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지팡이교회

오전예배강설

조회 수 2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9:14-27
강설날짜 2023-11-26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QzjwVf3KXfs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도 바울2

 

지팡이 교회는 품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님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니 지팡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성도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까? 당연히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교회로 부르신 성도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었다면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는 사도였습니다. 진정한 사도이기 때문에 오직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도 걱정하지 아니하며 교회의 구원을 위해 삶을 생활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특히 교회는 사도 바울을 위대한 청지기며 일꾼이요 사도라고 믿었습니까? 그랬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이야기하며 교회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잠시 지난주 말씀을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교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 섬기는 삶이며 고난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대체로 권력과 권위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 한심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 자신은 먹고 마실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도들처럼 자신도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하지 않고 먹을 권리도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권리는 당연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입니다.

 

계속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말했던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자신에 대한 오해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군인과 일꾼들이 무료로 봉사합니까? 월급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신20:6) 그리고 밭 가는 자와 곡식을 떠는 자들도 당연히 일한 대가를 받습니다. 그러면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은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히 대가를 받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도 성전에서 나오는 것으로 먹으며 생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이야기하며 왜 이런 삶을 생활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 후 사도 바울은 14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도 구약의 말씀처럼 똑같이 규정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들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사람들에게서 들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마10:10절에서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입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도 생활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생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고린도 교회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필요한 경비를 달라는 것입니까? 이 또한 아닙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지만, 복음의 사역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형편에 따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예가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수고했던 대가가 아닌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 사역을 위해 받았습니다. 절제 있는 사역을 통해 복음만이 심어지면 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세운 설립자이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을지언정” 고린도 교회에게 짐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우면서 자신의 영광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복음만이 심어질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죽을지언정” 교회를 사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유익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일꾼이요 사도였습니다.

 

교회만이 세월질 수 있도록 하는 사도 바울이 다른 일을 하면 자신이 어떻게 된다고 하셨습니까? 16절을 보시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자기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랑은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 바울의 삶은 완전히 변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남기를 소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직 복음만이 심어지기를 바라면 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처럼 사도 바울은 세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역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사역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며 주의 길을 간다는 것을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죽을지언정” 권리를 포기하며 사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셔서 진정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행복이며 기쁨입니다. 참 놀라운 신비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부정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람은 명예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자기를 부정하는 사역을 통해 오히려 만족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오직 삼위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족과 위로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사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7절을 보시면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입니다. 세상의 노예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임무에 충실합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사도 바울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자랑도 하지 아니하며 묵묵히 교회만을 사랑하며 세워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부르심에 따르는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신 사도였기 때문에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복음만 자랑하는 일꾼이었습니다.

 

복음만을 전하는 일꾼이었기 때문에 전혀 보상을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값없이 생활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18절을 보시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입니다. 사람은 대체로 상 받기를 좋아합니다.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사람의 본심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본심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을 위해 오직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며 값없이 전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오히려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교회를 세우는 힘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에게 매이지 않았습니다. 로마 시민권이라는 특권보다 예수님의 부르심이라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그 특권을 가지고 어떻게 했습니까? 나라면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19절을 보시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입니다.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스스로 사람들에게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종이 되고자 했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을 더 많이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로마 시민권이라는 자유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섬김의 종은 교회를 세워가는 힘이 되었습니다. 사탄이 이해할 수 없는 힘입니다. 사탄이 이것을 이해했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참된 행복의 구원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떤 형식도 초월했습니다. 오직 구원을 위한 삶입니다. 20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입니다. 초월할 수 있도록 하는 삶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신앙의 원리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유대인이 되었고,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의 기질과 습관에 따라 사도 바울은 섬김의 생활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은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삶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지배받으며 섬김의 생활했습니다. 군림하지 아니하며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오히려 섬기는 사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며 예수님의 부르심을 위해 종의 모습으로 헌신한 사도였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늘날에도 존경받는 사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율법 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사도였지만 율법 없는 자 같이 처신했습니다. 21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왜냐하면 율법 없는 자들 즉 이방인의 구원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 없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의 문화적인 상황에 순응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형편에 따라 섬김의 생활을 했습니다. 22절을 보시면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입니다.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카리스마적으로 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히려 약한 자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만이 심어질 수 있도록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람들의 종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신앙의 어떤 형식이나 규칙이 없이 형식을 초월하는 신앙의 원리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자신을 희생하는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고린도 교회는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어떤 마음입니까?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이었습니다.

