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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0:1-12
강설날짜 2023-12-03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G43lq0NkUMQ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왜 그럴까?(고전10:1-13)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6:21절을 보시면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입니다. 성경의 핵심은 당연히 구원이다. 하나님을 믿고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생활하는 것을 소망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구원이 없다면 왜 예수님께서 성육신으로 오셨겠습니까?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주린 자는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는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복음을 들을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구원의 은혜를 품고 생활하고자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알았을 때 성도는 참된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우는 표현을 그냥 우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을 이별할 때 즉 죽음 앞에 있을 때 절망적으로 우는 모습입니다. 절망적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절망이라 무엇이겠습니까? 참된 회개할 때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때 울게 됩니다. 죄악 된 모습과 자신의 비통함을 알게 될 때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통해 의를 위해 주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접한 성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생활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애통하며 우는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지팡이 교회는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 왜 그럴까?”라는 말씀을 듣기 전 지난주 강설을 기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했는가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알 수 있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사랑했기에 고린도 교회에게 권리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권리를 포기함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교회에게 본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오직 복음만을 위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권리라고 사도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든든히 세워져 가는 고린도 교회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푯대를 향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달음질하는 경주자를 이야기했습니다. 선수는 절제하는 삶을 생활하며 경주합니다. 세상 사람도 상을 받기 위해 절제하며 노력합니다. 하물며 교회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영광의 면류관을 위해 경주자처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절제하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사도 바울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절제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고민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상에 대한 강설입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우상은 교회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우상으로부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다루었습니다. 그런 후 사도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에 대한 가르침을 한 후 사도 바울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 고린도 교회를 위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절제가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었는가를 알도록 하십니다. 지난주에 강설을 들어서 아시겠지만, 경주자는 절제하는 힘도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절제하는 삶도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세 시대에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이야기하며 고린도 교회에게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합니다. 불순종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불순종은 구원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섬기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주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어떻게 주목하도록 합니까? 1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입니다. 사도 바울은 혈육으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장점에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라고 하셨습니다. 이방인이라도 주 안에서 서로 한 형제이며 한 몸의 교회라는 것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형제들에게 출애굽 사건과 연결함으로 교회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고 하셨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를 알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마음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오직 복음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가기를 소망하며 섬겼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멸시했지만, 사도 바울은 믿음 안에서 구약의 백성은 신앙적으로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그리스도인 즉 교회에게 있어서 교훈이 됩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구약의 백성을 통해 고린도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즉 홍해를 의미합니다. 홍해는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홍해의 사건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도 아는 내용입니다. 홍해의 사건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 인해 구원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반대로 구원의 능력을 믿지 않았던 애굽 군대는 홍해를 건너지 못하고 수장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절제하는 삶을 생활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가 주 안에서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알도록 사도 바울은 홍해의 사건을 이렇게 해석해 주었습니다. 구약의 교회이든 신약의 교회이든 서로 한 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서로 하나의 몸입니다. 구약의 백성은 모세를 통해 홍해를 건너며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홍해를 건너가 구원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어떻게 말씀해 주셨습니까? 2절을 보시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름 아래서와 죽음의 바다에서 죄 씻음이라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세례도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세례를 받고 주님과 함께 한 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죄 씻음을 받은 교회는 주님과 한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공격해도 주님께서 이기는 힘과 은혜를 주십니다. 주님을 믿는 교회는 주리고 울부짖으며 경주자와 같은 마음으로 절제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섬김의 생활을 하며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교회를 통해 마귀로부터 구원하십니다. 홍해를 건널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구름과 바다를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처럼, 지금은 세례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십니다. 그러니 교회는 주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아야 합니다.

