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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전은덕
성경본문 고전12:12-27
강설날짜 2024-01-28
동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yVyorHfH2rQ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고전12:12-27)

 

어느 교회이든 주일을 강조합니다. 주일은 교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 예배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입니다. 일주일을 처음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주일이 마지막 날로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안식일 즉 토요일이 마지막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주일을 시작하는 주일에 부활하신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 엠마오로 가는 두 명의 제자에게 나타나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가 당신님이라고(예수님 자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 후 제자들과 성찬을 했습니다. 바로 그날이 무슨 날이겠습니까? 바로 주일입니다. 그 후에도 예수님께서는 주일에 제자들에게 당신님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날도 역시 주일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주일마다 모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예배했습니다. 그러면서 재림의 주를 기다리며 교회는 몸과 영혼이 부활하는 그 날을 소망했습니다. 자신들만 구원받기를 소망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도 주님을 메시야로 고백하게 하려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명령하신 것이 지상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과거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성경을 사용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일날 예배당에 모여 교회로서 삼위 하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합니다.

 

오늘 말씀을 강설하기 전 지난주 말씀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현실을 잘 알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주고자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은사를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주십니다. 중요한 것은 은사는 다양하지만, 모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각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것이 은사입니다. 은사는 교회를 위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성도는 이미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주라고 고백하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주의 일을 하도록 하십니다. 은사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복음을 위해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이야기한 후 사도 바울은 신자들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우리의 몸을 이용해 설명합니다. 교회는 신자들 즉 여러 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격이 다 달라도 교회는 하나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 12절을 보시면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주 성령의 은사를 말씀한 후 은사의 섬김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몸과 지체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은사는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다고 합니다. 몸은 하나의 지체만 가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몸은 머리, 눈, 코, 발, 뼈, 근육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몸처럼 교회도 많은 신자가 하나의 교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몸과 지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로 비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처럼 살아있는 몸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교회는 서로 한 몸인 통일체입니다. 이렇게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주로 고백하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께서 세례를 주심으로 한 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교회가 하나의 지체가 될 수 있도록 누가 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시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나 때문이 아닙니다. 성령 때문입니다. 피부와 혈액형, 사회적 신분 등을 초월해 성령께서 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이 한 몸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들이 성립되는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한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세례를 주셨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이처럼 피부와 혈액형, 사회적 신분 등을 초월해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도록 함으로 교회는 영적 유기체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 뜻은 성령 세례를 의미합니다. 보충 설명하기 위한 사도 바울의 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7:37-39절에서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을 생수를 마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분쟁하고 분열하면 안 됩니다. 주 안에서 교제하며 한 몸이 될 수 있도록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서로 이름이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지만, 우리가 모두 주 안에서 한 몸 공동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이해할 수 있도록 14절과 15절에서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지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12절의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한 몸에 있는 지체들은 다양합니다. 몸은 단 하나의 지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지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체들의 다양성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서로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몸을 이용해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생활에 대한 진리를 알도록 하십니다. 교회는 하나의 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기능과 역할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기능과 역할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다양하게 주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손과 발 그리고 눈 등은 서로 다른 일을 합니다. 하지만 서로 한 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신체는 불가분리의 원칙이 있는 것처럼 교회도 갖습니다. 교회 지체들의 다양성은 중요합니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라고 할 수 있습니까? 몸에 붙지 아니했다고 하면서 말하는 자들은 교회를 깨뜨리려는 자입니다. 손과 발은 서로 섬김이 있는 독립성이 있습니다. 은사도 여러 가지가 있으면서 독립성이 있습니다. 이런 독립성은 한 몸이 되도록 하며 교회로서 존재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서로 자신을 위한 신앙생활을 하고자 했습니다. 은사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눈은 자신이 최고라고 합니다. 발은 자신이 최고라고 합니다. 이런 교회가 좋은 교회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주님처럼 섬겨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지체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체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성령께서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신체 중 가장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하지 아니한 것은 없습니다. 신체를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영향력이 없는 것 같지만 필요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교회 안에서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오직 은혜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는 서로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하면 안 됩니다.

 

지팡이 교회는 한 성령의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교회로서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17-19절의 말씀을 사용해 지체들의 다른 기능의 예를 들면서 서로 한 몸이 되도록 합니다. 먼저 17절을 보시면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라고 하셨습니다. 몸은 신체 중 한 부분으로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몸은 다양한 신체가 있어야 합니다. 온몸이 눈이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 교회가 오직 하나의 은사로만 존재한다면 교회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로 존재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인종의 차별이 없이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도록 하기 위한 사랑입니다. 신체처럼 교회도 서로 보완적인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세밀한 창조의 사역에서도 다양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18절을 보시면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과 창조 행위를 의미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 행위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17절의 말씀을 부연 설명하기 위해 19절에서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라고 하십니다. 서로 자기가 최고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람이 모여 교회를 이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다양한 은사를 존중해야 합니다. 지체는 많으나 몸이 하나인 것처럼 몸의 모든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20절을 보시면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하나의 통일된 교회로 존재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지체들의 대화를 들어 21절을 보시면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체들의 이야기하는 것을 이용해 통일성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특히 눈과 머리의 입장을 이야기합니다. 눈이 손에게 말합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눈이 손에게 너는 필요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머리는 발에게 너는 쓸데가 없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필요가 없습니까? 통일성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고린도 교회처럼 자기중심적 삶은 교회의 통일성을 깨뜨립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만들기 때문에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귀한 신분입니다. 은사도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서로 경시하는 자들에게 지체들의 특성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몸 중에서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꼭 필요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몸입니다. 22절을 보시면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강한 부정을 사용함으로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고유한 중요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린도 교회는 서로 돌아보는 것이 고유의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직분이 존재합니다. 사도 바울은 22절의 말씀을 23절에서는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를 다른 표현으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입니다. 은사를 가진 신자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분쟁하지 말고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거룩한 공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연약한 신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멸시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화로운 교회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쟁이 없고 서로 돌보는 교회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생활해야 합니다. 25절을 보시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체는 서로 하나님께서 주신 특성이 있습니다. 외면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가 지체의 특성을 인정하면 분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다 죄인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값없이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지체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도록 교제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교회를 이루는 방법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구원하고 있다는 것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늘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 위해 교회는 서로 돌봄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사도 바울은 26절에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람의 신체처럼 아프면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면서 서로 한 몸처럼 유기체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교회가 돌보지 아니하면 신자들은 통일성을 상실하고 분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지체들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누구에게 적용하고 있습니까? 27절을 보시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서 통일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다양성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 몸의 각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지체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체들의 몸이 서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붙어 있지 않다고 해서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필요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체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하지 말고 서로 돌보며 주의 길을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며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생명을 주심으로 교회는 값없이 은혜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값없이 주신 선물을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나와 같은 성도도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몸의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입니다. 몸의 지체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쓸데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고르게 하여 부족한 것이 있으면 존귀하게 만드십니다. 연약한 지체가 있다면 각자의 특성을 인정하며 장성한 분량으로 이를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다양한 은사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잘 사용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섬기지 못하고 분쟁했습니다.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고린도 교회는 첫사랑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도 고린도 교회와 같은 현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방향으로 주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신적 공동체입니다. 신적 공동체의 하나 됨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세상과 다른 교회요, 세상과 같을 수 없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사랑하며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을 사모하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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