어야 합니다. 그 씨가 알곡과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죽어야 합니다. 씨가 땅에 뿌려져 썩지만, 하나님의 깊은 뜻에 따라 각각의 모양대로 형체를 가집니다. 마치 부활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 장사 되지만 장차 몸은 부활합니다. 부활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현현처럼 됩니다. 하여튼, 씨가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처럼, 부활도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질서 안에 부활을 알 수 있도록 일반 은총을 주셨습니다. 자연을 보고 사람은 신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씨를 통해 부활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완전하게 알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주신 계시의 성경은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창조의 질서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고백해야 합니다. 고백은 부활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부활의 원리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마치 비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고 사도 바울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도 바울이 일생 한결같이 부활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37-38절에서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장래의 형체 즉 부활의 모습과 알맹이를 비교합니다. 농부가 뿌리는 알맹이는 알맹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농부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알맹이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땅에 뿌려진 모양과 전혀 다른 모양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의 몸도 썩어서 부활하여 미래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믿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에 뜻에 따라 각각의 형체를 주셨습니다. 씨앗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형체가 있습니다. 사람이 씨앗에게 형체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단지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사용하면 됩니다. 사람은 창조의 질서 안에서 청지기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가꾸어 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이 해야 할 본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부활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교회를 통해 남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일부 성도는 부활을 바라보지만, 삶은 어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며 돌이킬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교회는 몸과 영혼의 부활을 믿으며 주님의 때를 소망해야 합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되면 안 됩니다. 그들처럼 몸이 썩어 장사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데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씨앗이 뿌려져 새로운 생명을 맺듯이 부활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활하도록 하심으로 새로운 형체의 모습으로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의 몸이 땅에 묻혀 썩지만, 놀라운 것은 몸이 부활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영광입니다. 더 이상 몸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삼위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지금 고난 속에 있습니까? 마치 촛불처럼 꺼져가는 삶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임마누엘”이라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고 주만 바라보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 아닙니까? 그렇다면 성경의 말씀을 믿고 인내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성공을 위한 인내를 하지만, 교회는 부활을 믿으며 상 속에서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승해야 합니다. 바울은 목숨이 위태로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워가는 사도였습니다. 이런 사도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됩니다. 오늘 죽든 내일 죽든 잘 먹고 잘사면 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부활과 내세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늘 죽은 자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생각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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