 

홍해의 사건은 신약 시대의 세례를 상징하는 것처럼 3절은 성만찬을 맛보았습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입니다. 사도 바울은 홍해를 통해 구원함을 받은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일해서 먹는 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신령한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광야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물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 양식과 생명의 양식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셔야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오직 교회만이 누릴 수 있는 신령한 음식입니다. 이것을 알 수 있도록 사도 바울은 4절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오직 주님만 바라보도록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먹을 수 없는 신령한 음식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실수하지 말고 참된 길을 가라고 하십니다. 구약 백성을 통해 고린도 교회에게 교훈하셨습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도 사도 바울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에서 기쁨의 감격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신령한 음식을 먹었음에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을 이야기한 후 사도 바울은 5절을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다수는 심판받고 광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러나”를 통해 강한 반어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약속의 땅 즉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령한 음식을 먹이셨는데도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만약 ‘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우상숭배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진노를 결국 영원한 영벌의 사망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는 영원한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극치의 행복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순종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는 악을 즐겨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든든히 세워져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본보기 삼아 고린도 교회는 실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백성들을 본보기 삼아 바른길을 가라고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은 바른길을 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설립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른길을 가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뼛속까지 교회를 사랑한 사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도 바울은 더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생활할 수 있도록 사역했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구약의 백성들이 자주 하던 행동이기도 합니다. 7절을 보시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방인 신전이 있는 곳에 가셔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구약의 백성들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들은 양심의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심의 자유라고 생각하며 신전에서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행동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출20:3-5절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외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은 죄 중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데도 신전에서 구약의 백성들처럼 뛰놀았습니다. 뛰놀았다는 것은 구약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춤추며 놀았던 것을 묘사한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는 날은 있습니다. 죽은 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입니다.

 

우상숭배를 이야기한 후 사도 바울은 8절에서는 음행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출애굽 하기 전부터 신비한 체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출애굽 한 후에도 신비한 체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악을 즐겼습니다. 8절에서 그들이 행한 악은 “음행”입니다. 구약의 백성은 이방인 여인 즉 모압 여인들에게 유혹당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신전에서 우상을 섬기며 성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자들이 하나님께 돌이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숭배와 음란은 교회를 무너지도록 하므로 죄에서 벗어나라고 합니다.

 

우상숭배와 음란을 이야기한 후 사도 바울은 9절에서 주를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의 기적과 그 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사도 바울은 뱀 사건이라고 합니다. 구원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구원받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물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이런 일이 없도록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원망은 멸망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교회를 지킬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이렇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11절을 보시면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입니다. 너희들은 나의 이야기를 듣고 정신을 차리고 주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어떠한 결과를 맞이했는가를 알도록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게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 것을 우리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씀한 “말세”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로 다시 오기까지를 의미합니다. 즉 지금도 말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본보기 삼아 죄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그런즉”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용하는 이유는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권면하려는 접속사입니다. 원문의 의미로는 “그런즉”은 “그러므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 교만한 자들은 지식이 넘치고 온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만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처럼 멸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자신들은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한다고 자부심이 강하지만, 오히려 넘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하십니다. 사람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자만하면 안 됩니다. 벼가 익을 때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땅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그런즉 사람도 하나님 앞에 몸과 영혼을 숙여야 합니다. 자신은 거룩하기 때문에 우상 제물에 참여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려도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기 자신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는 등불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배님이신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시119:103)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어떠한 결과가 있습니까? 13절을 보시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입니다.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이기도록 하십니다. 광야에서 유혹을 이기고 어른 중에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입니까? 모세도 아닙니다. 아론도 아닙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이 출애굽 했지만, 어른 중에는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였습니다. 그들은 넘어질까 조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믿음의 선배님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감당할 것은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시험입니다. 시험은 이처럼 쉽지 않습니다. 마귀는 교회를 시험합니다.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넘어지지 않도록 오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을 아십니까? 그런 욥도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행하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며 의와 선을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말씀 가운데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처럼 우상숭배하고, 음란하고, 교만하면 멸망합니다. 스스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홍해를 건넌 백성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나를 지킬 수 있는 길입니다. 오늘 말씀을 늘 기억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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