 

23절을 보시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기 행동에 대한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복음의 주인은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영혼의 구원과 복음의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유를 포기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생활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다면 사람은 칭찬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로부터 특권을 누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권리와 특권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며 사람을 섬겼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 전하고자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위해 너희도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24절을 보시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우리에게 격려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너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합니다.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은 복음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과연 교회는 복음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복음을 위해 그리고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음질하라고 합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한 삶보다 하나님의 삶을 위해 생활해야 합니다. 달음질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알고 있는 교회는 사도 바울처럼 기쁨이 있는 달음질입니다. 기쁨의 달음질을 하는 자들은 절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다른 경주하기 때문에 절제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절제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절제하라고 합니다. 25절을 보시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이기기를 다투는 자”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는 경주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경주하는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처럼 절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없어질 면류관을 얻고자 경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면류관은 썩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오히려 부활함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기쁨을 누리는 영광의 기쁨이 있는 생활을 합니다. 우리는 썩을 면류관을 위해 삶을 생활하고 싶습니까? 반대로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위한 삶을 생활하고자 하십니까? 선택하셨습니까?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절제하는 삶을 생활하며 달음질해야 합니다. 달음질하는 경주자는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경주자는 면류관을 받는 자가 일부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경주하는 교회는 구원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이것이 세상과 다른 구원의 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경주자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정하고 경기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26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입니다. 고린도 교회여!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대적이 있는 싸움이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허공을 치는 것같이”는 당시에 권투 선수들이 시합하기 전 상대방 없이 혼자 연습하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권투 선수와 다르다고 합니다. 사탄과 대적해야 하는 교회는 혼자가 아닙니다. 사탄과 싸워야 하는 교회는 주님께서 함께하기 때문에 절제하며 면류관을 위한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교회는 방향이 있습니다.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날을 소망하며 사도 바울처럼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사도가 무엇인지 자기 삶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27절에서 마무리하며 전도자가 구원의 면류관을 놓칠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고민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흔들리지 않도록 합니다. 당시에 권투 선수들이 상대방에게 공격할 때 얼굴을 가격했습니다. 이것을 이용해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육체의 모든 것을 절제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충성하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죄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안락하고 편안하며 즐거운 것을 좋아합니다. 육체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하면 실패합니다. 구원을 받은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절제하고 자기 몸을 쳐 복종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지팡이 교회는 신앙의 경주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이라는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도 경주를 끝낸 후 상을 받는 것처럼 교회도 신앙이라는 경주가 있습니다. 둘의 차이는 하나는 소멸하고 사라지는 것이지만, 신앙의 경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구원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부르신 부름의 상”은 면류관이라는 영생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지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주자에 비유했습니다. 지팡이 교회는 경주자입니까? 그렇다면 절제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도 바울은 절제하는 삶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며 사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의 길을 이렇게 가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함으로써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로부터 필요한 것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더 든든히 세워지기를 소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도 푯대를 향하여 즉 생명의 면류관을 위해 달음질하기를 소망하며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지팡이 교회도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알며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TAG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설교자 성경본문 강설날짜 조회 수
312 교회를 위해 덕을 세우라 전은덕 고전14:10-19 2024-03-17 5
311 방언과 예언은 무엇일까? 전은덕 고전14:1-9 2024-03-10 12
310 사랑은 은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이다 전은덕 고전13:8-13 2024-03-03 22
309 사랑 과연 사랑의 은사인가? 전은덕 고전13:1-7 2024-02-18 7
308 더 큰 은사는 무엇일까? 전은덕 고전12:28-31 2024-02-04 6
307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전은덕 고전12:12-27 2024-01-28 16
306 성령의 은사 전은덕 고전12:1-11 2024-01-21 15
305 사도 바울이 성찬을 말한 이유? 전은덕 고전11:17-34 2024-01-14 16
304 여자가 머리를 가리는 것 전은덕 고전11:1-16 2024-01-07 14
303 하나님 나라에 호적을 둔 교회 전은덕 시87:1-7 2023-12-31 14
302 성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 전은덕 눅2:1-14 2023-12-24 12
30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전은덕 고전10:23-33 2023-12-17 24
300 사람이 주 예수보다 강한가? 전은덕 고전10:14-22 2023-12-10 13
299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왜 그럴까? 전은덕 고전10:1-12 2023-12-03 24
»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도 바울2 전은덕 고전9:14-27 2023-11-26 20
297 사도가 무엇인지 가르치는 사도 바울 전은덕 고전9:1-12 2023-11-19 15
296 우상 제물을 먹을까? 말까? 전은덕 고전8:1-13 2023-11-12 13
295 정혼자를 둔 자들에게 주는 교훈 전은덕 고전7:36-40 2023-11-05 14
294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전은덕 요1:1-4 2023-10-29 15
293 사도 바울이 말하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마음 전은덕 고전7:25-35 2023-10-08 4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6 Next
/ 16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